중국 사람들이 천하제일의 호수라고 부르는 서호(西湖). 이곳은 조선의 선비들의 영원한 우상이었던 동파 소식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중국 특유의 표현이기는 하지만, 중국인들은 ‘하늘에 천당이 있다면 땅에는 소주(쑤저우)와 항주(항저우)가 있다’고 호들갑이다. 모든 게 부족하던 시절에도 항주는 풍부한 수량과 비옥한 토지로 인해 끼니를 거르는 사람이 없었다는데서 붙은 별칭일 것이다. 무엇보다 7세기 이후 수나라에 의해 건설된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는 일찍부터 항주를 중국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물류의 중심지로 부상시켰다. 이후, 나약하던 한족 왕조 송(宋)이 그 전의 수도였던 개봉(開封)을 빼앗기고 항주로 수도를 옮겼으니 바로 남송(南宋)정권이다. 경항대운하와 서호의 영향으로 항주는 안개가 드리운 날짜가 많다. 베이징과 항주를 연결하는 이 운하는 길이 1764㎞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긴 물길이다.
서호는 이처럼 항주의 상징과 같은 곳이다. 동서 3.2㎞, 남북 2.8㎞의 크기를 자랑하는 인공과 자연이 어우러진 호수인 서호는 1400여년 넘게, 중국의 수많은 시인묵객들에게 창조적인 영감을 불어넣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장한가를 통해 노래한 백거이,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이었던 소동파는 서호를 단순한 호수가 아니라 중국 문화의 집대성으로 만들었다. 특히 백거이와 소동파는 항저우 일대의 지방관을 역임한 데다 서호의 2대 제방―현재는 다리처럼 쓰이고 있는―인 백제(白堤)와 소제를 쌓아 오늘날의 서호를 만드는 데 이바지한 사람으로도 손꼽힌다.
서호의 볼거리는 호수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서호십경(西湖十京)이라 불리는 10가지의 소경이 백미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 열 가지는 계절별, 시기별 풍경의 특징 중 하나이기 때문에 외국인이 다 감상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제방 백제에 눈이 내린 후, 다리 가운데부터 녹기 시작할 때 마치 다리가 끊어진 것같이 보인다는 겨울풍경의 대명사 단교잔설(斷橋殘雪). 새싹이 돋을 무렵 물안개와 함께 어우러진 몽환적인 아침 풍경의 대명사 소제춘효(小堤春曉), 해질 무렵 서호 밖 남쪽의 불교사원 정자사에서 치는 종소리의 아련함을 즐기는 남병만종(南屛晩鐘) 같은 정취는 시기만 맞춘다면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일상의 모습들이다.
서호에서 배를 탔다. 안개가 너무 짙어 수십 미터 정도밖에 시계가 확보되지 않는다. 그래도 배를 탄 사람들은 즐겁다. 중국 4대 미인 중의 하나인 서시(서자호)를 떠올렸는지, 유람객 중에는 처녀 아이들이 유독 많다. 뱃머리 앞에서 온갖 애교를 담은 포즈를 취하며 자기들끼리 자지러지게 웃는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하긴. 바람결에도 반응하는 건 젊은 처자들의 특권이 아닌가. 그런 모습을 보는 것조차 즐겁게 느껴진다. 서시는 이곳 서호를 돌아보며 ‘아침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고, 비오는 날엔 더욱 좋아요’라며 애교를 피웠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니, 중국 처녀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는 서시의 미모를 의식한 서호의 또 다른 풍경일 것이리라.
정자사는 남병산(南屏山)의 중간 봉우리인 혜일(慧日峰) 아래에 위치한다. 불당 내에는 저 유명한 제공(濟公)의 상이 모셔져 있다. 사찰 내부의 제조전(濟祖殿) 전면에 있는 오래된 우물은 이곳에서 가장 특색 있는 장소이다. 서호(西湖) 10경 중 하나인 ‘남병만종’은 정자사(净慈寺)의 종소리를 말한다.
정자사(淨慈寺). 이곳은 우리에게 『선요(禪要)』의 저자로 잘 알려진 고봉 원묘(高峰原妙ㆍ1238~1295) 선사가 생사를 걸고 화두 들은 발심도량이다. 알다시피 『선요』는 간화선의 요체를 잘 집약해 보여주는 선문의 이름난 책이다. 고봉 선사는 3년 안에 깨닫지 못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각오로 ‘태어날 때에는 어디에서 왔으며 죽어서는 어디로 가느냐(生從何來 死從何去)’는 화두를 들고 불퇴전의 용맹정진을 했다고 전한다.
정자사는 송대 5산 10찰의 하나로 염불선(念佛禪)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오월국 왕 전흥숙이 954년 염불정토(念佛淨土)사상과 선의 일치를 주창한 법안종 제3조 영명 연수(永明延壽ㆍ904~975) 선사를 위해 건립한 도량이다. 정자사는 한국불교와도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고려왕 광종은 영명 선사의 『종경록』과 『만선동귀집』을 읽고 감동해 당시 중국에서 유학 중인 혜거 스님을 급히 귀국하게 한 뒤 승려 36명을 선발, 영명의 문하에서 법안종풍을 잇게 하기도 했다. 이역만리 이곳까지 오직 진리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선조 스님들의 구법열기를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고려의 스님들에게도 법등을 전했을 영명선사가 이곳 정자사에서 펼친 법안종풍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는 ‘자화상’이란 제목의 선시가 있으니, 소개한다.
‘영명의 뜻’을 알고 싶거든
문 앞의 저 호수를 보라
해가 뜨면 반짝이고
바람 불면 물결이 이네.
欲識永明旨 門前一池水
日照光明生 風來波浪起
서호를 바라보며 자리한 정자사에 머물던 영명연수가 호수의 풍광을 묘사하는 것으로 종횡무진, 자유자재하며, 마침내 적정의 참맛을 체득한 경계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뛰어난 절창이 아닐 수 없다.
정자사에는 공사가 한창이다. 중국사찰들은 어디를 가나 공사 중인 아닌 곳이 드물지만, 또 불사를 하는 것에 이의를 달 이유도 없지만, 왠지 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든다. 하기야 이 세상에 공사 중이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만.
문득 몇 해 전 필자의 친구가 회식자리에서 취기에 싸여 풀어놓았던 ‘공사 중’이란 제목의 시가 떠오른다.
내 인생은
지금
공사 중입니다
혹시
보행에
불편을 드리지는 않았는지
내 인생은
아직
공사 중입니다
당시 이 시를 듣고 기억력이 몹시 약한 편인데도 불구하고 단번에 외웠으니, 스스로 놀랍기도 하다. 음미할수록 맛이 깊어지는 이 시를 읊고도 그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비범한 문재를 가진 그 친구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아무려나, 일주문에 들어서자 도량 안을 가득 메운 희뿌연 연기가 코를 찌른다. 평일임에도 제법 많은 향객들이 대웅보전 앞에 놓인 대형 향로에 기다란 향을 한 묶음씩 사루고 있다. 부처님을 향해 합장한 채 정성스레 예를 표하는 중국 불자들의 모습이 자못 진지하다.
고봉이 정자사로 들어와 교종에서 선종으로 출가 행로를 바꾼 것은 그의 나이 20세 때의 일이다. 당시 이곳에는 단교묘륜(斷橋妙倫) 화상이 주석하고 있었는데, 그는 당대 고명한 선장(禪匠)이었던 무준사범(無準師範) 선사의 법제자였다. 고봉은 교학으로는 결국 궁극에 이르지 못함을 깨닫고 이곳에서 납자의 길을 걸은 것이니, 정자사는 선문의 우뚝한 고봉인 고불(古佛, 고봉의 별칭) 고봉을 낳은 선불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라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대웅전의 본존불 뒤편에는 제공스님의 입상이 모셔져 있다. 거지 스님으로도 불리는 제공 스님은 명나라 때 실존 인물로 낡은 모자에 찢어진 부채를 들고 마을에 나타나 음식을 얻어먹고 다녀 거지 스님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동서고금 인류 역사를 통틀어 유명한 인물들이 많지만, 남녀노소와 신분을 불문하고 많은 이로부터 공감과 지지를 받는 사람은 많지 않다. 5천년 중국의 역사 속에서 세대와 신분을 넘어 사랑받는 인물이 바로 인간활불, 즉 살아있는 부처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제공 화상이다. 그가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 많은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제공을 활불이라고 부르며 공경한다.
2009년 션원(神韻) 공연 중에는 이 제공스님을 소재한 작품이 있었다. ‘제공이 신부를 빼앗다(濟公搶親)’라는 제목의 이 작품 줄거리는 이렇다.
하루는 제공이 영은사 앞을 지나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천목(天目, 다른 공간을 볼 수 있는 제3의 눈)으로 바라보니 장차 산봉우리가 떨어져 내려와 마을을 덮친다는 것을 알았다. 깜짝 놀란 스님은 마을을 찾아가 큰 소리로 장차 닥칠 환란을 말해주며 빨리 대피하라고 알렸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미친 중이 헛소리를 하는구먼!” 하면서 손가락질만 할 뿐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곧 닥쳐올 위험을 감지해 마음이 초조한 제공 앞에 마침 어느 집에서 새 신부를 맞이하는 행렬이 지나갔다. 이에 한 가지 꾀를 낸 제공은 다짜고짜 행렬에 뛰어들어 신부를 들쳐 업고는 줄행랑을 쳤다. 사람들은 미친 중이 신부를 빼앗아가는 것으로 여기고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추격했다. 그런데 스님을 좇던 사람들이 마을 입구를 막 벗어날 무렵 갑자기 산이 무너지면서 산봉우리가 떨어져 내려 마을을 덮쳤다. 이 때 걸음이 느린 한 여인이 큰 바위에 걸릴 뻔하자 이를 본 제공스님이 신통력을 펼쳐 산봉우리를 밀쳐버렸다. 산봉우리는 약간 기울어져 여인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제공의 기지 덕에 모두 위험한 고비를 벗어났다.
어느 날, 산사태가 일어날 것을 예견한 제공 스님은 마을 사람들에게 피신하라고 일러줬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냥 두면 마을 사람들이 다 죽게 될 지경이었다. 마침 마을에 결혼식이 열려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제공 스님은 느닷없이 신부를 안고 마을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제공 스님을 잡기 위해 좇아 나갔고, 잠시 후 산사태가 발생해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다. 이날 이후 마을 사람들은 제공 스님을 존경하며 극진히 대접했다.
그러나 오늘 정자사를 찾는 연유는 제공활불과 고봉원묘의 족적을 더듬는 데만 있지 않다. 저 일본에 조동의 묵조선맥을 전수해준 천동여정 선사가 주지를 지낸 절이라는 점에서 그의 법향을 현장에서 흠미하는데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곳에는 천동여정의 사리탑이 세워져 있다. 절 뒤편 산자락에 위치한 사리탑은 그 솜씨가 조악하기는 하지만, 의미만큼은 다른 어떤 탑에도 모자라지 않는다. 선사의 탑 앞에서 참배를 하고 있노라니, 그 옛날 정법의 전등을 위해 위법망구를 서슴지 않았던 선지식들의 모습이 눈앞에 환영처럼 떠오른다.
“대송국에서는 정자(사)의 정노(淨老)가 도의 눈(道眼)을 갖추고 있다. 그대가 친견하면 반드시 의심을 풀어주고, 그대의 스승이 되리라. 대송국(大宋國)에 선지식이 많다고는 하나, 홀로 여정화상이 있어서 눈밝은 종장(宗匠)이다. 불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정화상의 회하(會下)에 참예(參預)하라. 반드시 소득이 있으리라.”
노진(老璡)이라는 노승이 구법을 위해 중국행을 한 도겐에게 전한 말이다. 이를 인연으로 천동여정의 문하에 가서 공부를 한 도겐은 4년 남짓해 일본으로 귀국했으니, 그때가 1227년 8월, 교토다. 그는 경전이나 불상 등 아무런 물건도 지니지 않고 몸만 돌아왔다. 그는 이런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총림을 여기저기 많이 다니지도 않고, 그저 천동선사만 뵙고서는 ‘눈은 옆으로 찢어졌고 코는 솟아올라 있다(眼橫鼻直)’는 것을 알게 되어서, 사람들에게 속지 않게 되었다. 이에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까닭에 한 터럭만큼도 (전해 온) 불법은 없다. 그저 때를 보낼 뿐이다. 아침마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저녁마다 해는 서쪽으로 진다. 구름이 걷히면 산은 뼈대를 드러내고, 비가 지나가면 사방의 산들은 더 낮아 보인다. 필경 어떠한가?”
<김호성 교수의 ‘입송전법사문 도겐-송나라 유학에서 무엇을 배웠는가’에서 인용>
도겐이 보여준 가풍 역시 천동여정의 여여한 경계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앞서 천동사 편에서 소개한 바 있거니와, 그가 선시의 백미 중의 백미로 꼽은 스승 천동여정의 ‘반야송’ 역시 ‘바람에 우는 풍경소리를 반야의 음으로 듣는’ 절창을 드러내고 있음이다.
이제 이곳 정자사를 끝으로 ‘일본불교사공부방’ 회원들과 함께 했던 중국 항주의 주요 사찰 순례를 접는다. 4박5일의 짧은 여정이었는데도, 순례기라는 이름으로 ‘넋두리’를 늘어놓다 보니, 내용이 길어졌다. 연재를 하면서 일본불교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당송대에 이르러 중국의 불교를 받아들이는 일본의 유학승, 구법승들의 위법망구의 정진력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이들이 있어 오늘의 일본불교가 있었고, 이들이 있어 세계 최고수준의 불교학이 일본에서 꽃 필 수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저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전해준 나라라는 알량한 자부심으로 일본불교를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는 우리나라 불교계의 인식이 얼마나 경솔한 것인가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대승불교가 꽃을 피운 동아시아 불교에서 한중일 3국 불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절감한 것이 이번 순례의 성과가 아닐까 한다. 그동안 신속하게 연재를 마치지 못한 것에 대해 독자님들에게 송구함을 전한다. <끝>
협찬; 터널공사전문업체 표준E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