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동사를 빠져나오며, 저 옛날 도겐스님이 천동사를 떠나던 때 스승 천동여정과의 수채화 같은 일화가 머리에 떠오른다. 1125년 5월 1일, 방장실에서 여정과 도겐이 마주 앉았을 때의 장면이다. 이를테면 인가의 순간인데, 이 장면이 있기까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겠다.

후학을 가르칠 때에는 인정사정 보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한 천동여정은 그날도 선방을 순례하며 조는 수좌들을 깨우고 있었다.

“참선은 모름지기 신심탈락(身心脫落)이다. 오직 잠만 자서 뭐하겠느냐?”

말길을 알아듣지 못하면 주먹질도 가리지 않았던 그의 이름이 여정(如淨)이라니! 풋-, 하니 웃음이 났다. 이 순간 도겐은 찌릿, 신심탈락을 경험한다. 그리고는 박차고 일어나 방장실로 달려간다. 인사를 하는 도겐에게 기미가 있음을 알아챈 여정이 대뜸 물었다.

여정; “왜 왔느냐?”

도겐; “신심탈락해서 왔습니다.”

여정; “신심탈락, 탈락신심”

신심탈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탈락신심도 하라는 친절한 가르침이다. 줄탁동시의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한 눈에 제자의 경계를 간파하고 인가를 내린 천동여정은, 2년 후 일본으로 돌아가는 제자 도겐에게 각별한 당부를 아끼지 않는다. 아마도 이때 천동여정의 마음은 처음 아이를 혼자서 학교로 보내는 어미의 그것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당부에는 정이 넘쳐 흐른다.

“귀국하면 국왕대신을 가까이 하지 말라. 도시의 마을에 거주하지 말고, 반드시 심산유곡에 머물러라. 구름처럼 모여들 제자들을 원하지 말라. 허(虛)가 많은 것은 실(實)의 적음에 못 미친다. 진실한 도인을 택하여 벗으로 삼아라. 한 개 반 개라도 얻을 수 있다면, 불조의 혜명을 잇고, 옛 부처의 가풍을 일으키는 자가 되리라.”

천동산을 빠져 나오며, 그 옛날 도겐이 천동산을 떠나던 순간을 감히 떠올리는 것은 일종의 오만이겠지 싶다. 그러나 당시 인가를 받고 스승의 따뜻한 지침까지 받으며 떠나던 도겐 선사의 마음과 경계를 짐작치 못한 범부의 시샘쯤으로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를….

외국에서의 여행이란 늘 시행착오가 있기 마련이다. 영파의 천동사에서 발길을 재촉했지만 천태산 국청사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4시가 넘어버렸다. 오후 4시 이후에는 절의 출입이 금해지는 터라, 할 수 없이 국청사 순례는 다음날로 미루기로 하고, 순서를 바꿔 천태산 꼭대기 지자탑원(智者塔院)과 그 아래 계곡 가운데 위치한 고명사(高明寺)를 먼저 순례하기로 했다.

지자탑원은 천태지자의 육신이 모셔져 있는 곳이고, 천태산에서 설법하며 진리를 편 대사의 발길이 깃든 곳이니, 국청사만큼이나 의미가 깊은 곳이다. 더더구나 천태지자의 육신이 모셔진 탑은 ‘동토의 석가’로 불리는 지자대사를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곳이니 감동의 폭이 작지 않을 터이다.

천태산 꼭대기로 난 길은 그야말로 하늘 길이었다. 대형버스는 올라갈 수 없어 승합차로 갈아타고 산꼭대기로 달려 올라간다. 차창밖으로 펼쳐진 천태산의 모습이 장관이다. 소나무가 제법 많이 분포되어 있어 마치 한국의 산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지자탑원으로 향하면서, 저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스님이 지자탑원에서 세웠다는 발원문을 떠올린다.

일찍이 대사께서 오시팔교(五時八敎)로써 동쪽으로 흘러운 석존의 말씀을 판단, 해석하셨는데, 후세 학자들이 모두 이에 의지하였습니다. 저희 조사이신 화엄소주(=청량징관)께서도 ‘현수대사의 오교(五敎)는 천태대사의 교법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제관법사가 대사의 교관(敎觀)을 해외에 유통시켰으나 지금은 끊어졌습니다. 이제 제가 분발하여 도를 묻고 스승을 찾았는 바, 전당(錢塘)의 자변대사 강석에서 대사의 교관을 이어받고 대략을 알았습니다.

이제 제가 고국에 돌아가서 목숨바쳐 선양하여 대사께서 중생을 위해 가르침을 베푼 노고에 보답하고자 서원합니다. <이영자 교수 번역>

예서 오시팔교란, 천태지자대사가 세운 교판으로, 오시는 붓다의 교설을 시간적으로 배열하여, 화엄시, 아함시, 방등시, 반야시, 법화열반시로 나눈 것이며, 팔교는 설법의 형식적인 면에서 보아서 넷이 있다고 하는 화의사교(化儀四敎)와 설법내용의 면에서 보아서 화법사교(化法四敎)를 합한 것이다. 화의사교는 돈교, 점교, 비밀교, 부정교를 말하고, 화법사고는 장교, 통교, 별교, 원교 등이다.

오교는 중국 화엄종 제3조 현수법장이 세운 교판 중에 오교판을 말한다. 인천교, 대승시교, 대승종교, 돈교, 일승원교를 말한다.

천태산 정상에서 내려 산길로 접어들다가 왼편 길로 내려가면 천태대사가 수행하며 법을 폈던 옛 자리들이 하나 둘씩 시야에 들어온다. 왼쪽으로 대사가 머물며 공부했다는 절터에는 민가 같은 집이 몇 채 서 있고, 밋밋한 구릉너머 맞은 편 산마루 아래에는 대사가 앉아 수행하고 법화경을 설법했다는 바위가 보인다. 이 바위에서 대사가 법문을 하던 중에 법화경 한 장이 바람에 날려 떨어진 곳에 절을 지었는데, 그곳이 지금의 고명강사다. 다시 길을 내려가다가 오른편 오솔길로 접어들면 천태지자 대사의 뒤를 이어 이곳에서 정진한 담연대사 등의 비가 오랜 세월을 가득 머금은 채 서 있다. 그리고 나타나는 곳이 지자탑원. 천태지자대사의 전신사리가 모셔진 탑이 있는 곳이다. 중국 여느 절처럼 산 꼭대기에 있는 이곳에도 조벽이 서 있는데, 그곳에 새겨진 글이 걸작이다. ‘卽是靈山’ 이곳이 곳 영산회상이란 뜻인데, 영산회상이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신 곳을 말함이니, 이곳이 곧 부처님의 회상이란 뜻이겠다. 영산회상이 인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도 있다는 뜻이다. 중국인 특유의 ‘뻥’이라 느껴지기도 했지만, 천태지자대사라는 위대한 선지식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알게 하는 반증이기도 해 일면 부럽기도 하다.

지자탑원의 내부 천태지자대사 탑이 모셔진 전각 ‘智者肉身塔(지자육신탑)’으로 가려면 진각강사(眞覺講寺)라는 현액이 걸린 일종의 불이문을 거쳐야 한다. 진각강사란 참다운 깨달음을 가르치는 절이라는 뜻인데, 불립문자(不立文字) 대신에 지관겸수(止觀兼修)를 주창한 천태지자대사의 종지(宗旨)를 드러낸 것이다.

드디어 지자육신탑 앞에 섰다. 날이 저물어 벌써 산정엔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육신탑이 모셔진 지자육신탑 전각 안은 벌써 어둡다. 전각 안으로 들어서니 거대하고 화려한 조각으로 조성된 흰색의 3층6각탑이 그 웅자를 드러낸다. 이 석탑 아래에 지자대사의 육신이 모셔져 있다. 탑 옆에는 ‘東土迦文(동토가문)’ 즉 동쪽 나라의 석가모니라는 현액이 달려 있다. 천태지자대사는 동토의 석가모니라는 뜻이다.

천태지자대사는 도대체 어떤 분이길래 이렇게 석가모니 부처님과 동등한 존경을 받고 있을까. 그에 대해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천태지자의 본래 법명은 천태지의(天台智懿, 538∼597)다. 조실부모 후 18세에 출가하여 구족계(비구계)를 수지한 후 법화경과 무량수경을 독송하고, 대소산에서 혜사(慧思)선사에게 수업, 법화삼매를 증득한 후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와관사(瓦官寺)에서 ‘대지도론’, ‘차제선문’, ‘법화경현의’를 강의했고, 38세때 금릉을 뒤로 하고 천태산으로 은거, 11년간 수행했다. 화정봉(약 해발 800미터) 정상에서 두타행과 고행을 하면서 수선사를 창건했다. 훗날 수나라 양제에게 계를 주고서 ‘지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58세 무렵 다시 천태산으로 돌아와 법화경의 주석서인 ‘법화현의’, ‘법화문구’, ‘마하지관’의 3대부의 대표적인 저서를 남겼다. 그가 펼친 법은 교관겸수, 즉 이론(교리)학습과 실천(관행)을 함께 닦는 것이다. 그는 5시8교판에 의해서 불교를 모두 천태종 아래에 넣으면서 통일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의 불교는 종합불교적 성격이 강하다.

여기서 잠시 천태지자대사의 오도송(悟道頌)을 감상해보자.

통현봉 위에는

인간 세상 아니네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나니

눈에 가득 온통 푸른 산이네.

通玄峰頂 不是人間

心外無法 滿目靑山

통현봉은 천태산에 있는 봉우리 이름이다. 천태지관법이라는 선 수행법을 창출해 낸 천태지의 대사의 오도송이다. 마지막 구절 ‘만목청산’은 궁극의 문제를 해결, 적정해진 그의 경계를 잘 드러내 보여준다.

지자대사의 육신탑에 지극한 마음으로 삼배를 올리고, 반야심경을 독송한 후 탑 주변으로 둘러 걸어 놓은 천태종 조사들을 한 분 한 분 참배한다. 천태지자 이전의 용수, 혜문, 혜사에 이어 천태지자→장안관정→법화지위→천궁혜위→좌계현랑→형계담연→도수→나계의적→보운의통→사명지례로 이어지는 조사들의 모습이 그림과 함께 잘 보관되어 있다.

이중 천궁혜위의 문하에서는 좌계현랑과 함께 저 유명한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의 저자 영가현각이 배출됐다. 또 좌계현랑의 문하에는 신라의 법융(法融), 이응, 순영 등이 배출돼 한국불교와도 깊은 연관이 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천궁혜위의 제자 좌계현랑과 영가현각 두 스님의 이야기는 스님들의 입문필독서인 ‘치문’에도 나온다. 즉 좌계현랑이 영가현각에게 ‘산에서 살자’는 내용의 편지(山居書)를 보내자, 영가현각은 ‘산을 보기 전에 먼저 도를 봐야 한다’고 하는 답서를 보냈다는 내용이다.

또한 천태종의 중흥조라고 할 수 있는 담연은 20세에 좌계현랑에 문하에 입문 38세에 출가하여 천태지자대사의 법화삼대부에 주석을 남긴 뛰어난 조사다. 그는 세속의 명성에 초연하였고, 오직 천태교관의 홍포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모든 경전보다 법화경이 우위’라는 주창을 하였으며 ‘기신론’을 천태학에 수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천태종의 조사들 가운데 우리가 눈여겨 볼 또 하나의 인물은 보운의통대사다. 의통(義通)은 고려출신으로 947년 전후로 중국에 가 구족계 수계이후 나계의적 문하로 들어가 일심삼관(一心三觀)을 깨닫고 법을 펼쳐 천태종의 13조에 오른 인물이다. 천태산 운거사에서 법안종의 천태덕소에게 배웠고, 제자에 사명지례와 함께 자운준식을 배출했다. ‘보운진조집’, ‘석문정통’, ‘불조통기’에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고향(고려)가 그리워 귀국하려 했으나 군수 전유치(錢惟治)가 “중생을 이익케 하는 것이 어찌 고려에서만 가능하겠는가. 교화할 대중이 있다면 어찌 이곳과 고향사람이 다르겠는가‘라며 적극 만류해 그대로 중국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가 없었는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정토로써 고향을 삼는다. 모든 사람이 다 왕생할 것이므로, 다 나의 고향사람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한다.

보운 이외에도 오월왕 전홍숙이 960년에 천태교적(天台敎籍)을 구하기 위해 고려에 사신을 보냈을 때, 천태교적을 가지고 오월에 온 제관(諦觀)법사, 천태의 교관을 고려에 전하고자 활동했으며 영명연수와 선문답을 했던 지종(智宗) 스님 등 천태산을 중심으로 항주에서 활동했던 고려의 스님들이 있었다.

어둠이 빠르게 청산을 검게 물들인다. 걸음을 재촉해 버스를 타고 고명강사로 향한다. 고명강사는 천태산 마루 바위에서 천태지자대사가 법문을 하던 중 법화경 한 장이 바람에 날려 떨어진 곳에 지은 절이다.

계곡에 지은 절이라, 아늑한 분위기가 일품이다. 정법이 오래 세상에 머물기를 바란다(정법구주 正法久住)는 조벽을 글씨를 감상하며, 고명강사로 들어선다. 절입구에 ‘高明講寺’라고 쓴 남해 강유위(南海 康有爲)의 독특한 서체가 눈길을 붙잡는다. 밝을 명자의 날일자를 눈목자로 대체해 쓴 기지가 역시 강유위답다.

이곳엔 불사가 한창이다. 거대한 종각을 짓는데, 바깥에서 보면 목탑으로 보이는 종루다. 종도 크고 종루도 거대하지만, 역시 종의 비례나 아름다움은 우리 종에 미치지 못한다. 크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닐진대, 왜 이들은 이리 크게만 짓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둑해진 날씨로 더 이상의 순례는 어렵다. 이제 국청사 입구에 지은 호텔로 들어갈 시간이다. 굽이굽이 휘어진 길을 승합차는 잘도 달린다. 코너링은 신기에 가깝다. 뭐든 이렇게 오래하면 잘하게 마련인데, 불교기자 생활 23년에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문득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두렵게 다가온다. 습기 가득찬 35도를 웃도는 아열대 날씨인데도, 으스스 오한을 경험한다. 오늘밤은 아무래도 푹 쉬어야할 것 같다. 내일 새벽부터 국청사를 샅샅히 살펴보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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