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리아(Sigiriya), 이름하여 하늘에 있는 요새 왕궁(The palace and fortress in the sky)이다. 요새 입구의 웅장한 사자 발톱 조각으로 인해 ‘사자바위성(Lion rock fortress)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은 초록의 정글이 바다처럼 펼쳐진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시기리아는 스리랑카에서는 가장 로맨틱하고 흥미로운 유적이다. 어떤 말로도 이 바위 왕궁을 온전하게 묘사할 수 없다. 이곳은 산으로 불리기에는 너무 작은 규모이고, 언덕이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가파르고 험하다. 또한 바위나 돌덩어리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거대하다. 하나의 거대한 장식된 바위산이라는 표현이 이따금씩 등장하지만,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지나치게 인공(人工)이 가해진 거대한 돌이란 의미에 가깝게 다가온다. 그러나 시기리아의 구조는 대부분으로 자연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 조각이나 그림, 그리고 약간의 건축구조물은 시기리아를 꾸민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숙소로 삼은 담불라와는 채 1시간도 되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고 스리랑카 전체적으로 볼 때는 스리랑카의 3대 유적지로 일컬어지는 아누라다푸라와 폴론나루와, 캔디가 이루고 있는 3각지대의 가운데 부분에 위치해 있다. 스리랑카의 문화와 역사를 대표하는 3곳의 유적지는 아누라다푸라와 폴론나루와, 그리고 캔디다. 물방울 모양의 섬나라 스리랑카의 중앙부에 삼각형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는 이 세 도시는 ‘문화 삼각지(Culture Triangle)’로 일컬어지는데 시기리야는 이 문화 삼각지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시기리아는 스리랑카가 자랑하는 최고의 관광단지 중 하나다. 스리랑카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시기리아는 반드시 들르지 않으면 안 되는 관광코스로 되어 있다. 시기리아는 사자라는 의미의 Sinha(lion)와 목소리를 뜻하는 Giriya(throat)의 합성어다. 번역한다면 ‘사자의 포효’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시기리아는 또 세계 8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고 일컬어진다. 요새왕궁이 세워지기 전 시기리아는 본래 스님들의 수행 장소였다.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카샤파 왕이 7년 동안 건설한 후 이동했다. 그로부터 11년 후 동생으로부터 침공을 받아 전장에 나섰다가 늪지에 빠져 자살을 한 약사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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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서둘러 시기리아에 도착했다. 비 그친 후의 스리랑카 자연이 뿜어내는 푸름은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숲 가운데로 난 길을 달려가다 보면 양편으로 가게와 민가가 늘어서 있다. 어떤 집에는 한 중년의 여인이 미싱을 마당에다 꺼내 놓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다. 보통 미싱 작업은 방에서 하는데 마당에 꺼내놓고 바느질을 하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 집에는 미싱도 있다’고 자랑하고 싶어서일 것이리라.
드디어 시기리아에 도착했다. 거대한 바위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기대했던 대로 범상치 않은 자태를 드러낸다. 노약자는 오르지 않는 것이 좋다는 설명은 오르는 길이 만만치 않음을 알려준다. 또한 벌과 같은 독충도 조심해야 한다고 은근히 겁을 준다. 하긴 2년 전 베삭데이(부처님오신날) 경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벌에 쏘이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사람들이 벌집을 건드려 여러 사람이 크게 다치거나 죽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한 동안 시기리아는 출입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이유는 ‘아직 벌들의 화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단다. 스리랑카 관광수입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시기리아를 벌의 화가 풀릴 때까지 출입을 막는다는 것이 우리네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그만큼 모든 생명을 가능한 평등하게 존중하는 것이 이 나라 사람들의 푸근한 성정이다.
글쎄 만일 우리나라 같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대규모 소방대원을 투입해서 살충제로 벌을 소탕하는 대대적인 작전을 펼치지는 않았을까. 달러가 눈에 보이는데 그깟 벌떼들 죽이는 것이야 예사가 아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드디어 시기리아에 도착했다. 웅장한 바위가 달려들듯 시야를 가로막는다. 저 깎아지른 바위 꼭대기에 성을 만들었다니!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시기리아 성으로 다가가려면 성 앞 평지에 조성된 연지, 연못 가든을 지나야 한다. 아름다운 연못 가든은 지하의 분수시스템으로 인해 불이 솟아오르는 복잡한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다. 이 못에서 왕의 목욕물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고, 많은 작은 해자와 분수들이 설치되어 있다. 이중 몇 개의 분수들은 장마철에는 아직도 작동할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이 가든의 아름다운 정경은 바위 왕궁의 중간부분에서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연못 가든을 지나 석굴사원을 지나면 가파른 계단길이 나온다. 이윽고 바위 왕궁 아래 접근하면 가파른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순례객들은 이 계단 타고 오르게 된다. 계단이 없었다면 감히 오를 엄두도 내지 못할 철옹성이다. 한참을 오르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현기증이 일어난다.
오르다보면 문득 스리랑카가 자랑하는 미녀도가 나타나고, 그 3미터 아래로 거울 회랑(Mirror wall)이 그 신이한 자태를 드러내며 둘러쳐져 있다. 미녀도는 본래 500명의 미녀도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로는 22개의 미녀도만이 눈으로 확인 가능하다.
시기리아, 즉 바위 왕궁을 유명하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 유적이 궁전 입구의 벽에 그려져 있는 프레스코 벽화다. 프레스코란 갓바른 회벽 위에 수채화 화법으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 거친 바위 면에 정성스럽게 점토와 석회, 꿀을 발라 매끄럽게 만들고 그린 이 프레스코화는 1500여 년 전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화려한 색상을 보여주고 있다.
옛 스리랑카 인들은 이 회벽의 그림을 오랜 기간 동안 보존시키기 위해 나름의 과학적 방법을 고안해냈다. 바위에 왕겨와 카보나이트를 혼합한 타마이튼흙을 발라 굳힌 후, 석회와 모래를 혼합하여 칠한 다음, 꿀과 석회를 혼합하여 매끄럽게 그린다. 이처럼 정성을 드린 화판에 그려진 아름다운 여인들이 그 자태를 오래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바위궁전 서쪽 면에 그려진 프레스코 갤러리의 ‘시기리야 처녀들(The Sigiriya Damsels)’은 천녀(天女) 또는 그를 시중드는 왕의 시녀들로 추정된다. 스리랑카 출신의 영국의 고고학자 벨은 카샤파 왕의 부인, 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카샤파 왕이 죽은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림속의 여인들은 당초 500여 명에 달했지만, 이곳이 스님들의 수행처로 다시 사용되면서 농염한 여인들의 모습이 수행에 방해를 줄 것을 우려해 일부를 지워버렸고, 1967년 반달인의 공격을 받았을 때 다시 상당수의 미녀그림들이 파괴됐다고 전한다. 온갖 보석 장신구로 치장하고 터질듯 부풀어 오른 가슴을 드러낸 채 고혹적인 자세로 꽃을 들고 미소 짓는 시기리야 여인들은 마치 살아서 손짓을 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시기리아 프레스코 갤러리에 그려진 천녀들은 인도의 아잔타 석굴에 그려진 여인들과 양식면에서 매우 비슷하다. 이중 일부 그림은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500명의 여인이 그려졌다는 것에 일치를 보일 뿐 기록들은 대부분 조금씩 차이가 난다. 18명의 천녀만이 보존되어 있다는 기록, 19명, 또는 22명이 각각 혼재한다. 이 글에서는 시기리아 현지 안내 현판에 기록돼 있는 22명으로 한다. 그런데 22명은 알아볼 수 있는(Visible) 그림이란 의미로, 보는 이에 주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18, 19명이 반드시 틀린 숫자라고 볼 수는 없다. 시기리아 여인들의 그림은 크게 두 장면으로 구분되는데 한 면에는 5명의 여인이, 다른 한 면에는 17명의 여인이 그려져 있다.
어찌되었든 시기리아의 그림들은 인류가 보전해야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플래시를 이용하는 사진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등 당국의 보존 노력이 점차 강화되고 있다.
높이 195미터의 거대한 바위산 정상에 펼쳐져 있는 바위궁전(Rock Palace).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솟아있는 붉은 바위산을 오르는 길은 예사롭지 않다. 온 몸에서 땀이 흐르고, 그 땀을 스쳐 지나는 바람결에 느껴지는 청량함이 제법 즐겁다. 이제부터는 프레스코 아래 휘둘러 만들어진 3미터 높이의 거울 회랑을 감상할 차례다. 깎아지른 듯한 암벽에 설치된 거울벽은 벽돌에 칠을 하고 다시 계란흰자와 꿀, 석회를 혼합하여 칠한 다음 표면을 잘 문질러 만들었다. 여기에는 1000년 전 이곳을 방문했던 이들이 쓴 스리랑카 고대의 글자들이 낙서처럼 남아 있는데, 아무렇게나 썼을 그 낙서가 훗날 고대 싱할라 언어와 문자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또한 그 내용 또한 자료적 가치가 높아 ‘낙서의 가치’를 한층 높여준다. 이곳의 낙서들은 주로 7∼11세기 경의 싱할라어 글자들이다. 이중 판독이 가능한 685편에 이르는 시(詩)는, 주로 왕과 왕자들의 흥망에 얽힌 이야기, 프레스코에 그려진 미녀도에 관한 이야기, 시기리아의 거대한 바위산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그 내용을 주를 이루고 있다. 거울 회랑에는 한 중년의 안내자가 상주하고 있는데, 고대 싱할라어 뚜렷하게 적힌 위치를 알려주면서 연신 엄지손가락을 펴 보인다. 그의 표정에는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한껏 깃들어 있다.
거울 회랑을 지나 계단을 몇 백 개 더 오르면 라이언 테라스(Lion Terrace)에 이른다. 라이언 테라스, 즉 시기리아를 의미하는 이곳은 좁은 계단 길의 끝부분으로 바위의 북쪽 끝부분에 해당된다. 플랫 홈처럼 편편한 마당이 나타나고, 그 정면으로 거대한 사자의 발톱이 시선을 붙잡는다. 발톱 사이로 난 입구는 당당하기가 짝이 없을 정도다. 그 위용이 대단해 누구든 사자의 입이었을 저 입구로 들어가면 다시는 살아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마저 선뜻 밀려온다. 이곳은 시기리아 성의 정상으로 오르는 입구다. 두 발톱 사이로 난 좁은 계단, 그러니까 거대한 사자의 입을 통해 오르면 곧바로 낭떠러지 같은 바위를 타고 오르는 철계단이 나타난다.
이곳 플랫 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정말로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행에 나서기 전에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터라, 순례객들 대다수가 사자 발톱 앞 공터 곳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잠시 심신의 긴장을 놓고 있노라니, 이 무모한 왕궁을 건설한 고독한 왕 카샤파의 이야기가 환영처럼 뇌리에 떠오른다.
카샤파는 아누라다푸라에 거대한 저수지를 건립한 다투세나(Dhatusena. 455~473)왕의 장남이었지만, 후궁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태생적 부담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늘 배다른 동생 모갈라나(Mogallana)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평민 출신인데 비해 모갈라나의 어머니는 왕족이었기 때문이다. 카샤파는 차기 왕위를 동생에게 빼앗길까봐 늘 불안했다. 결국 카샤파는 일부 그를 추종하는 부하들과 모의해 아버지를 감금하고 왕위를 찬탈했다. 카샤파가 왕위를 찬탈하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모갈라나는 복수를 다짐하며 인도로 도망갔다.
불안과 공포로 포악해진 카샤파는 왕위를 차지한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감금해놓은 아버지 다투세나에게 숨겨 놓은 보물을 내놓으라며 윽박지르기 일쑤였다. 다투세나는 ‘평생 조성한 아누라다푸라의 칼라웨와 저수지가 내 재산의 전부’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거짓말을 한다고 믿은 카샤파는 화를 참지 못하고 아버지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다.
그러나 카샤파의 불안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망명한 동생이 복수를 위해 쳐들어올 것이라는 불안이 엄습해온 것이다. 백성들조차 패륜을 저지를 자신을 경멸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급기야 그는 어떤 군대라도 정복할 수 없는 성을 시기리아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7년여의 난공사 끝에 궁전이 완성되자 왕은 총애하던 무희를 데리고 아무도 접근할 수 없어 보이는 그 높은 바위산 꼭대기의 화려한 궁전 속에 스스로를 가뒀다.
그로부터 11년 후인 491년, 카샤파의 불안은 현실로 나타났다. 동생 모갈라나가 아버지의 복수를 외치며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온 것이다. 카샤파는 동생과의 전쟁을 위해 코끼리에 올라타고 전장으로 나갔다. 전쟁이 한참 진행되던 중 카샤파는 그만 동생의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다. 당황한 그는 그만 방향을 잘못 잡고 말았다. 그를 태운 코끼리가 진흙 구덩이에 빠진 것이다. 카샤파의 군대는 왕이 보이지 않자,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을 친 것으로 생각하고 모두 자결을 했다. 진흙 구덩이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한 채 혼자 남겨진 카샤파 역시 동생의 군대가 포위망을 좁혀오자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왕위에 오른 모갈라나는 카샤파의 무모한 욕망이 빚어낸 시기리야의 바위궁전을 승단에 기증하고 수도를 다시 아누라다푸라로 옮겼다. 시기리야의 바위 궁전은 이후 상당기간 스님들의 수행처로 사용되다가, 차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사자발톱 사이로 난 입구를 통해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수직 절벽이다. 계단이 설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네 발로 기어서 올라야 한다. 오르다가 잠시 아랫방향을 내려다보면 어찔어찔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다. 흐르는 땀은 강하게 부르는 바람에 자취를 감춘다. 이렇게 20여분을 올라야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문득 깎아지른 내금강의 절벽에 지은 보덕굴 생각이 떠오른다. 춘원은 이 보덕굴에 오르면서 “어떤 일 좋아하는 이가 이런 곳에 집을 지었나”라고 시작되는 시를 탄생시켰다. 오줌을 저리게 하는 아찔함을 경험하지 않은 이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절창이다.
이 깎아지른 듯이 솟아오른 바위산 정상에 궁전을 세울 생각을 냈다니! 그 패륜과 욕망을 비난하기에 앞서 연민이 솟는다. 왕위가 무엇이기에, 권력이 무엇이기에,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서 아버지를 죽이고, 동생의 두려워 이 험한 곳에다가 왕궁을 세웠단 말인가.
시기리아 바위산의 정상은 약 1.6헥트아르의 면적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는 풀장과 궁전, 주거지, 무도장 등이 있었던 터가 남아 있다. 아마도 이곳 정상 거의 대부분이 갖가지 건축구조물로 채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 설치된 시설들은 주로 즐기기 위한 시설들이 많아 수성을 위한 시설이라기보다는 쾌락을 즐기기 위한 왕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딱딱한 바위를 파내어 만든 27미터×21미터 크기의 못은 오늘날의 지붕을 설치한 풀장으로 보인다. 해가 뜨는 동쪽 방향에 설치된 돌로 만들어진 왕좌는 바위 궁전에 갇힌 고독한 왕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회한의 장소였을 것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전망이 광활하여 막힘이 없고 맑은 날에는 아누다라푸라의 대탑과 담불라가 보인다.
웅장하고 화려했던 바위산 꼭대기의 궁전과 물을 끌어 올려 사용했다는 거대한 수영장도, 그리고 카샤파 왕이 그토록 염원했던 돌로 만든 왕좌도 카샤파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단단한 바위를 깨어내며 민초들의 피눈물로 만들어진 수영장을 만들어진 수영장에서 헤엄치는 왕에게 평화와 안온이 함께 했을리 만무하다.
보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지는 바위를 파내 만든 야외 수영장을 자세히 보기위해 분주하게 바위산 정상을 오간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그 땀이 눈으로 돌아가 눈물마저 쏟게 한다. 뜨거운 눈물과 땀이 범벅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다. 욕망에, 욕심에 휘둘려 처참한 최후를 맞은 어리석은 왕에 대한 연민의 눈물, 그 왕의 폭정에 동원되어 피눈물을 흘렸을 당시의 민초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진다. 그러나 그보다 나를 더 슬프게 하는 것은 그런 폭군과 그로인해 죽어간 민초들의 피눈물로 세원진 시기리아 요새궁 덕분에 오늘날에는 그들의 후손들이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이며 먹고 살아가고 있는 아이러니한 광경이다.
시기리아 성. 이제 과거의 영화는 가고 바위산 꼭대기에 황량한 사람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광활한 정글을 헤치고 달려왔을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귓전을 스치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