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알다시피 스리랑카는 주지삼보로서의 법보, 즉 경전을 탄생시킨 나라다. 이에 대한 스리랑카 불자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오늘은 스리랑카에서 최초로 경전을 만든 성소, 알루비하라를 방문하는 날이다.
마침 알루비하라는 짐을 풀고 숙소로 삼은 담불라 사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마음은 가볍다. 마침 또 오늘이 알루비하라 뒷산 꼭대기에 이 절의 주지격인 난다 스님이 대작불사를 시작하는(입제) 날이어서 불사에도 함께 동참할 요량이다. 난다 스님은 한국에서 공부를 했고 활동도 활발하게 펼치는 분이라 한국말이 수준급이다. 어쨌든 스리랑카 사원의 불사현장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니 일거양득이다.
아침부터 장대비가 내린다. 도무지 그칠 것 같지가 않다. 이런 날씨에 과연 행사를 할 수 있을까, 걱정스럽다. 사원 경내도 아닌 두어 시간은 가야 할 산마루 기공식 장소까지 걸어 올라갈 불자들이 얼마나 될까. 폭우 속에서 알루비하라 사원을 들러 조실격의 노스님에게 인사를 드리고는 곧바로 대기해놓은 오토릭샤를 타고 산으로 오른다. 낡은 오토바이가 끄는 릭샤는 밤부터 내리는 비로 진창이 된 산길을 용케도 오른다. 비틀비틀 산길을 오르는 기분이 묘하다. 재미로 치면 놀이동산의 놀이기구를 타는 스릴감을 들 수 있겠고, 이곳에서는 택시에 해당할 낡은 오토릭샤가 이곳 사람들의 가난함을 대변하는 것 같아 일면 가슴이 짠하다.
그러나 이런 마음조차도 교만한 것이었음을 그네들의 표정과 눈동자를 보면서 깨닫는다. 밝고 미소를 잃지 않는 환한 얼굴, 선하디 선한 순박한 눈동자, 그들을 보고있노라니 나의 육근(六根)이 청정해짐을 느낀다. 사람을 청정하게 하는 대상이 꼭 물좋고 산좋은 산천만은 아님을 이 순간 문득 깨닫는다.
오를 수 있는 곳까지 릭샤로 오른 후 나머지는 등산길이다. 비에 푹 젖은 산길이기에 미끄럽고, 쏟아지는 빗줄기에 시야도 좋지 않다. 그래도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내딛는다. 한참을 오르자 산정 바로 아래에 거대한 바위가 나타난다. 바위 전면 아랫부분이 패여있어 자연스럽게 처마 역할을 한다. 그곳 근처에 대불을 모시는 불사가 진행될 예정이란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것은 그 큰 바위덩어리가 아니다. 빗줄기 속에도 불구하고 산꼭대기까지 찾아온 인파들이다. 갓난아이부터 소년소녀, 청장년, 할머니,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수백 명이 넘는 인파가 바위주변을 뒤덮었다. 군데군데 깃발을 들고 있어 마치 오늘날 서울도심에서 벌어지고 있는 촛불시위 현장을 방불케 한다. 장대비를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의 신심이 놀라울 뿐이다.
싱할라 왕조의 첫 수도 아누라다푸라는 남인도 타밀족의 거듭되는 침략으로 수난을 겪었다. BC. 103년 왕위에 오른 왓타가마니 아브하야(Vattagamani Abhaya)는 타밀의 침략을 받아 아누라다푸라를 내주고 남쪽으로 밀려났다. 그는 앞서 기술한대로 담불라에 은닉하면서 탈환을 준비했고 14년 만에 아누라다푸라를 되찾았다. 그러는 통에 나라의 살림은 거덜이 나 있었다.
전쟁과 이민족의 끔찍한 핍박과 지배로 고단한 삶을 살던 이들에게 설상가상 가뭄까지 들이닥쳤다. 백성은 굶주렸고, 나라의 살림은 최악의 상황으로 어려워졌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생겼다. 심지어는 그토록 존경하던 비구의 육체를 먹는 일까지 벌어졌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갔고 사찰들은 버려졌다. 아누라다푸라를 빛나게 하던 사원들은 돌보는 이 없어 이내 잡초로 뒤덮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불법(佛法)이 없어지겠다. 언제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외워서 전할 수(口傳)는 없다. 비구가 다 죽는 일이 벌어지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끊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문자로 기록해야겠다.’
부파의 발생과 함께 전쟁과 가뭄으로 인한 대기근사태는 이처럼 붓다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기는 승가의 결단을 촉발시킨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경을 팔리어 문자로 옮기는 장소로는 아누라다푸라에서 남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마탈레(Matale) 지역의 석굴사원 알루비하라(Aluvihara)로 정해졌다. 이 결정 이후 알루비하라에는 500명의 비구가 모여, 7년 동안 네 차례의 결집을 통해 경·율·론의 삼장(Tripitaka)을 완성했다. 스리랑카 불교의 상징이자 자랑인 패엽경은 이런 인연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까지 전승되어온 모든 가르침을 망라한 대경전이 탄생했다. 알루비하라에는 패엽경 제작을 위해 조성된 동굴이 14곳 중 현재는 2개소만이 보전돼 있다.
여기서 아비야기리 다가바(대승불교탑) 이야기를 잠시 언급해야 할 것 같다. 패엽경 연원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아비야기리 다고바는 BC 1세기에 탄생해 대승의 교리까지 수용하며 번성했던 아비야기리 비하라 승단(무외산사파)의 중심지였다. 아비야기리비하라 승단은 상좌부 전통의 고수를 주장했던 마하비하라 승단(대사파)과 대립과 경쟁 관계를 형성했다. 스리랑카에서의 부파의 발생과 갈등은 자연스럽게 상좌부계를 결속시켰다. 상좌부계는 인도로부터 전래된 상좌부의 정법이 왜곡되는 것을 우려해 암송에만 의존하던 불법의 전승을 문자로 남기기로 결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승단의 갈등은 불교의 기록화, 즉 ‘패엽경’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잉태시켰던 것이다.
불사현장을 지켜보고 다시 알루비하라로 돌아와 사찰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이곳이 우리가 오늘날 보고 읽고 공부하는 경전이 시작된 곳이라니! 그 감동은 한국의 불자들이 해인사 장격각을 돌아볼 때의 그것과 견줄 수 있으리라.
사찰은 불교사의 중요한 현장답게 제법 큰 사찰이다. 사찰의 중심부에 자리한 한 낡은 건물에 들어서니, 여기저기에 패엽경이 진열돼 있고, 패엽경의 재료들과 제작 과정도 전시돼 있다. 그러나 불교사의 큰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는 어울리지 않게 모든 것이 허술하다.
한쪽 구석에 패엽경이 놓여 있는데 모두 근세에 만들어진 것이다. 2000년 전에 제작된 최초의 패엽경과 5세기 이곳에 머물며 주석서를 집필한 붓다고사(Buddhagosa) 스님의 저술 등은 1848년 영국과의 전투 도중 영국군들이 절을 파괴하면서 소실됐다. 현재 남아 있는 패엽경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800년 전에 제작된 것인데,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어 볼 수가 없다.
알루비하라 사원에는 두 개의 석굴이 남아 있는데, 하나는 패엽경을 제작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석굴이다. 10여 명이 들어갈 만한 석굴 안에 흙으로 빚은 인형을 이용해 2000여 년 전 패엽경을 만들던 모습을 연출해 놓았다. 다른 하나의 석굴에는 와불이 모셔져 있다. 석굴 내부는 여느 사원처럼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경전을 처음 만든 역사적 가치에 비해 절의 규모는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어쩌면 스리랑카 불교로서는 가장 크게 기념해야 할 성지 중의 성지일 터인데 그렇지가 못하다. 관광객이 몰려올 만큼 아름다운 경관도 아니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도 않아서 그런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치지도 않고 내리는 빗줄기 탓이기도 하지만 패엽경이 만들어진 법보종찰 알루비하라의 오후는 서글프게 다가온다. 그러나 언젠가 스리랑카가 부유한 나라가 되고 국민들의 문화의식이 고양되면 아마도 이 사원은 지금의 모습에서 더욱 더 발전할 것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