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1일 아침. 스리랑카行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향한다. 밤새 눈이 펑펑 내려 공항으로 가는 길과 도로변, 그 바깥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모두 순백의 세상이다. 스리랑카 순례를 다녀와 나의 복잡한 마음도 저 하얀 천지처럼 밝고 맑아졌으면 좋으련만!
새해를 밝히는 서설이라고 라디오 진행자들은 연신 호들갑이지만, 눈길바닥에 뒤엉킨 차량들에겐 지옥이 따로 없다. 한쪽에선 하얀 눈에 취해 목청까지 설레고, 다른 한쪽에선 접촉사고의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하느라 고함과 삿대질이 오가고…. 그래, 뭇 중생이 이리저리 얽혀 사는 사바세계란 본디 그런 곳이 아니겠는가.
눈이 땅길 뿐만 아니라 하늘 길까지 막아 비행기들의 연착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12시 55분발 비행기가 3시가 다 되어서야 출발을 했으니 무려 2시간을 넘게 공항에서 시간을 보낸 셈이다.
타이항공 TG 639편. 우리 일행을 실은 비행기가 눈발을 뚫고 하늘로 치솟는다. 어디가 땅인지, 어디가 하늘인지, 어디가 바다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하늘과 바다와 땅의 경계가 가물가물하여 그것이 그것 같은, 천지해현동(天地海玄同)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아주 오래 전에는 인도와 스리랑카가 하나의 땅이었다고 한다. 하나였던 땅이 지각변동에 의해 조금씩 떨어져나가 지금은 대륙과 섬으로 나뉘어졌지만, 그래도 두 땅 사이의 바다는 물만 조금 덮였을 뿐 끈끈하게 이어져 사람들로 하여금 연륙교를 놓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 이 연륙교는 150만 년 전에 세워졌는데 그 이름은 ‘아담스브릿지’라고도 한다.
스리랑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 최대세력인 싱할라족과 반정부의 핵심인 타밀족간의 2천년이 넘는 갈등의 역사에 대해 약간의 사전지식을 갖는 게 좋다. 두 족속간의 뿌리 깊은 갈등과 투쟁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그 장구한 원한을 쉬이 풀어낼 해원의 길은 없어 보인다.
싱할라족은 기원전 6세기 인도로부터 건너와 스리랑카 부족의 시조가 되었다. 싱할라족은 불교를, 그보다 후에 스리랑카로 건너온 타밀족들은 힌두와 회교, 기독교 등을 신앙한다. 타밀족은 인도남부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유지해왔고, 최근에는 미국 및 한국 기독교 등의 전략적 지원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영국이 스리랑카를 식민지로 지배하던 시대에는 소수민족 우대정책의 영향으로 싱할라족은 수백 년을 핍박 속에서 살아야 했다. 타밀족과 기독교로 개종한 싱할라족은 식민통치를 담당했던 영국총독부로부터 우대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타밀족과 기독교 개종자들, 무슬림 등이 나라의 권력과 돈을 대부분 장악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부족의 머릿수였을 뿐, 거의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세월이 꽤 오랫동안 흐르고, 차츰 싱할라족 사이에서 자각과 자성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스리랑카의 시조이자 최대민족으로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현실을 어떻게든 마무리해야 한다는 싱할라족의 선각자들이 등장했고 이들은 차츰 그 세력을 키워나갔다.
꽤 힘이 붙었을 때, 싱할라족에게는 두 가지의 길이 놓여있었다. 하나는 유혈혁명으로써 정권을 장악하여 싱할라족의 나라를 세울 것인가, 아니면 사회주의를 도입하여 점진적으로 나라를 인수하는 길을 택할 것인지의 기로였다. 평화를 사랑했고, 늘 부처님에 대한 한없는 귀의와 예경이 삶의 일부였던 이들이 선택한 것은 예상대로 후자였다. 희생을 줄이고, 조금씩 평화롭게 싱할라족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선택의 배경에는 불교, 즉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스리랑카이기에 좀처럼 보기 드문 현상이 오늘날에도 실재하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무자비한 종교전쟁을 벌이고 있는 기독교와 무슬림, 힌두를 믿는 소수 족들이 이곳에서만큼은 탄탄한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피의 전쟁을 불사하는 이들 종교들이 불교라고 하는 더 큰 ‘적’을 앞에 두고서 혈맹을 맺은 것이니, 해괴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인도정부가 타밀반군을 지원하는데 예기치 않았던 변수가 생겼다. 인도정부에서 평화유지군이라는 명분으로 스리랑카에 군대를 파견, 평화유지에 나섰는데, 그들이 타밀을 일방적으로 지원하지 않는다는데 불만을 품은 타밀족 테러리스트가 그만 평화유지군 사령관을 암살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도정부의 타밀에 대한 호의가 예전 같지 않아졌고, 또한 평화협정(휴전협정) 기간도 만료되면서 다시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시점이다. 게다가 타밀족은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쓰나미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실정에 있다는 것. 이를 기회로 싱할라족이 주도하는 스리랑카 정부는 2000만의 민족통일국가 수립의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는 판단아래 대대적인 반군 소탕에 나서고 있고, 이에 대응해 타밀 반군측 역시 수도 콤롬보 등에서 스리랑카 정부의 장관이 포함된 많은 시민을 희생시키는 유혈테러를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인천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다섯 시간 반을 날라서 중간 기착지인 방콕 공항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을 의식해 만들었다는 방콕 신공항은 공항내 매점들의 천국이다. 상대적으로 환승이나 탑승을 위한 기능은 훨씬 뒤떨어지는 편이다. 다섯 시간 후에나 콜롬보 행 비행기를 탈 수 있으니 공항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순례든 여행이든 집 떠나면 고생이다.
새벽 4시가 다 돼서야 콜롬보에 도착했다. 예정대로라면 몇 시간 전에 도착해 이곳의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시간이지만 비행기의 릴레이 연착으로 그만 담불라로 향하게 되었다. 담불라까지는 콜롬보에서 약 3시간 거리. 그러나 뜻하지 않게 도중에 우리 일행을 실은 25인승 버스가 고장이 났다. 오일이 새고 있단다. 이리저리 차량을 고치느라 또 두어 시간을 보냈다. 호된 스리랑카 입국 신고식이다.
어느덧 먼동이 밝아온다. 여명 사이로 줄지어 선 야자나무의 검은 실루엣이 장관이다. 스리랑카에서 맞이하는 첫 새벽은 이렇게 떠올랐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