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뢰박물관과 정보센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캄보디아는 유혈사태, 테러, 전쟁이 많았고 특히 폴폿 시절에 그랬습니다. 내 이름은 <아키라>이고 이 박물관의 관장입니다. 이곳은 ‘앙코르 왓’ 로드에 있는 어린이 병원을 지나서 왓 트에이 파고다 건너편에 있습니다. 제가 다섯 살 때, 부모님은 크메르루즈군에 의해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강제로 마을을 떠났고, 들판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 후 나는 징집병이 되어 베트남 군대와 함께 여러 장소에 지뢰를 설치했습니다.
청소년 시절, 나는 정부를 위해 지뢰를 제거했고, 지금은 이 나라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나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약간의 기부금을 주십시오.
우리 박물관에는 정부 기금 지원이 없기 때문에 당신의 작은 기부가 진저리나는 전쟁 무기에서 우리나라를 해방시키려는 나의 임무를 도와줄 것입니다.
영문으로 ‘지뢰박물관’이라고 쓰인 나무판자가 허름한 농가의 입구에 붙어 있다. 입구에 출입을 통제하는 가로막대가 걸려있다. 그 곁에 크메르 루즈 병사가 보초를 서고 있다. 이게 무엇인가? 크메르 루즈 잔당은 모두 투항하거나 괴멸되었는데 검은 모자, 검은 군복, 탄띠를 찬 병사가 매서운 눈으로 노려본다. 영화 ‘킬링필드’ 본 바로 그 병사의 모습이다. 지뢰박물관이 아니라 크메르 루즈 최후의 해방구인가?
그러나 놀랄 것은 없다. 참혹의 기억을 환기하려고 박물관장 아키라 씨가 열 살배기 딸에게 크메르 루즈군 군복을 만들어 입혔다. 섬뜩한 기억 대신 그 앙증맞음에 웃음이 나온다. 운전기사 녀석은 참혹의 추억이 상기되는지 입을 실룩거리며 아이가 입은 군복을 여기저기 뒤적인다. 검은 샌들까지 영락없는 크메르 루즈군의 복장이라고 확인해준다. 그의 보충 설명이 가관이다. 크메르 루즈가 패배한 것은 검은 군복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호색이 아니어서 정글에서 쉽게 발견된다는 것이다. 반면 자기들 정부군은 흔히 말하는 국방색 군복이어서 밀림에서 은폐가 용이했다는 것이다.
낡은 탁자에 서툰 한글로 쓰여진 호소문이 그곳에 놓여 있다. 영문과 일어에 비해 허술한 종이쪽지에 쓰여진 것은 이제 막 한국인들이 이곳을 찾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도 바야흐로 시민운동 혹은 NGO가 태동하고 있는가보다.
허름한 창고건물이 박물관이다. 상당량의 지뢰를 수거해 전시하고 있다.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현장의 모형이 마당 한쪽에 설치되어 있다. 앙코르를 이해하는 것 못지않게 내전과 지뢰를 이해하는 것이 이 나라와 이 나라 사람들을 이해하는 길이다. 앙코르가 과거와 영화를 이해하는 대상이라면 내전과 지뢰는 이 나라의 현재와 가난을 이해하는 징표다. 그것은 곧 왕조의 역사와 식민지, 6․25의 체험을 지니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는 계기가 된다. 더불어 황색인의 영광과 아픔을 공유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모색하는 길이기도 하다.
1997년 노벨평화상은 지뢰제거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게 수여되었다. 파파라치들의 혹독한 추적을 따돌리려다가 불꽃처럼 산화한 영국의 다이애나 황태자비도 지뢰제거와 그 피해자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벌였었다. 땅 속에는 보석이나 묻어둘 일이다. 뙤약볕 아래서 밭을 일구는 근면한 후손이 그것을 캐내어 풍요롭게 살아가는 밑천이 되게 할 일이다. 팔, 다리, 머리통, 심장까지 한순간에 날려버리는 지뢰가 아직 이 나라 밀림의 곳곳에 묻혀 있다. 길이 없는 시골 숲 속을 호젓하게 걸을 수 없다. 한반도의 비무장지대에도 엄청난 양의 지뢰가 폭발을 기다리는 휴화산처럼 묻혀있다.
전쟁, 싸움이란 게 어디 멋지고 자랑스러운 행위일까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함은 더욱 치 떨리는 일이다. 지뢰는 가장 비열한 싸움의 도구다. 익명의 다수를 해치기 위해 마련된 야비한 음모다. 그 덫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어린이나 산짐승의 신체와 생명을 박살내는 괴력을 숨기고 있다. 캄보디아에는 이러한 지뢰가 약 천만 개 정도 매설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불과 2∼3년 전까지 한 달에 54명이 지뢰로 사망하거나 부상했다. 현재 이 나라에는 4만5천여 명의 절단 장애인이 있다.
여행의 동반자인 운전기사는 이 나라 현대사의 질곡을 관통해온 위인이다. 8년간 정부군에 근무하면서 싸움터의 한복판을 누비고 다녔다. 함께 입대한 친한 친구들을 여럿 잃었다. 너도 지금까지 군대에 있었다면 장군 노릇하고 있을게 아니냐고 물으니 입을 삐죽거리며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린다. 진급하는데 엄청난 돈이 드는데 자기는 가난해서 영원한 졸병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계급 체계로 말하면 상병 정도로 제대했다. 8년이면 장교는 못되더라도 중사나 상사 정도까지는 진급할 수 있었을 텐데. 전공(戰功)을 전혀 세우지 못한 게 아니냐고 물으니 손사래를 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다고 총질하는 흉내를 낸다. 야, 이놈아! 군대에서 한가락 하지 않은 놈이 어디 있냐. 저마다 혁혁한 공을 세운 영웅이 아니냐.
그의 눈에는 살기가 없다. 남을 편하게 해주려는 웃음과 너그러움이 그득한 얼굴이다. 과장을 한다면 이것 또한 성불의 경지이리라. 젊은 날의 분노와 처참한 살육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그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성실한 택시운전사는 고사하고 밤거리의 폭력배가 되기에도 버겁다. 잔혹성을 씻어버린 그의 삶이 가상하다.
이우상 <소설가 asdfsang@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