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앙코르 톰이다. 앙코르(Angkor)는 ‘도시city’, 톰(Thom)은 '거대하다great'라는 의미다. '거대한 도시’ 혹은 ‘신들의 거대한 성곽 도시’로 해석된다. 앙코르 톰은 1177년 참족(베트남)의 침략을 계기로 왕도를 요새화하기 위해 건축했다. 높이 8미터의 성벽을 쌓고 다섯 개의 성문을 만들어 출입을 통제하고 성의 외곽에는 해자(방어용 수로)를 팠다. 성 내부 면적은 270만평이다. 앙코르 왕조의 전성기에는 이곳에 100만 명이 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13세기에 인구 100만의 도시라니! 당시 런던이나 파리의 인구가 10만 명을 넘지 않았다.
1431년 태국 세력이 침입하여 도성이 함락될 때까지 2세기 동안 영화를 누렸다. 성곽 도시의 한가운데 바욘 사원이 있고 그 주변으로 바푸온, 피미아나까스(천성의 왕궁), 코끼리 테라스, 문둥이 왕 테라스 등이 있다. 하루 종일 둘러보아도 걸음이 버겁다. 1년 내내 낮 기온이 섭씨 35도~40이다. 전진과 휴식을 반복해야 한다. 강행군은 미덕이 아니다.
사진으로 많이 알려진, 수십 개의 인면상이 있는 곳이 바욘사원이다. 거대한 돌에 새겨진 얼굴은 우선 무시무시한 느낌이 든다. 돌로 조각한 거대한 인면상을 보고 금방 자애롭게 느낀다고 하면 그건 과장, 위선이다.
바욘에 들어가자면 앙코르 톰 남문을 통과해야 한다. 자동차를 타고 휙 지나가면 안 된다. 제지하는 것이 아니라 걸어서 가야할 가치가 있다. 4면에 얼굴상이 조각된 거대한 고푸라(성문 입구에 세운 거대한 구조물)가 보이는 지점에 하차한다. 발가락이 성하니 걱정 없이 들어갈 수 있다. 제국 당시에는 중죄인의 발가락을 자르는 형벌이 있었다. 발가락이 없는 자는 성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고푸라를 중심으로 좌우에 바수키(뱀)의 몸통을 껴안은 수십 개의 석상이 도열해 있다. 정확하게 좌우에 각각 54개, 합하여 108개의 석상이 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다문 형상이다. 위엄이 만만치 않다. 왼쪽은 선신(善神), 오른쪽은 악신(惡神)이라는 해석이 있다. 선과 악의 평행선 대립, 백팔번뇌는 그 대립에서 끝도 없이 진행형이다.
지금 그 석상들은 모두 불구이다. 목이 없고 팔이 없고 코가 떨어져 나갔다. 도굴과 훼손의 결과다. 그런 흔적들은 앙코르 유적 도처에 널려 있다. 바욘으로 향하는 숲길만 싱싱하고 창창할 뿐 유적들은 상처투성이다.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파괴하는 모순의 현장이 앙코르다.
숲길을 통해 해자를 지나니 바욘이 웅자를 드러낸다. 거대한 돌에 새겨진 얼굴, 천년의 풍상을 켜켜이 덮은 채 말없이 내려보는 얼굴, 위압적이다. 비바람과 세월이 검은 얼굴로 만들어버렸다.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그런 얼굴상이 바욘사원의 우뚝한 탑마다 동서남북 4면에 새겨져 있다. 축조 당시에는 54개의 얼굴상이 있었으나 지금은 37개만 남아 있다.
바욘사원은 앙코르 톰이라고 부르는 유적지 안에 있는 중심사원이다. 앙코르 톰은 앙코르 유적 중 유일하게 건축 당시부터 불교사원이었다. 각 변이 3킬로미터인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각 변에는 8미터 높이의 성벽을 쌓고 성벽 바깥에는 폭 100미터인 해자를 파서 외적의 침입을 막도록 설계했다.
우뚝우뚝 솟은 그 얼굴을 가리켜 ‘크메르의 미소’라고 한다지만, 위압적 표정에서 미소를 느끼자면 시간과 인내, 신심이 필요하다. 석굴암 본존불을 보고 대뜸 은은하고 자애로운 모습이라고 감탄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인면상의 규모와 표정이 쉽게 친해지는 것을 주저하게 한다.
얼굴의 주인공은 누굴까? 앙코르 제국을 말할 때 으뜸에 놓이는 이가 자야바르만 7세다. 그는 직계 왕손이 아니라 방계였다. 1177년 똔레삽 호수로 쳐들어온 참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왕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 지배계급은 힌두교에 뿌리를 둔 귀족들이었다. 방계로서 지방 영주로 있던 자야바르만 7세는 왕이 되자 중앙 귀족들의 견제를 받는다. 그래서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자 최초로 대승불교를 들여왔다. 자신을 중생 구제에 앞장 선 관세음보살이라 믿게 하고 사원, 병원, 빈민구제시설을 지었다. 102개의 병원, 121개의 구호시설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치세에 바욘, 앙코르 톰, 쁘리아 칸, 니악 뽀안, 따쁘롬, 반띠아이 끄데이 등을 건축했다. 역대 왕들 중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왕권을 강화시킨 앙코르 왕조 최고의 군주다. 그를 가리켜 크메르의 광개토대왕, 크메르의 루이 14세라고 평하기도 한다. 스스로 관세음보살이라 칭했으나 오만한 군주가 아니었다. 존경과 신망을 한몸에 받은 성군이었다. 후삼국 시절 태봉국의 궁예는 스스로 미륵이라 칭했으나 오만과 독선으로 민심을 잃어 허망한 최후를 맞았다. 자야바르만 7세는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세종대왕 같은 존재다. 곳곳에 그의 흉상이 서 있고 그의 이름을 빌린 어린이병원도 있다.
54개의 인면상은 자야바르만 7세의 자화상이라는 것이 정설이고 54개 지역 영주의 얼굴이라는 설도 있다. 아침녘, 한낮, 저녁 석양 무렵 등 시간대를 달리해서 몇 차례 방문하는 것이 좋다. 멀리서 바라보고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보고 동서남북 방향을 달리해서 그를 바라보자. 그러면 서서히 두려움이 없어지고 은은한 관음의 미소를 볼 수 있다.
이우상 (소설가․ asdfsang@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