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던진 수수께끼 하나.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다.
모두 예상한대로 정답은 사람이다. 어려서는 기어서 다니고 커서는 두 발로 걷고 늙어서는 지팡이를 짚고 다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게 늙어가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그런데 여기, 세 발로 걷다가 두 발로 걷다 나중에는 네 발로 걷는 이가 있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주인공 벤자민이다.

이 영화는 여든 노인의 육신으로 태어난 남자가 결국 갓난아기가 되어 죽는다는 모티브로 시작된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구상한 건 ‘위대한 개츠비’로 유명한 소설가 F. 스코트 피츠제럴드이다. 그가 1920년대 발표한 단편소설에다가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시나리오 작가 에릭 토스가 살점을 덧붙여 만든 작품이 바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맹인 시계공이 혼신을 기울여 뉴올리언스역의 시계를 만든다. 그런데 이 시계는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뒤로 가는 것이 아닌가. 시계탑 제막식에 모인 이들에게 시계공은 말한다. “저 시계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처럼 우리의 자식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그의 염원 때문일까. 1918년 1차대전이 끝나던 날, 단추로 유명한 버튼 집안에는 아들이 태어난다. 전쟁의 종식을 환호하는 군중들 틈을 파헤치고 토마스 버튼은 가까스로 집에 도착하지만 집안은 검은 어둠 속에 갇혀있다. 아내는 아이를 낳은 산고로 숨을 거두고, 아이는 저주받은 존재인양 쭈글쭈글한 노인의 얼굴과 피부를 갖고 있다.
괴물 같은 아이의 모습에 기겁한 아버지는 아이를 한 양로원 계단에 버리고 달아난다. 마음씨가 좋지만 아이가 없던 양로원 직원은 아이를 거두어 정성껏 키운다. 백내장에 관절염까지 앓고 심장이 나빠 얼마 살지 못살꺼라던 아이는 한해 두해 지날수록 점점 젊어져갔다. 멋있는 중년을 거쳐 급기야 꽃미남으로 성장해 가는 벤자민은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다.

그에게는 숙명처럼 찾아온 사랑이 있다. 할머니가 계신 양로원을 찾아와 늙은(?) 벤자민와 소꿉놀이를 했던 사랑스러운 앨리스. 늘씬한 발레리나로 성장한 그녀는 브로드웨이 최고의 프리마돈나로 대성했다. 하지만 교통사고로 다리가 으스러진 그녀는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게 됐다.
몸과 마음의 상처를 이겨낸 그녀는 긴 세월동안 변함없는 사랑으로 자신을 지켜봐준 벤자민에게 돌아온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발레교습소에서 벤자민은 앨리스를 뒤에서 껴안은 채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한다. “지금 이 시간을 기억하고 싶어.”
순간에 머무는 중생의 행복은 그 누구도 붙잡을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시간은 흘러흘러 앨리스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이기 시작했고, 이와는 반대로 벤자민은 점점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미남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나는 늙어가는게 너무 싫어. 자기는 내 늘어진 살을 사랑할 수 있어?”
남자가 답한다. “당신은 내 여드름을 사랑할 수 있어?”

농담처럼 던지는 그 말에는 가슴 아픈 현실이 담겨있다. 두 사람은 남들처럼 함께 늙어가는 행복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더 큰 행복이 찾아오면서 역설적이게도 그 행복은 깨져버린다. 딸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아이에게 아빠가 돼줄 수 없는 아빠 벤자민은 결국 앨리스에게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봐줄 수 있는 아빠를 만들어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그는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은 ‘무상’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보통의 인간이 불혹의 나이를 넘기면서 느끼는 무상함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 벤자민에게도 똑같이, 아니 훨씬 더 크게 다가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 재회한 벤자민의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아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넌 지나간 세월 앞에서 미쳐버릴 수도 있어.”
“운명을 탓하며 욕을 할 수도 있어.”
“하지만 끝이 다가오면…그냥 가게 내버려둬야 해.”
<뉴스위크>의 표현대로 이 영화는 ‘특이하면서도 보편적’이다. 나이를 정상적으로 먹는 이에게도, 나이를 거꾸로 먹는 이에게도 죽음은 피할 수 없는 보편적 진리이다. 인간사의 무상함은 젊어져가든, 늙어가든 피할 수 없는 숙명임에 분명하다.
앨리스와 딸을 남겨두고 벤자민이 떠난 곳은 바로 인도였다. 세상의 시작이자 끝인 나라.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시간마저 상대적인 가치에 불과한 그곳으로 벤자민이 떠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인도 이외에 세상 어디에서 인간이 풀 수 없는 모순을, 상처를, 고통을 위로받을 수 있을까.

바라나시 갠지스 강변에서 매일 자신의 죄를 씻는 사람들과 같이 목욕을 하며, 히말라야 설산으로, 모래로 이루어진 사막도시 자이살메르로 유랑하며 그는 하루하루 젊어져간다.
인도를 다녀온 적이 있는 여러 사람들은 그 장면에서 눈물이 나왔다고 고백한다. 인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무상함과 영원함에 대한 공감대 때문이리라.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그곳에서 벤자민은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았을까. 살아 움직임과 죽어 흐트러짐이 헝클어진, 갠지스강에 흐르는 건 물결이 아니라 생멸(生滅)임을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