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서 고시공부하는 남자친구를 찾아가 산해진미를 해다 바치고, 돈도 갖다 바치고, 일주문을 나오면서 주지스님에게 공양미까지 갖다 바치는 순정녀. 지극정성을 다해 뒷바라지를 했건만 그놈, 고시 붙자마자 머리에 동백기름 쫙 바르고 나타나서 딴 여자랑 결혼하겠단다.
이때 같이 텔레비전 보던 우리 엄마들이 일제히 외치는 함성. “세상에 이런 쳐죽일 놈이 어딨노!”
70∼80년대 연속극이나 영화에서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 레파토리에는 항상 뒷빽으로 사찰이 등장한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뒤, 2008년에 등장한 영화 ‘용의주도 미스신’에서도 사찰에서 공부하는 고시생(이 남자들은 꼭 뿔테 안경을 쓴다)과 미모의 애인이 등장한다.
그런데, 우리 엄마들이 만났던 순정녀와 2008년 버전은 뭐가 달라도 많이 다르다.
박하사탕의 문소리처럼 화장기 없는 얼굴에 생머리에다가, 눈은 살짝 내리깔아야 할 주인공이 화끈한 옷차림에다가 풍성한 파마머리, 마스카라로 치켜올린 짙은 눈화장을 한 채 등장한다.
무엇보다, 고시생을 안만나는 시간 동안 열심히 돈을 벌거나 종이학을 접어야 이 여자가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 다른 남자들과 접선, 고급 레스토랑에서 물방울 다이아가 박힌 보석을 선물 받는다거나, 나이트클럽에서 죽순이보다 더 잘 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엄마들이 자기처럼 살지 말라는 이야기를 이렇게 잘 이행하고 있다니. 놀랍다.
암튼, 재벌3세 남자친구, 고시생 애인, 거기다가 양념으로 만나는 양아치까지 삼중 플레이를 하고 있는 용의주도 미스 신, 신미수 양(한예슬).
그녀의 스토리에도 사찰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니, 고시생 애인이 공부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최근에는 신림동 고시촌이 고시공부의 메카가 되면서 사찰에서 공부하는 고시생을 찾아보기가 힘든 풍토가 되었지만, 2007년도 영화인 용의주도 미스신은 여전히 영화의 극적 효과를 노리기 위해 사찰에서 공부하는 고시생을 등장시켰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찰은 다름아닌 북한산 국녕사. 조선시대까지 북한산의 대표적인 사찰이었지만 현대에 이르러 폐사된 곳을 능인선원이 1998년에 중건했다.
이 사찰이 중건될 당시 능인선원은 불교계의 순복음교회로 칭해질 정도로 엄청난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당시 투입된 자금이 200억원에 달했고, 북한산 중턱에 위치해 있는 이곳에 대불을 조성하기 위해 러시아 전투용 헬기가 동원될 정도로 온 정성과 노력을 다해 복원했다는 후문이다.
『북한지』에 따르면 국녕사는 1713년(숙종 39년) 청휘와 철선이 창건했으며, 의상봉은 신라 때의 고승 의상대사가 천공(天供: 하늘의 공양)을 받아 수행을 하던 곳으로 기록돼 있다.
북한산의 절경이 한눈에 보이는 의상봉 바로 아래에 위치한 이 사찰에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동양 최대의 좌불이 사찰 지붕에 위치해 있다.
그 크기가 작은 봉우리 수준이어서 백운대로 오르는 등산객들도 쉽게 이 청동좌불을 볼 수 있다.
이곳이 완공된 이후 능인선원의 신도들이 정기적으로 이곳을 참배하고, 북한산을 등반하는 이들도 잠시 쉬어가는 북한산의 또 하나의 명소가 되었다.
‘용의주도 미스신’에서는 이곳에서 여러 고시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것처럼 나왔지만, 실제 이곳에서 공부하는 고시생은 없다. 대신 능인선원이 각종 수련 및 기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어 서울 인근 불자들의 기도처로 활용되고 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서, 우리의 미스신은 여러 측면에서 우리 시대의 모범적인 여인상임이 분명하다.
대부분의 양다리 내지 세다리들이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에너지의 분산 때문이다. 1:1 연애가 아닌 1:2 내지 1:다수의 연애는 결국 에너지의 분산을 가져오고, 결과적으로 승률을 떨어뜨린다는 결정적 문제점이 내포돼 있다.
그런데 신미수 양은 분명 양다리를 걸치는 것은 확실하지만 양다리로 인해 다른 애인에게 결코 소홀한 법이 없다. 건전하게 성당이나 복지관에서 만나는 애인 따로, 밤에 나이트클럽에서 만나는 애인 따로, 주말에 산으로 올라가 만나는 애인 따로다 보니 시간배분이 아주 절묘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산사에서 남자친구에게 고기를 구워주다 주지 스님에게 쫓겨날 지경이 되자, 남친의 하산을 저지하기 위해 부처님(국녕사 대불) 앞에서 3000배까지 하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쯤대면 그녀는 수퍼우먼이 아니라 울트라 특급 원더우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영화의 결말은 촌빨날리게 진정한 사랑이니, 순수한 마음이니를 외치고 있다. 나름 재미있는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건 소재의 진부함이나 연기자들의 열정 부족이 아니라, 결론의 초딩스러움 때문임에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