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포 앞바다에 해가 떠오르면 그 빛이 토함산에 이르러 석굴암에 이르고, 본존불의 백호에 닿는 순간 석굴암이 환한 빛으로 감싸이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고대학계에서는 석굴암의 장관이 지금 석굴암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전각에 의해 망쳐졌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져왔다.
중학교 때 국사 선생님에 의해, 혹은 대중을 겨냥한 답사기를 통해 구전처럼 전해져오던 이 장면이 최근 개봉한 한 영화에서 등장했다.
‘once upon a time’. 제목만 들으면 로버트 드니로가 절망을 삼키며 절규하는 갱스터 무비가 떠오르는 이 영화는 8·15 해방을 바로 앞둔 1944년 한국 문화재 도굴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이보영, 박용우 등 최고의 인기스타라고 하기에는 약 2% 정도 부족한 1.5 등급 정도의 히로인들이 등장해 개봉당시에는 큰 기대를 모으지 못했지만, 이 영화는 예상외로 탄탄한 시놉시스와 성동일 등 대한민국 대표 조연들의 빛나는 연기로 관객수 100만을 가볍게 뛰어넘어버렸다.
이 영화의 핵심 키워드는 ‘동방의 빛’. 동방의 빛이란 석굴암 부처님의 백호(白虎: 성인의 32가지 상호 중 하나)로 박힌 3000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지칭하는 말이다.
마의태자가 두 사람이었다고?
신라가 멸망할 당시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신라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이 보물을 들고 금강산으로 향하다가 이 보물이 실종됐는데, 그 보물이 경주에서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길목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플롯으로 영화의 첫 서막이 시작된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사기꾼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고고학자 한 명이 등장해 기가 막힌 해석을 내놓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마의태자는 한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두 사람이며 그 중 한 명은 금강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먹으며 굶어죽었지만 또 한 명은 양평 용문사에서 스님 노릇을 하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마의태자가 양평 용문사에 은행나무 지팡이를 꽂아서, 그 나무가 현재 천연기념물 1호인 은행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은 바로 그 자리에 또 한 명의 마의태자가 묻혔다는 것이며 그 무덤에 바로 ‘동방의 빛’ 즉 수천 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매장돼 있다는 것이다.
결국 억수같은 비가 쏟아져 내리는 날(꼭 이럴 때는 비가 온다. 아마 땅이 잘 파져서인 듯) 일본군들의 지휘 아래 대대적인 발굴작업이 진행되었고, 거짓말처럼 ‘동방의 빛’이 마의태자 두골 속에서 발견된다.
일본군들이 그 다이아몬드를 들고 석굴암 본존불의 이마에 끼우는 순간 때마침 동해에서 올라온 일출과 맞닿으면서 석굴암은 장엄한 빛으로 가득해진다.
이후 일본에서는 조선총독부로 동방의 빛을 본국으로 송환하라는 지령이 떨어지고, 조선총독부는 동방의 빛 일본 송환을 앞두고 축하연이 성대하게 열린다. 그런데 여기 축하연에 조선의 대표적인 명사들(물론 친일파)은 물론 도둑놈, 독립군, 도둑인지 독립군인지 모를 ‘분’들까지 다 몰려든다.
우여곡절 끝에 이보영의 가슴팍으로 들어간 다이아몬드는 어찌어찌하다 독립군에게 넘어가고 또 어쩌다가 조선총독에게로 다시 전해진다. 이보영의 가슴이 조금만 더 작았더라면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는 절대 캐스팅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필자의 쓸데없는 소견이다.
‘독립군은 가고 사기꾼의 시대가 왔다’는 영화 헤드카피처럼 이 영화는 어떤 놈이 좋은 놈이고 어떤 놈이 나쁜 놈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캐릭터의 혼란스러움이 반복된다.
진짜 동해 일출과 석굴암은 만났던 것일까
한데, 역사와 픽션이 혼재돼 있는 이 영화 속에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동방의 빛’ 즉 석굴암 백호는 실제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빛이 동해의 일출과 맞닿았다는 설이 사실일까.
현재 역사학계에서 입소문으로 퍼져오기로는 조선시대까지 내려오던 석굴암 백호가 일제시대 이후에 없어졌으므로 일본인들이 훔쳐간 게 분명하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일본에서도 그 소재가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일본인의 소행인지, 다른 제3자의 소행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동해에서 해가 솟아오르면 그것이 토함산 석굴암으로 이어져 부처님 백호에 닿는다는 드라마틱한 전설은 사실 근현대 역사학자들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이다.
지금까지도 1963년 황수영 교수 팀에 의해 주도된 석굴암 복원이 가장 비판받는 이유 중에 하나가 석굴암 원형돔을 감싸는 전각을 세워 석굴암의 기본 양식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 전각으로 인해 동해 일출과 석굴암이 이어지는 장관이 사라졌다는 것인데, 이같은 주장은 주로 김원룡 교수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하지만 석굴암 백호와 동해의 햇빛이 맞닿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역사상 단 한 명도 없다. 동해를 향해 앉아 있으니, 앞에 가려진 건물만 없으면 그 빛이 닿을 것인데, 조선시대에 없던 건물을 만들어놓아 석굴암 본래의 아름다움을 깨트려버렸다고 주장하는 쪽의 상상력의 산물일 뿐인 것이다.
또 지금은 토함산의 수목이 울창해져 앞에 만들어진 전각을 없앤다 해도 동해의 일출이 석굴암 백호와 맞닿을 가능성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현대판 설화가 영화 속에서 한 장면으로 등장하는 모습은 이 영화의 재미를 한층 더 살려준다.
마의태자와 의상, 원효, 도선대사가 한꺼번에 믹스
이 영화의 또 한가지 키워드. 용문사 경내에 있는 은행나무. 약 1100여년의 수령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는 한국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이며, 세월만큼 전설도 많은 나무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세자였던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심었다고도 하고,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도 한다. 또 다른 설화에서는 의상대사가 원효대사가 되기로 둔갑하기도 하고, 도선대사로 각색되기도 한다. 어쨌든 용문사 은행나무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소리를 내어 변고를 알렸다는 구전이 전해질 정도로 신령스러운 나무로 숭앙돼 왔다. 조선 세종 때는 당상직첩을 하사받기도 했다.
영화 원스어폰어타임에서는 마의태자와 의상대사 설화가 하나로 짬뽕이 되어서 마의태자 한 명은 금강산으로 가서 고사리를 먹다가 굶어죽고, 또 한 명의 마의태자는 용문사에서 스님이 되어서 살다가 죽어서 은행나무 밑에 묻혔다는 썰을 풀어낸다.
사실관계야 어찌됐든, 역사와 전설, 설화가 짬뽕된 이 영화는 고대의 전설과 현대판 구전설화를 믹스시켜 아주 야들야들하게 반죽을 한 ‘수타면’임에 틀림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