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에 연이은 희양산 남쪽 계곡에 자리잡은 봉암사는 한국 현대불교의 초석을 놓은 선문(禪門)이다. 봉암사 결사(結社)의 성지로, 수행자의 엄격성이 그대로 지켜져 지금도 1년에 단 한 번 4월 초파일에만 대중에게 개방되는 곳이다. 봉암사는 해방 직후인 1947년, 흐트러진 불교계를 바로잡기 위해 불법대로만 수행하자는 성철스님을 중심으로 청담·자운·향곡·월산·혜암·법전 등이 모여 결사를 단행한 곳이다. 이들은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화두를 수행과 노동을 하나로 삼아 정진했고, 그 청정한 수행도량의 맥이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다. 그래서 대중에게 봉암사라는 이름은 늘 아득했고, 더욱이 마애불을 보기 위해서는 조용히 인연이 닿기만을 바라며 인내하는 수밖에 없다.

함박눈이 휘날리던 겨울, 드디어 초파일이 아닌 날 봉암사 안으로 들어가 볼 예상치 못한 기회를 얻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봉암사 경내를 지나면 천연림의 울창한 계곡이 이어진다. 양산천을 따라 봉암용곡이라 불리는 20리 길이다. 그 삼림 한 가운데에 있는 너른 암반에 이르면 그야말로 선경(仙境)이 열린다. 신라 말 이상향을 찾아 헤매던 최치원이 여기에 들러 ‘백운대(白雲臺)’라는 글씨를 남겼다고 전해올 만큼 그 너럭바위에서 보는 경치는 신선경이다. 물이 큼직한 바윗덩어리를 휘감고 흘러들어 크고 작은 폭포와 소를 이루는 모습은 금강산 암반 계곡의 빼어난 절경에 견주고도 남는다.

백운대 큰바위 옆, 선바위 북동쪽 면에 얕은 저부조로 새겨진 마애불은 절 쪽을 향한다. 이 마애불은 분명 부처의 모습인데, 유독 오른손으로 가볍게 꽃가지를 쥐고 있다. 만일 석가가 연꽃을 든 것으로 본다면, 염화시중을 나타내는 도상과 관련될 것이다. 염화시중이란 부처의 오랜 설법이 있은 뒤에도 깨달음을 얻은 제자가 없자, 어느 날 부처가 연꽃을 꺾어 청중들에게 들어 보였을 때 가섭만이 이심전심의 미소로 답하였다던데서 유래한다. 염화시중의 미소가 우리에게 쉬이 올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처럼 맑은 희양산 봉암연곡에서는 그 미소가 가슴에 그려지는 듯하다. 더욱이 미색조의 매끈한 화강암에 다듬어진 마애불의 얼굴에는 양감이 부드럽게 살아 있고, 고려시대 불상으로는 드물게 미소년의 표정을 하고 있다. 이마의 백호에는 옥을 새로 끼워넣었고, 손상된 코부분은 새롭게 다듬은 흔적이 있으나 청류(淸流)를 끼고 앉은 부처의 모습을 보는 데는 별 무리가 없다.

근래 암반의 아래쪽에 작은 자연석으로 10여기의 탑을 세워놓은 탓에 그 천연의 선경이 흐려졌다. 이무튼 이곳은 중생과 만나는 장소라기보다 무위법(無爲法) 안에서 구도하고 있는 근기 높은 선승들의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