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지리산정령치개령암마애불상군. 고려 10세기. 높이 1∼4미터
보물 제1123호,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덕동리.
지리산 정령치는 남원 운봉, 주천 쪽에서 심원계곡이나 뱀사골 혹은 노고단을 넘어가는 고갯마루로 해발 1,172미터 높이이다. 이곳은 큰 휴게소가 자리잡을 정도로 지리산 교통로의 중심이다. 정령치에 연이은 고리봉 벼랑 밑 산속의 너른 터가 ‘고개를 여는 곳’이라는 의미의 개령암지이다. 개령암지 위에는 옛 산성터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운봉과 남원 시내와 들녘을, 동남쪽으로는 토끼봉에서 노고단까지의 장엄한 산세를 볼 수 있으며, 맑은 날이면 서쪽의 먼 무등산까지 눈 마중할 수 있다.
개령암지 서쪽 절벽에는 남향으로 자리잡은 11구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가장 큰 불상은 4미터 정도의 키인데, 3미터 크기의 또 다른 불상과 함께 중심 위치로 모셔진 듯하다. 나머지 불상은 1미터 내외의 작은 크기로 모두 훼손이 심한 편이다. 마애불은 대개 좌상으로 얼굴은 코가 오똑하게 솟은 돋을새김이지만 몸체는 희미한 선각이다. 이마에 백호를 둔 흔적이 또렷하다. 수인은 양손을 배 앞으로 모으거나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고 다른 손은 명치 앞으로 대었다. 그러나 마모가 심하여 정확하게 확인해 보기는 어렵다. 그 형식미는 마치 운주사의 못난이 불상들을 연상시킨다.
본존이라 여겨지는 높이 4미터 불상의 아래쪽에 ‘明月智佛’, ‘毘盧遮羅佛’과 ‘天寶十’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확인된다. 비로자나불이 계신 이곳, 산세 깊숙한 개령암지 자체가 큰 적막의 세계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 할만하다. 명문 가운데 ‘천보’는 오월(吳越, 908∼923)의 연호이고, 마모된 중에 정확히 읽은 것이라면 이 마애불은 917년에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인정하면 이 불상의 조성시기는 후백제가 되는 것이니, 유적이 드문 후백제 불교미술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그러나 불교조각사 계보에서 보자면 정법에서 이탈된 매우 독특한 상이어서 정확히 고증하기 어렵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마한시대 장수인 정 장군과 황 장군의 초상이라고도 하니, 산성과 개령암지는 백제에 몰락한 마한 세력의 정착지였다는 달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실제 이곳에서 비탈진 계곡을 따라 곧바로 내려가면 심원계곡 달궁마을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