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에서 산세가 깊다는 보성군 중에서도, 율어면은 비탈진 산골짜기에 난 좁고 작은 논인 다랑이를 따라 굽이굽이 넘어 돌아 만나는 곳이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로, 생계를 위해 종종걸음 치던 남도인의 척박한 삶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터이다. 마애불이 있는 율어면 이동리의 존제산(尊帝山)은 해발 700미터 정도의 산이다. 이곳에 고려 때의 존제사(尊帝寺)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도교와 불교적 이름이 합해진 절 이름이다. 지금은 소규모 암자인 미륵사가 들어서 있다.

마른 계곡 쪽으로 형성된 암벽에 마애불좌상과 미완의 공양상이 저부조로 새겨져 있다. 북서향으로 앉은 마애불은 오후 해거름에야 햇빛을 받아 제모습을 드러내면서 율어의 산세와 다랑이논들의 삶터를 응시한다. 본존은 코 부분만 마모되었을 뿐 상당한 솜씨로 돋을새김되어 있다. 둥근 얼굴에 반질한 육계가 높은 편이다.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새끼손가락으로 고리를 만드는 설법인 형태인데, 우리나라 불상에서 흔치 않은 예이다. 무엇보다 어깨에 걸친 숄 모양이 독특하다. 법의가 목선에서 늘어져 이중 삼중으로 겹치는 경우가 있지만, 이 마애불처럼 별도의 천을 어깨에 걸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법의는 전체적으로 잔주름이 많이 잡힌 9세기 불상의 도식화된 특징을 잘 보여준다. 동시에 양어깨에 걸친 숄 같은 표현은 지방에서 조성된 독창적인 아이디어라 할 수 있다. 대좌에는 잎이 넓은 연꽃이 위아래로 피어 있고, 중대석이 굵은 연잎받침 위로 널찍하게 자리하였다. 두광과 신광에는 알 굵은 구슬 모양의 연주문이 돌려지고, 그 주변엔 불꽃문양이 기세 좋게 올라가 이러한 대작의 마애불상을 더욱 완성도 높게 마무리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