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금강묘길상마애불좌상 고려10세기. 높이 15미터
북한 국보급 문화재 제46호.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금강산의 서쪽 능선인 정양사나 천일대 혹은 방광대에서 내려다볼 때, 내금강의 중심은 비로봉 아래로 펼쳐진 중향성이다. 또 만폭동 계곡을 따라 수석을 밟으며 비로봉 쪽으로 오르다 보면, 중향성 아래가 내금강의 심장부임을 실감하게 된다. 표훈사에서 금강문과 금강대를 지나 오른쪽 만폭동의 내팔담을 벗어나면 화개동이라는 평탄한 공간이 열린다. 화개동의 동쪽으로 백운동 골짜기의 마하연을 거슬러 지나면 다시 협곡을 만나게 되고 비로소 본격적인 중향성과 비로봉의 등반길로 접어든다. 등산로의 비좁은 길목에 들어서자마자 수직으로 깎아지른 40여 미터 높이의 벼랑이 앞을 떡하니 가로막는다. 내금강의 가장 깊은 이곳 암벽에 거대한 마애불좌상이 새겨져 있다. 비로봉을 오르기 전에 반드시 만나게 되는 부처이다.
마애불은 앉은키가 15미터에 이른다. 얼굴과 손발 길이만 해도 자그마치 각각 3미터가 넘는 크기로, 그 거대함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암벽을 돔 모양의 감실형태로 쪼아서 그 안에 불좌상을 부조해 넣었는데, 양 무릎의 폭이 9.4미터이다. 고려시대 마애불로는 큰 규모이며, 걸작으로 꼽힌다. 떡 벌어진 어깨에 웅장한 자태이지만, 권위적인 부처상이라기보다 후덕한 금강산의 산 아저씨 같은 인상이다. 상호는 선이 또렷하고 두툼하며 입가에 배시시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비로봉을 오르내리는 참배객들에게 편안함을 준다. 금강산을 지키는 부처로는 제격이다.
가슴에서 위아래로 향한 양손은 중지를 굽혀 엄지에 대고 있어서 아미타구품인의 수인처럼 보인다. 얼굴과 손은 입체감을 살린 환조식 고부조 묘사인데 비하여, 양어깨에 걸친 법의의 옷주름과 발은 얕은 저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의습은 깊은 음각 선묘이고, 눈·코·입·손과 손톱, 발가락 등은 살 맛이 돌게 조각하였다. 그러면서도 전면에는 위에서 아래로 쫀, 가는 선의 정 자국을 까실하게 남겼다. 이러한 조각수법에 상체가 긴 비례와 도식화된 의습 처리는 신라 석불 형식을 탈피한 고려 초의 경향을 뚜렷이 보여준다. 둔중하면서도 당찬 표현에 고려 건국의 새 희망과 기대감이 실려 있는 듯하다.
바위의 때깔이 누래서 마애불은 마치 황금부처 같다. 그 때문에 생긴 한 스님의 일화가 전해온다.
어느 날 한 스님이 돈이 궁했던지 한밤중 달빛 아래 마애불을 대하니 전체가 황금으로 보였다. 무릎 한쪽을 떼내어 보자기에 싸놓은 뒤 다음날 장에 갔는데, 보자기를 펼쳐놓고 보니 돌덩어리였다는 것이다. 성직자를 속화시킨 설화이다. 실제로 마애불을 찬찬히 살펴보면 왼쪽 무릎이 떨어져 나간 자국이 마치 그 승려가 떼어낸 듯한 흔적처럼 보여 흥미롭다.
마애불의 오른쪽 아래에는 ‘妙吉祥’이라는 행서체의 큰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정조 때 문인 관료인 직암 윤사국(1728∼1809)이 쓴 글씨이다. ‘묘길상’ 외에도 윤사국은 삼불암을 비롯해서 내금강 바위 곳곳에 각자(刻字)를 남겼다. 그가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1790∼1793) 새겼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는 내금강에 있는 다른 사찰의 복원에도 힘을 기울였던 인물이다.
‘묘길상’은 문수보살의 별칭이다. 중향성 아래에 불상이 위치해 있어서 그렇게 불렸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중향(重香)은 유마대사가 문수보살과 불자들을 공양하기 위해 향반을 먹였다는 ‘유마경’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애불의 도상으로 보아서는 보살상이라기보다 여래상이다. 그래서 이 마애불을 ‘화엄경’에 나오는 금강산의 주존 ‘비로자나불’로 해석하기도 한다(최남선 ‘금강예찬’). 금강산의 심장부를 지키며 비로봉과 중향성을 향해 밤낮으로 정좌해 있고, 비로봉에 오르는 길목을 지키고 있으니 비로자나불로 보는 것도 무리가 없을 법하다. 그러나 수인은 비로자나불의 전형인 지권인(智券印)을 하고 있지 않다.
마애불의 앞에는 3.6미터 높이의 불을 밝히는 석등이 놓여 있다. 기단·기둥·화사석(火舍石) 받침·옥개석 등이 모두 사각형인 특이한 형식인데, 마애불과 같이 제작된 고려 석등으로 추정된다. 불을 켜는 화사석 공간은 둥근 대나무통 모양의 기둥으로 네 곳을 받쳐 만들었고, 석등 앞에는 3층의 돌계단까지 마련해 놓았다. 이 석등의 불빛 아래에서라면 거대한 황금부처가 살아 생동하는 영험을 내렸을 것만 같다. 김윤겸·김홍도·엄치욱 등 조선시대 내로라 하는 화가들이 묘길상을 즐겨 그렸는데, 그만큼 이 마애불에 많은 애착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