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 개아(個我)의 형성(形成)
가. 정신과 물질(Nama - rupa)
붓다(Buddha)의 가르침을 시행하는 첫 단추는 우리의 형성본질(形成本質)에 대한 파악입니다. 그래서 개아의 형성 요소부터 살펴가며 어떻게 알아가고 전개하고 그 열매를 맺어가는가를 간추려 알아보겠습니다.
부처님의 재세시(在世時) 사상의 보고라는 인더스 강 문화를 창출한 인도에서도 한 인간의 형성을 영, 혼, 영혼, 혼백, 넋 등의 덩어리와 육신이라는 업의 덩어리인 몸뚱이로 이루어졌음을 굳게 믿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간결하게 말씀하십니다.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중생(생명 있는 모든 존재)는 나마-루빠(Nama-rupa)라는 정신과 물질의 요소로 형성되었다는 개아의 형성에 대한 올바른 지주를 세우셨습니다. 당시 최고 경지라고 자부하던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까지 흔들고 부정하며, 설정이 아닌 사실을 설명해 나가셨던 것입니다.
개아형성의 기본요소인 나마-루빠(Nama-rupa)를 인간에게 적용하면 나마(Nama)는 ‘정신’입니다. 의식, 마음, 인식, 생각, 잡념, 사유, 숙고, 나아가 번뇌와 망상을 통칭하는 것이 나마(Nama)라는 정신입니다.
루빠(Rupa)는 물질입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의 몸뚱이와 부차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쉬운 우리말로 옮기면 나마-루빠(Nama-rupa)는 ‘마음과 몸’입니다. 이것을 한생명의 기본 요소로 보셨고 이것은 업의 상속에 의해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없어질 뿐이지 여기에 신(神)의 개입이나 어떤 절대자의 작용이 있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학문의 발달도, 실험의 도구도 현대에 비해 전무(全無)하다시피 한 시대였던 2600년 전에 이 같이 간결하게 설정해 놓고 파헤치신 한 성인(聖人)의 탄생이 금세기를 지배하고 있는 과학의 초석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현대 물리학의 진수가, 아니 철학이나 기타 과학이라는 모든 학문까지도 궁극은 ‘존재’를 규명하는 것이지요. 학문은 거의 직선적(심층적)이라 원자, 핵, 양자, 중성자…, 등으로 분석하다가 결국은 1980년에 ‘쿼크’라는 더 분리할 수없는 분해의 결과에 이르러 존재는 ‘입자’라 했다가 ‘파장’이라 했다가,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空’이라고까지 매김하며 양자 물리학까지 세우지 않습니까. 이것은 이미 언급했듯 상호관계의 역동성을 간과한 직선적 분석입니다. 또한 과학자들은 인체(人體)를 몸과 마음이 함께하는 동체(同體)이지 분리할 수 없다고 결론내고 있습니다. 또한 한 생명의 살이 중에 몸이 차지하는 비중(먹고, 싸고, 자는 것)은 10%이내이며 마음의 세계는 그 비중이 90% 이상이라는 결론까지 도출해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세계를 계발하는 데는 아직은 너무너무 어려운 미답의 세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Buddha)는 미답으로 미루거나 무지로 포장하지 않고 과감하게 합리적이고 분석적이며 논리적으로 계발하셨습니다. 현대를 지배하는 과학의 시대-그러나 절대 미완성의 학문-에 살면서 우리는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信), 불신(不信)의 종교의 양면성으로 과학을 보면 과학도 종교의 자리(?)를 슬슬 만들어 갑니다. 소위 과학교(科學敎)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붓다(Buddha)께서는 이 모든 궁극에 이르는 길을 오직 수행으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수행의 테크닉 첫 머리에서 ‘몸에서 마음을 분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개아(個我)의 형성(形成)이라는 소제(小題)를 세우고 있으며 고통과 윤회의 마감, 나아가 닙바나(Nibbana, 열반)까지도 한 인간의 나무-루빠(Nama-rupa)의 문제일 뿐입니다.
붓다는 몸과 마음을 과학적 방법으로도 분리할 수 없는 맹점까지도 타파하십니다. 오직 마음으로 만이 몸에서 마음을 분리하여 그 마음을 일을 시키는 방법(tecknic)을 개발하셨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유체이탈이 아닙니다. 그렇게 분리된 마음을 몸(身)에 붙이고 느낌(受)에 붙이고 마음(心)에 붙이고 대상(法)에 붙여서 형성된 개아의 생(生)과 멸(滅)을 보아가며 나라고 하는 존재의 성품을 알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쉽게 말해 자신의 몸과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래(如來) 10호인 응공, 선서, 명행족, 세간해, 천인사, 조어장부, 무상사, 정변지, 여래, 불세존으로 칭송하고 받드는 것은 남방(南方)이나 북방(北方)이나 똑같이 전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필자)은 더욱 간결하게 천명합니다. 붓다(Buddha)는 수행을 통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의 문제를 완전무결하게 해결하신 최초의 인간이시며, 높은 단계의 천신(天神)들의 능력을 뛰어넘으신 분입니다.
우리는 이 나마-루빠(Nama-rupa)를 한문 문화권이다 보니 명색(明色)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12연기의 4번째 고리) 그러니 대승의 경전 상 명색(明色)이라는 말이 나오면 나마-루빠(Nama-rupa)로 읽으십시오. 몸과 마음으로 읽어도 됩니다.
팔리어(pali)어가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에 중국의 말로 표기(表記)해서 어렵게 읽었던 시대적 아픔을 우리 모두 감내하고 있습니다. 모든 대승의 경전들이 번역되어 전래되어온 것이 어찌 그뿐이겠습니까. 이제 팔리(pali)어 원문을 알아서 막 이해하도록 하십시오.

나. 오온(五蘊)
‘가’항의 나마-루빠(Nama-rupa) 두 단어는 우리의 형성 요소를 말합니다. 다섯 가지로 분류하면 오온(五蘊)입니다. 몸의 무더기(色蘊) 느낌의 무더기(受蘊) 지각의 무더기(想蘊) 행위의 무더기(行蘊) 인식의 무더기(識薀)로 영혼과 육체라는 관념적인 인식을 구체화하셨지요. 여기에서도 나마-루빠(Nama-rupa)입니다. 나마(Nama)는 수, 상, 행, 식이요. 루빠(rupa)는 색입니다.
붓다는 관념적이 아닌 궁극적 실재를 보기 위한 방편으로 이같이 분류하셨습니다. 우리는 오온이라는 것 앞의 설명, 즉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달달 외우고 있지만 이것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잘 모릅니다. 특히 명상을 통해서만 관찰하도록 한 것입니다.
<밀린다왕문경>(B.C200년)에서 나가세나 존자의 설명과 같이 “마치 갠지스 강의 물을 한 움큼 떠서 이것은 네팔에서 흘러 들어온 물이고, 이것은 다른 어디에서 흘러 들어온 물이며, 이것은 하늘에서 흘러 들어온 물이라는 것을 분리하여 아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한 눈에 명쾌하게 아시듯 오온을 구분하시는 분이 붓다(Buddha)이시다”라고 비유 설명했듯이 사전을 통해 머리로 알아가는 것은 오온과 수행으로 지혜의 숙성에서 알아가는 것과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사실상 불교 공부를 해가면서 수행을 해가면서 나마-루빠(Nama-rupa), 나아가 오온에 대한 것을 알았다면 그분은 공부가 완성된 사람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오온의 생멸(生滅) 과정과 소멸을 아는 것을 대단한 것이며, 그런 단계를 성취한 사람을 찬탄하는 것은 결코 과찬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붓다는 나마-루빠(Nama-rupa)의 형성, 그 유기성과 역동성을 다이내믹하게 구체화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과정들이 차츰 우리의 배움과 수행으로 증명됨을 설명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다. 육근(六根)
오온(五蘊)의 다섯 요소가 물질(rupa)은 색(色)이요, 수상행식(受,想,行,識) 네 가지가 정신(Nama)임에 비추어, 이보다 쓰임새와 그 기능에 따라 개아(個我)의 형성을 여섯 가지로 구체화 한 것이 바로 육근(六根)입니다.
즉, 개아(個我) 형성의 뿌리와 줄기, 근간이지요. 오온을 6가지로 늘리니 6근이기도 합니다. 어지간한 불자들은 불교 공부를 하면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머릿속에 잘 입력해 두고 있습니다.
오온에서 루빠(rupa, 물질)은 하나요, 나마(Nama, 정신)은 4가지였는데, 6근에서는 또 달라집니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에서 앞의 다섯 가지가 루빠(rupa, 물질)이요, 뒤의 마음만이 나마(Nama, 정신)입니다. 이것의 역동적인 작용이 오온의 작용처럼 한 삶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인간의 존재가치를 세울 수 있을까요? 이 여섯 가지 근간요소가 생명(生命)이며 존재(存在)입니다.
불교(佛敎)는 존재론(存在論)이 아니요 인식론(認識論_이라는 명제(命題)도 모든 것을 인식하는 이 기관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근(六根)이라 합니다. 이중 한 가지라도 빠지거나 부족하면(기능이) 정상이 아닌 장애이지요. 여섯 가지 기능을 잃으면 그것을 죽음이라 이름합니다. 그러나 이 육근(六根)은 일반적인 명칭이구요, 수행에 들어가면 이것을 육문(六門)이라 합니다. 무슨 문인가? 모든 감각의 대상들이 이 문을 통해서 들어오지요. 그래서 12연기의 다섯 번째 고리에서는 육입(六入)이라고도 하구요. 모든 감각을 센싱하는 센서인 것입니다. 감각이 들고 나는 감각 센서인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는 육적(六賊)이라고도 합니다.
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도적놈으로 관(觀)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생명의 원동력이지만 이것은 계(sila, 戒)에서 단속하고 지켜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그 쓰임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하여 부르게 됩니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과, 앞서 물질의 무더기(色), 느낌의 무더기(受), 지각의 무더기(想), 행위의 무더기(行), 의식의 무더기(識) 등은 수행의 근본 토양으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오온으로도 보고 육근, 육문, 육입, 육적으로도 보아가며 상황에 따라 대상에 따라 그 내용과 작용도 달라집니다. 명칭도 달라집니다.
사실 수행은 이것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벗어나면 지혜의 증득도 없습니다.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라서 도리어 수행의 토양이 되는 것입니다.

라. 육경(六境)
설명 드렸던 ‘눈, 귀, 코, 혀, 몸, 맘’의 여섯 가지의 존재 가치는 몸과 마음과 같이 ‘형식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과 대상(色聲香味觸法)과 같이 한 생명이 끝날 때까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습니다.
눈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있습니까? 형상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귀의 존재 가치와 존재 이유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코는 냄새를 맡기 위해서이며 혀는 맛을 알기 위함이요, 촉감은 신체와 대상의 닿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 여러 대상들을 느낌을 통하여 보고 인식하기 위해서 마음이 있습니다. 이는 누구나 다 이해하고 알 수 있는 사실상 간단하기 그지없는 자연의 법칙이며 진리입니다. 그래서 논장인 아비담마(Abhidhamma)의 제1장에서 마음이란 ‘6문과 6경의 화합을 통해 들어오는 대상들을 인식하여 아는 것’이라 밝힙니다. 아주 간결하게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혹은 작용)이라고 군더더기 떼고 규정해 버립니다. 마음이 인식하는 대상이라는 것이 육경(六境)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입니다.
마. 육식(六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 대상, 즉(생성향미촉법)에 접촉해서(닿아서, 만나서, 부딛혀서) 종합 사령탑격인 의식(意識)이 인식(認識)하는 상태를 육식(六識)이라 합니다. 눈이 형상과 접촉(phasa)하여 마음이 그 형상을 인식하는 것이 안식(眼識)이요, 귀로 소리를 들어 아는 것이 이식(耳識)이요, 코, 혀, 몸, 마음이 대상과 접촉하여 인식함이 비식, 설식, 신식, 의식(鼻識, 舌識, 身識, 意識)등으로 불자(佛子)라면 달달 외우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과정이 그야말로 찰나에 접촉하고 찰나에 인식하는 것으로 그 과정을 아주 느린 속도로 촬영하여 분석하면 이와 같이 장황하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도 똑 같습니다. 논장에서는 물질이 한번 일어날 때 마음은 무려 열일곱 번을 일어났다 사라지며 인식한다는 사실을 세세히 설명합니다. 극히 느리고 미세한 슬로우 비디오(slow video)촬영이지요. 이와 같이 붓다(Buddha)의 가르침은 분해하고 쪼개고 또 쪼개어서 법(法)을 보는 것입니다.
다시 육근, 육경, 육식(六根, 六境, 六識)으로 돌아가 살펴봅시다. 육근(六根)과 육문(六門)은 내 몸과 마음 안에 있다하여 육내처(六內處)라 하고, 반면 육경(六境)이라는 것은 자기(自己) 중심밖에 있는 것들이라 육외처(六外處)라 합니다. 이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이 접촉하여 육식(六識)이 일어남을 알았습니다. 이 육근(六根)과 육경(六境)과 육식(六識)은 각기 다른 계층(界層)을 형성합니다. 즉, 안계, 이계, 색계, 성계(眼界, 耳界, 色界, 聲界)…, 안식계(眼識界) 이식계(耳識界)… 의식계(意識界) 등 총 18계(界, dhatu)입니다.
그래서 개아(個我)의 형성(形成)을 요약하면 정신과 물질이요, 오온이요 육근, 육경, 육식이며 육내외처(六內外處)로 12처(處)이며 18계(界)인 것입니다. 이것이 개아(個我)라고 인식하는 존재(存在)의 본질(本質)입니다. 붓다(Buddha)께 어느 바라문이 묻습니다. “존재란 무엇입니까?” 라고요. 이는 무엇을 존재라 하는가?라는 물음입니다. 붓다(Buddha)께서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존재란 5온이요, 12처요, 18계”라고. 존재의 존재론을 그 본질을 꿰뚫으신 명쾌한 답변 아니십니까? 5온으로 12처로 18계로 인식됨으로써만 존재는 존재해 감을- 인식론을 통해 밝히십니다. 본인이 인식하지 않거나 못하면 외부대상의 존재를 어찌 존재한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세분(細分)해 놓은 것이 그분, 붓다 가르침의 완성, 혹은 전부가 아닙니다. 이것도 과정일 뿐입니다. 이렇게 분해하고 세세하게 쪼개놓아야 보기가 쉽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볼 것인가? 수행을 통해서 봅니다. 또 무엇을 볼 것인가? 여기에 진짜로 내가(眞我) 있는가?를, ‘나’라는 실체가 이 5온 안에, 12처 안에, 18계 안에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는가를 고민하고 흥미롭게 들여다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것들이 항상하지 않고 찰나에 생멸을 거듭하며 변해 감을 알게 됩니다.-무상(無常, Anijja)-. 그렇게 바뀌어 가는-중생은 늘 항상하기를 바라는데 변하는- 그 과정이 불만족(不滿足)이며 괴로움이고 나아가 고통입니다.-고(苦, dukkha)-. 이러한 ‘변화’와 ‘불만족’을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자연스러운 존재의 성품(法性)으로 이것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나‘라고 하는 실체는 없구나.-무아(無我 Anatta)- 하는 것을 명상 수행 중에 일상의 알아차림에서 보아가는 것입니다. 통찰해 가는 것입니다. 절절하게 살피는 것입니다. 처절하게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나’라고 집착하는 이 몸뚱이(身)의 호흡 하나에서도, 천변만화의 느낌(受)에서도, 쉬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心)한자락에서도 나타났다 사라지는 갖가지 대상(法) 하나에서도, 그야말로 소소밀밀하게 보아가며 ‘무상, 고, 무아’라는 존재들의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인 특성을 절절하게 처절하게 보아가는 것이 수행(Bhavana)입니다.
명상을 통해 붓다(Buddha)께서 경계하신 번뇌, 망상에 휘둘리거나 대상에 집착하는 것은 물론 그래서 나타나는 헛것인 환상(혹은 Nimitha)을 보는 것도 뛰어 넘어야 합니다. 명상은 그런 것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찰나 생(生) 찰나 멸(滅)하는 법(法)의 성품(法性)을 보아가며 무상·고·무아(無常, 苦, 無我)를 철견해 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무상·고·무아(無常, 苦, 無我)를 ‘위빠사나(Vipassana)의 도(道)’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도(道)에는 대승(大乘)에서 규정한 깨달음이라거나 완성(完成)의 뜻은 없습니다. 그저 과정(process)일 뿐이고 가는 길(magga)입니다. 이것을 삼법인(三法印)으로 묶어 놓은 대승의 가르침 역시 논박할 여지없이 훌륭한 것이겠으나 이것은 모든 존재들이 지닌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특성(特性)일 뿐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깊이있게 붓다(Buddha)의 가르침대로 하지 않으신 분들은 우주의 성주괴공(成住壞空)이나 존재(存在)들의 생주이멸(生住離滅)에서 무상, 고, 무아를 보아 가려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대상이 커서 확실해서 보기는 쉽지만, 그러한 알음알이들은 지식에 불과합니다. 명상 속에서 보아가는 것이 수행이며 거기에서 얻어진 것을 지혜라고 가르치십니다.
붓다(Buddha)가 설파하신 명상기법은 앞에 언급한 우주의 성주괴공이나 존재의 생주이멸을 보는 거시적(巨視的)인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의 내부(內部)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앞의 존재성(存在性)에서 밝힌 5온·12처·18계의 최소한 잘게 분해된 것의 생멸(生滅)을 보는 미시적(微視的) 관찰에서 진행됩니다. 이와 같이 미시적 관찰에서 얻어진 지혜로 거시적인 문제들을 아주 자연스럽게(natural)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의 현상은 내가 알았다고 해서 혹은 몰랐다고 해서 뒤틀리고 바뀔 수 없는 것으로 그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것 또한 수행에서 알아지는 과정일 뿐입니다. 글: 도이, 연방죽선원 약수연수행처 상임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