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산 2대 명찰 불광선사에 마조를 기리는 건물 없어
마조 도일(馬祖 道一, 709-788)선사의 대표적인 유적지는 그의 고향에 있는 사천성 시방시의 나한사(羅漢寺)와 20대에 정진한 안휘성 천주산 불광선사(佛光禪寺 옛 마조암))와 30대 초반(741년)에 회양선사를 만나 깨달음을 얻은 호남성 남악 형산의 복엄선사(福嚴禪寺), 그리고 서당 지장과 백장 회해, 남전 보원 등 초기제자를 길러냈던 강서성 감주시 감현 공공산 보화사(寶華寺 옛 서산당), 강서성 남창 우민사(佑民寺 옛 개원사) 등등이다.
순례일행과 내가 먼저 들렀던 곳은 천주산 불광선사였다. 승찬대사 편에서 잠시 얘기했지만 천주산은 삼조 승찬이 도신에게 법을 주었던 삼조사가 자리하고 있는 ‘웅장하지 않은 봉우리가 없고, 기이하지 않은 바위가 없으며, 깊지 않은 동굴이 없다’는 명산 중에 명산.
“불광선사는 삼조사와 더불어 천주산의 2대 명찰 중 하나입니다.”
불광선사 스님이 자랑 삼아 하는 말이었다. 불광선사 역시 조감도를 그려놓고 대대적으로 복원 중이었는데 순례자로서 안타까운 점은 어디를 보아도 마조선사를 기리는 건물이나 진신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나마 마조가 정진했던 동굴인 마조동(馬祖洞)이 보존되고 있어 다행이었다. 원래 흑호동(黑虎洞)이라 불리던 마조동은 불광선사 머리맡에 있는데, 목탁 형상의 바위에 가평관(嘉平館)이란 글씨가 음각되어 있었다. 수행자에게 동굴이란 두타행의 장소로서 사천성 나한사에서 출가한 마조도 천주산으로 내려와 흑호동을 찾아 들어 처절한 수행을 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마조가 수행방법으로 두타행을 선택한 것은 신라왕자 출신의 구법승 무상(無相)의 영향이 컸을지도 모른다. 사천성 시방현 나한사로 8세에 출가하여 15세 전후까지 고향 땅 절에서 살았던 마조가 자신보다 20세 연상인 무상을 만났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명나라 말기에 편찬한 <마조어록>에는 마조가 당화상(唐和尙, 處寂)의 제자로 돼 있지만,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종밀(宗密 780-841)은 마조가 무상의 제자라고 기록하고 있음이다. 어쨌든 당화상의 명성이나 무상의 두타행은 어린 마조에게 큰 감동을 주었을 터이다.
신라왕자 출신 구법승 무상의 철저한 두타행 마조에 영향
무상은 철저한 두타수행자였던 것이다. 천곡산 바위 밑에 살면서 머리를 긴 채 누더기가 헤지면 풀잎으로 옷을 삼았고, 며칠씩 선정에 들었다가 탁발한 식량이 떨어지면 흙을 먹기도 했다. 그런 그를 맹수들이 지켜주었고 사냥꾼의 화살도 짐승 형상의 그를 비껴 날았다 하고, 그는 천곡산을 내려와서도 지붕 있는 집을 피해서 묘지나 숲속에서만 지냈다고 한다.
무상의 두타행은 당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고행이었으므로 사천성 일대의 출가자들에게 소문이 났고, 나한사 사미승이던 어린 마조도 ‘신라에서 온 무상선사처럼 나도 저렇게 수행해야지’ 하고 발심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흑호동에서 10여 년 간 무상처럼 수행하던 마조의 두타행도 곧 천주산 주변 사람들을 움직였던 것 같다. 마조에게 감화를 받은 원주민들이 흑호동 옆에 절을 지어 마조암이라고 이름 짓고, 흑호동을 마조동이라 부르게 됐던 것이다.
이후 마조암은 유서 깊은 수행도량이 된다. 명나라 때 관지(慣之) 국사가 찾아와 오랜 동안 수행했고, 만력(萬曆) 25년(1597)에는 달관(達觀)대사가 자신을 흠모하는 진사 오응빈(吳應賓)과 완자화(阮自華)의 도움으로 마조암을 크게 중창했다고 한다.
마조암이 불광선사로 바꿔진 까닭도 흥미롭다. 오응빈과 완자화가 신종(神宗)에게 마조암을 중창했다는 상소를 올린 뒤였다. 신종은 불광(佛光)이 대지를 환히 비추는 가운데 황후가 아들을 해산하는 꿈을 꾸게 된다. 신종은 현몽이라 여기고 마조암을 불광사로 봉하는 한편 대장경을 하사한다. 그러자 오응빈은 <불광사 선불도량기(佛光寺選佛道場記)>를 편찬하고, 완자화는 마조동 입구에 가평관이라는 편액을 단다.

그러나 명나라 말 농민봉기군이 천주산에 들어와 명군과 대항하면서 절과 많은 장경들은 불타버린다. 그러다가 청나라 순치(順治) 10년(1653)에 부총병이었던 양대용(梁大用)이 불광사를 복원하지만 다시 함풍(咸豊) 10년(1860)에 청군과 태평군의 전투로 절은 파괴되고 만다.
이런 이유로 불광사는 폐사가 돼 버려져 있다가 1933년 묘고(妙高)스님이 터를 찾아내어 조그만 암자 규모로 절을 지어 유지했고, 십여 년 전부터 너댓 명의 스님이 머물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변했다는 것이 젊은 스님의 설명이다.
마조가 산문을 연 곳은 한무제가 말을 매던 곳
절에서 무료로 나눠준 얇은 홍보책자를 다시 펼쳐보니 보니 청나라 때 마경(馬敬)이 쓴 <마조사(馬祖寺)>라는 시가 새삼 눈에 띈다. 그는 속성이 마씨(馬氏)인 마조가 자신의 선조라는 생각으로 마조사를 찾아 감회에 젖었을 것이다.
마조가 산문을 연 곳은
한무제가 말을 매던 곳
기세가 장관이고
절색의 선경일세
땅은 소나무와 삼나무에 가려 늙어 있고
봉우리 높아 일월도 시간을 맞추지 못하는데
그 속의 정취는
아무나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라네.
馬祖開山處 武皇駐馬時
氣鍾舒?勝 門抱洞天奇
地僻松杉老 峰高日月遲
마조가 천주산을 떠나 남악 형산의 전법원(傳法院)에서 회양을 만난 것은 741년으로 회양(677-744)이 입적하기 4년 전이었다. 마조가 회양을 만나 깨닫는 장면은 <마조어록> 첫 페이지에 나온다.
강서 도일선사는 한주 시방현 사람이다. 성은 마(馬)씨이며 고향의 나한사로 가 출가했다. 용모가 기이하였고 소처럼 느리게 걸었다. 또한 눈빝은 호랑이 같았다. 혀가 코를 덮을 만큼 길었고, 발바닥에는 법륜 무늬 두 개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자주(資州) 당화상에게 머리를 깎았고, 투주(渝州) 원율사(圓律師)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당 개원(開元, 713-742) 연중에 형악의 전법원에서 좌선하고 있을 때 남악 회양을 만났다. 회양은 마조가 법기(法器)임을 알고 물었다.
“그대는 왜 좌선을 하고 있는가.”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자 회양은 부근에 있던 벽돌을 하나 들고 갈기 시작했다. 마조가 물었다.
“벽돌을 갈아서 무엇을 하실 겁니까.”
“거울을 만들까 하네.”
“벽돌이 거울이 될 리 있습니까.”
이때 회양이 일갈했다.
“벽돌이 거울이 될 수 없듯 좌선으로는 부처가 될 수 없다!”
“어찌해야 합니까.”
“소가 수레를 끄는데 수레가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때는 수레를 때려야 하겠는가, 아니면 소를 다그쳐야 하겠는가.”
마조가 대답을 못하자 회양이 다시 말했다.
“그대가 지금 좌선을 하고 있는 것인지, 좌불(坐佛)을 익히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군. 혹시 좌선을 익히고 있는 중이라면 선이란 결코 앉아 있는 것이 아니며, 혹시 그대가 좌불을 익히고 있는 중이라면 부처는 원래 정해진 모습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머무름이 없는 법에서는 응당 취하거나 버리지 않아야 하네. 그대가 혹 좌불을 흉내 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행위와 다름없네. 보잘것없는 앉음새에 집착한다면 정작 깊은 이치를 깨닫지 못할 것일세.”
회양의 가르침을 들은 마조는 마치 제호(醍醐)를 마신 듯하여 절하며 물었다.
“마음가짐을 어떻게 하면 무상삼매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지금 심지법문을 익히고 있는 것은 마치 스스로 씨를 뿌리는 것과 같고, 내가 그 법의 요지를 말해 주는 것은 마치 하늘이 내려주는 단비와도 같은 것이네. 그대에게 이미 기연(機緣)이 닿아 있으므로 반드시 도를 보게 될 걸세.”
“도가 모습(色相)이 아니라면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심지법안(心地法眼)으로 도를 볼 수 있지. 무상삼매도 마찬가지라네.”
“거기에도 성주괴공(成住塊空)이 있습니까.”
“변화하는 바탕에서 도를 보려 한다면 도는 결코 보이지 않을 걸세. 자, 나의 게송을 듣게나.”
심지는 모든 종자를 머금어
촉촉한 비를 만나면 어김없이 싹이 튼다
삼매의 꽃은 모습 없는데
무엇이 파괴되고 또 무엇이 이루어지랴.
心地含諸種 遇澤悉皆萌
三昧華無相 何塊復何成
이에 마조는 문득 개오하고 마음이 초연해졌다. 이후 마조는 회양을 10년간 시봉하니 날로 그 경지가 깊어갔다.
마조 깨우치기 위해 벽돌갈던 회양의 단심 감동적
<마조어록>의 이 장면은 7대 조사인 회양이 8대 조사가 되는 마조에게 심인(心印)을 전해주는 이야기다. 실제로 남창 복엄선사에 가면 회양이 마조를 깨우쳐주기 위해서 벽돌을 갈던 마경대(磨鏡臺)가 있는 것이다.
<마조어록>은 계속된다.
일찍이 육조 혜능이 회양에게 말했다.
“인도의 반야다라가 말씀하기를 ‘그대의 발 아래서 망아지 한 마리가 나와 세상 사람들을 밟아 죽일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마조를 두고 한 말씀이었을 터이다.
마조동굴에 들어가 보니 어둑하고 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옆으로 흐르는 개울물의 습기가 동굴 안에 들어차 있기 때문이었다. 동굴 안에 조악한 불상들과 촛대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는 기도의 장소로 사용하고 있는 듯했다.
그때 나는 천하의 마조선사가 정진했던 동굴치고는 관리가 너무 허술하여 잠시 우울했던 것 같다. 안내하는 젊은 중국스님도 마조선(馬祖禪)의 성지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나와 순례일행이 왜 마조동을 찾아와 참배하는지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에게서 들을 수 있는 것은 마조가 10여 년을 마조동에서 수행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마조는 마조동을 떠나 회양을 만나 깨달음을 얻은 뒤 천보(天寶) 원년(742)에 건양(建陽, 지금의 복건성 건양현) 불적령 불적암으로 내려갔다가 천보 2년(743)에는 임천(臨川, 지금의 강서성 임천현) 서리산(西裏山)으로 옮겨갔고, 다시 천보 4년(745)에 남강(南康, 지금의 강서성 남강현) 공공산으로 가 28년 동안 머물렀다. 이후 말년에는 종릉(鍾陵; 옛 홍주, 현 남창) 개원사(현 우민사) 주지로 부임하여 교화를 폈다.
회양은 제자인 마조가 강서에서 교화를 편다는 소문을 듣고 제자들에게 물었다.
“도일이 과연 대중을 위해서 법을 펴고 있을까.”
제자들이 말했다.
“벌써부터 대중을 위해 법을 펴고 있습니다.”
회양이 말했다.
“도대체 소식을 전해오는 사람이 없구나.”
회양은 곧 제자를 한 사람 마조에게 보내면서, 그가 법문하거들랑 다만 ‘어떻습니까’만 묻고 난 뒤, 그가 하는 말을 잘 기억했다가 돌아오라고 일렀다.
이윽고 마조에게 간 제자는 회양이 하라는 대로 물었다. 그러자 마조가 말했다.
“절에서 보낸 세월이 어언 30년, 이제 소금이랑 된장 걱정은 겨우 덜었네.”
제자가 돌아와서 회양에게 그대로 전했다. 그러자 회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하는 마조의 마음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30년 동안 한 길로 정진하다 보니 수행자로서 겨우 어리석음은 면한 것 같고, 누가 뭐래도 강서에서 교화를 펴는 자신의 살림살이는 스승의 가르침이 밑거름이 됐다는 그런 하심(下心)이 아닐까.
아무튼 교화를 펴는 마조의 살림살이는 눈부신 광휘 같은 것이었다. 서당(西堂, 738-817)과 백장(百丈, 749-814) 그리고 남전(南泉, 748-834)이란 세 사람의 뛰어난 제자들이 마조회상을 더욱 빛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들 세 사람은 스승 마조를 따라 달맞이를 나갔다. 달이 두둥실 뜬 밤이었다. 마조가 말했다.
“바로 이런 때는 어떤가.”
세 사람 중에서 연장자로서 서당이 먼저 말했다. 13세 때 임천 서리산에서부터 마조를 시봉해온 서당이었다.
“공양에 안성맞춤입니다.”
백장도 말했다.
“수행에 안성맞춤입니다.”
그러나 남전은 아무 말 없이 옷깃을 휙 떨치며 물러갔다. 마조가 말했다.
“경(經)은 서당 지장(地藏)의 것이고, 선은 백장 회해(懷海)의 것이다. 오직 남전만이 물외(物外)에 초연하구나.”
당시는 마조 문하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서당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당선(西堂禪)은 중국보다는 한국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바 가지산 보림사의 개산조 도의(道義), 실상산 실상사의 개산조 홍척(洪陟), 동리산 태안사의 개산조 혜철(惠徹) 등과 사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백장은 율원으로부터 선원을 독립시키어 선원청규를 제정하는 등 큰 업적을 세운다. 또한 백장선(百丈禪)은 황벽(黃檗)에서 임제(臨濟)로 이어져 더욱 유명해지고, 남전 역시 들판으로 나가 마소처럼 중생을 이롭게 하라는 이류중행(異類中行)의 독특한 선풍을 형성하여 수백 명의 회상을 이루며 조주(趙州)라는 불세출의 제자를 두게 된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백장선이나 이류중행 하라는 남전선(南泉禪)에 있어서 차나무를 기르고 찻잎을 따는 일도 수행자들에게 주요한 일과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마조가 제자를 격려하면서 시자더러 차를 주도록 하는 장면이 <마조어록>에도 실려 있다. 이는 당시 수행자들이 차를 다반사로 마셨다는 방증이 아닐까. 4조 도신대사 이후 선원은 농선쌍수(農禪雙修)의 자급자족이 원칙이었으니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당연히 차나무도 재배했으리라고 추측되는 것이다.
<마조어록>에 차 한 잔이 나오는 부분은 이렇다.
늑담의 유건(惟建) 선사가 어느 날, 법당 뒤에서 좌선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마조는 유건의 귀에다 대고 입김을 두 번 내뿜었다. 유건은 선정에서 깨어나 마조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바로 다시 정에 들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마조는 곧 시자를 시켜 유건에게 차 한 잔을 가져다주도록 했다. 그러나 유건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획 일어나더니 곧장 그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건을 포함하여 마조의 입실 제자는 모두 139 명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일종(一宗)의 종주(宗主)를 이루었다고 하니 마조의 가르침이야말로 천하의 선문(禪門)을 환하게 밝혔던 빛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중국 선종의 오엽(五葉)이 활짝 피어나고 그 열매가 맺어지도록 무량한 빛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마조의 경사스러운(?) 입적이 이해가 된다. 마조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낮에는 일면불(日面佛)이 되고 밤에는 월면불(月面佛)이 된다고 자신의 살림살이를 축복했던 것이다. 입적 전후의 장면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정원(貞元) 4년(788) 정월, 마조는 건창의 석문산을 올랐다. 숲속을 가볍게 거닐다가 동굴이 허물어져 평평해진 것을 보고 시자에게 말했다.
“다음 달 나의 육신은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예언대로 그 날이 되자 마조는 몸져누웠다. 원주가 와서 물었다.
“스님,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일면불! 월면불!”
드디어 2월 초하루가 되자, 마조는 깨끗한 물로 목욕을 마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했다.
당 헌종(憲宗)은 원화(元和) 연간(806-820)에 시호를 대적(大寂)선사, 대장엄(大莊嚴)이란 탑명이란 내렸다.
茶提 정찬주(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