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내 장식한 붉은 깃발도 비에 젖어가고
경내를 장식한 붉은 깃발에도 비가 젖고 있다. 자풍선서(慈風扇瑞), 불광보조(佛光普照), 수희공덕(隨喜功德) 등등 네 글자의 법어(法語)나 혜능대사의 게송이 적힌 깃발들인데, 예전에는 풍번(風幡)이라 불렸던 장식물이다. 혜능대사가 광효사에 처음 들어섰을 때 풍번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던 것 같다. 광효사는 이른바 비풍비번(非風非幡)의 화두가 탄생한 현장이기도 하다.
혜능이 홍인의 법을 이어받았다는 소문은 이미 남쪽 광주 땅에도 널리 퍼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법성사(오늘의 광효사)의 주지였던 인종(引宗)법사도 혜능의 전법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때 인종은 법성사를 찾아온 봉두난발의 사내가 혜능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 마침 인종은 <열반경>을 강의하고 있다가 바람에 펄럭이는 풍번을 보고는 대중에게 질문을 던졌다.
“바람이 움직이는가, 깃발이 움직이는가.”
어떤 학인은 바람이 움직인다 하고, 어떤 학인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하며 서로 다투었다. 대중 사이에서도 두 패로 갈렸다. 이윽고 두 학인이 강주인 인종에게 와서 증명해 주기를 청했다. 그런데 인종은 자신이 없어 망설였다.
그때 혜능이 인종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非風非幡).”
인종이 혜능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움직이는 것이오.”
“스님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인종은 소문으로만 듣던 혜능이 아닐까 의심했다.
“오래 전부터 황매의 가사와 법을 전수한 분이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혹시 당신이 아니십니까.”
“과분하신 말씀입니다.”
그제야 인종은 혜능에게 절을 하고 예를 갖추어 홍인에게 받은 의발을 보여 달라고 청했다. 혜능은 흔쾌히 의발을 보여주었다. 법열에 잠긴 인종은 혜능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며 말했다.
“오조께서 부촉하실 때의 가르침은 어떠하셨습니까.”
“특별한 가르침은 없었습니다. 견성을 당부하셨을 뿐 선정해탈은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뿌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원한 것이고, 또 하나는 변화하는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성은 영원하지도 변화하지도 않는 것이므로 결코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인종은 합장하며 기뻐했다.
“제가 경을 강의하는 것은 마치 깨어진 기왓장과 같고 당신의 말씀은 순금과 같습니다.”
비로소 혜능은 삭발과 수계 의식을 가졌다. 676년 정월 15일에 머리를 깎고, 2월 8일에 지광(智光) 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아 비구가 되었다.
혜능이 계를 받은 계단(戒壇)은 원래 송나라(420-447) 때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삼장이 만든 것인데,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훗날 육신보살이 여기서 계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곳이었다.
고보리수 아래 서니 옛 천축승 예언이 놀라울 뿐
대웅보전 뒤로 가보니 실제로 혜능대사가 계를 받고 법문하던 장소에 오래 된 보리수가 있고, 대사의 머리카락을 봉안한 8각7층 전탑인 예발탑(瘞髮塔)이 있다. 순례 일행은 예발탑 앞에서 혜능대사를 친견한 듯 참배를 한다.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맑은 차 한 잔을 올릴 텐데 아쉽다. 고보리수(古菩提樹)도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잎이 무성한 고보리수를 보고 있는 동안 신심이 솟구친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었으므로 보리수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이 보리수는 지약(智藥)삼장이 양무제 원년(502)에 서천축에서 뱃길로 들어올 때 가지고 온 여러 그루 중 한 나무라고 한다. 지약삼장은 단순히 보리수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모시듯 중국에 들여왔으리라. 그때 지약삼장은 계단 옆에 보리수 한 그루를 심으면서 “앞으로 170여 년 뒤에 육신보살이 이 보리수 밑에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설하여 무량한 중생을 제도할 것이니, 그는 진정 부처님의 불심인(佛心印)을 전하는 법주(法主)이니라.”고 예언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양나라 말기에 무제의 초청으로 서천축에서 온 진제(眞諦)삼장도 ‘120년 후에 육신보살이 이 나무 밑에서 설법하시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혜능대사의 출현을 알리는 천축승(天竺僧)들의 한결같은 예언이 놀랍고 신비할 뿐이다.
조당(祖堂)에는 혜능대사의 진신상(眞身像)이 봉안돼 있는데, 등신불인 진신육상(眞身肉像)은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예발탑보다는 마음에 격동되는 바가 적은 것 같다. 빗줄기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조당을 서둘러 나온 것도 바로 그러한 까닭이었을 터이다.
다만 광효사 참배를 마치려고 하는데, 철탑이 하나 눈길을 끈다. 원래는 각층마다 천불이 조각된 7층탑이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 있는데도 예사롭지가 않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천불은 천 분의 부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음을 천(千)이라는 큰 숫자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철탑이 당나라 때 조성된 것이라고 하니 그때 벌써 대승불교가 풍미했음을 짐작케 한다.
아무튼 혜능대사의 법은 광효사를 기점으로 맹렬하게 퍼져나간다. 광효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고찰 육용사(六榕寺)도 혜능대사가 잠깐 머물렀다 감으로 해서 선찰의 역사가 이어진다. 송나라 때 혜능대사의 목조상을 조성한 바 있는데, 지금도 그 육신보살상이 육조당(六祖堂)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육용사는 남조시대인 479년에 창건되었고 그때는 보장엄사(寶莊嚴寺)라 불렸다고 한다. 이후 남한(南漢) 때 장수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송나라 시인 소동파가 경내에 있는 여섯 그루의 용수(榕樹; 보리수)를 보고 육용(六榕)이란 휘호를 쓴 이후부터 육용사라고 불리게 됐다고 한다.
거센 빗줄기도 한 생각 돌리면 혜능의 법우인 것을
거센 빗줄기지만 순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 광효사를 나온 일행 모두가 육용사로 향하고 있다. 내리는 비를 불청객이라 하지 않고 혜능대사의 법우(法雨)라고 한 돌리니 순례의 여정이 더 즐겁다.
육용사의 화탑(花塔)이 반갑게 손짓하며 맞아준다. 나는 광주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다는 화탑으로 올라가지 않고 바로 육조당으로 간다. 우산을 폈지만 바지는 이미 젖어버렸다. 육조당에 걸린 조계법유(曹溪法乳), 일화오엽(一花五葉) 같은 편액과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고 쓴 주련을 보는데, 일행 중 누군가가 ‘저기 소동파가 있다’고 소리친다. 흰 돌로 조각한 조금은 왜소한 듯한 소동파상이다. 생전의 일화대로 자만심이 가득하여 데데한 표정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이다. 불심이 깊은 신도처럼 아상(我相)이 사라진 얼굴이다. 천재의 시인 소동파가 불교로 귀의한 사연도 백낙천과 비슷하다.
소동파가 형주에 있을 때였다. 그곳 옥천사(玉泉寺)에 고명한 승호(承皓)선사가 주석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소동파가 한가한 날을 잡아 관리들을 대동하고 찾아갔다. 옥천사 산문에 이르렀을 때 소동파를 맞이하는 승호선사가 먼저 정중하게 물었다.
“대관의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칭(秤)가요.”
“칭가라니요.”
소동파는 승호선사의 반문에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대답했다. 승호선사가 의아해하자 다시 오만불손하게 말했다.
“나는 천하의 선지식을 저울질하는 칭가란 말이오.”
칭이란 저울이란 뜻이므로 자기가 선지식의 법력을 달아본다는 거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잠시 후, 승호선사가 천둥소리 같은 할을 했다.
“할!”
그러고는 놀란 소동파에게 바로 물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몇 근이나 되는가요.”
그러나 소동파는 ‘할’이 몇 근이나 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소동파는 여지없이 승호선사의 법력에 자존심이 상하고 말았다.
또 얼마 후, 소동파는 노산(鷺山) 귀종사(歸終寺) 불인 요원(佛印 了元)선사를 찾아가서도 당했다.
“화상의 사대(四大; 육신)를 빌어 의자로 삼고자 합니다.”
불인선사가 웃으며 답했다.
“사대가 공(空)한데 무엇을 가지고 의자를 삼는단 말이오.”
소동파는 감동하여 불인선사에게 옥대를 바쳤다.
그러자 불인선사가 말했다.
“일체 사량분별을 쉬시오. 다 쉬시오.”
이후에도 소동파는 노산 흥룡사(興龍寺)로 찾아가 상총(常聰)선사에게 설법을 청했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고 말았다.
“어찌 그대는 무정설법은 듣지 못하고 유정설법만 들으려고 하는 것이오.”
상총선사와 헤어진 소동파는 말을 타고 한참을 달리다가 폭포 밑에 이르러 문득 마음이 열렸다. 깨달음이 왔던 것이다. 소동파는 그 자리에서 오도의 노래를 불렀다.
산하대지가 대법문임을 소동파여 이제 아셨는가
시냇물 소리는 장광설 법문인데
산색이 어찌 청정법신이 아닐까
밤새 읊는 팔만사천 오도송을
다른 날 무슨 수로 이웃에게 전할까.
溪聲便是長廣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與似人
소동파가 절에 와 굳이 육용이란 휘호를 쓴 것도 불심에서 연유한 듯하다. 여섯 분의 부처님을 참배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지 않았을까. 용수(榕樹)란 천축에서 건너온 보리수로써 부처님이 그 그늘에서 깨달음을 이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소동파의 육용이란 휘호 글씨가 더욱 정갈하게 보인다.
茶提 정찬주(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