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 밀양역 역사를 빠져나오니 불벼락 같은 땡볕이 마치 정수리를 정으로 쪼는 것 같은 폭염의 날씨다. 기차 객실 안에서 선선한 온도에 잘 적응돼 있던 몸은 마치 이상 반응을 일으키듯이 일순간 땀방울을 짜내기 시작을 한다. 이날 밀양은 폭염경보가 발동되고 있었다. 땡볕과 복사열이 십자포화처럼 쏟아지는 밀양역 역사 앞마당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갈등 중이다.
밀양에 온 이유는 본래 미륵전 아래 물고기들이 돌로 변해 첩첩이 쌓였다는 만어석이 있는 신험함 가득한 만어사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예까지 와서 어찌 조선 제일의 누각이라는 영남루를 지나칠 수 있으랴.
역사 앞마당을 빠져나와 택시 승차장에서 택시에 올라탄다.
“영남루요.”
“밖에 날씨 정말 덥지예?”
“네. 정말 잠시 불지옥을 맛 본 것 같습니다.”
시원한 택시 안에 앉아 있으니 금방 지옥에서 천상으로 올라 온 느낌이다. 천상세계는 이런 느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밀양 시내의 풍경은 마치 시간이 정지한 공간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그만큼 밀양은 발전이 더딘 지방 도시이다. 이렇게 과거의 모습을 간직한 도시의 길은 걸어서 가는 것이 제격일 것이다. 밀양역에서 영남루까지 거리는 2km가 조금 넘는 아주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이다.

영남루로 올라가는 입구의 계단. ‘갈 지’자형 계단은 장애인을 위한 배려가 엿보인다.

영남루로 들어서는 사주문 앞에서 본 풍경. 영남루는 옛날 영남사 사찰이었다.

영남루의 전경. 가운데가 영남루 좌측 월랑이 능파당 우측 월랑이 침류각이다.

조형미 빼어난 계단식 기와로 이어지는 우측 월랑인 침류각의 모습.
밀양강을 가로지르는 밀양교를 건너자마자 택시에서 내리니 바로 영남루 입구이다. 영남루로 오르는 갈지(之)자 형의 계단부터 운치가 가득하다. 보기 좋은 계단 길을 오르자니 얕은 석축 위로 사주문(四柱門)과 함께 영남루가 드러난다. 그 앞의 커다란 안내판에 영남루에 관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영남루는 보물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신라 경덕왕 때 창건한 영남사가 폐사가 되고 흔적만 남은 자리에 고려 공민왕 때 밀양군수 김주가 새로 지어 옛 절 이름을 따서 영남루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남루는 조선 세조와 중종에 들어 크게 중건을 하였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다 타버리고 말았다. 인조에 중건을 하고 순조 때 다시 불에 타고 헌종 때 다시 개창하게 되는데 이런 우여곡절을 안고 버텨온 누각이 지금까지 남은 영남루 건물이다. 조선후기의 건축미가 돋보이는 건물로 국내 제일의 누각이라는 평을 받고 있기도 하다.
사주문 안으로 들어서서 영남루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과연 국내 제일을 누각이라는 평이 무색하지 않다. 중앙으로 영남루가 배치되어 있고 좌우측으로는 부속건물이 날개처럼 월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우측의 침류각은 계단식 지붕으로 이어지는데 그 모습이 매우 수려하다. 나무계단을 올라 영남루 안으로 들어선다.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쪽마루는 평평한 곳은 닳고 옹이가 있는 곳 그대로 남아 마치 양각을 해 놓은 것 같아 걸을 때 마다 기분이 오묘하다. 걸음을 옮길 때 마다 그 느낌은 200년의 시공을 공존하는 느낌이라고나 해야 할까.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세월을 경험하는 영남루의 마루이다.

구한말 명필 성파 하동조가 쓴 영남루 현액. 좌우측으로 두 개의 현액이 더 걸렸다.

영남루로 들어서려면 먼저 이 우측 월랑 능파당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고색창연한 영남루의 2층 누각 내의 모습. 닳은 마루를 걸으며 시공을 교류하다.

밀양부사 이인재의 아들 이증석이 열 살 때 쓴 영남제일루 현액.
누각 마루의 중앙에 이르니 천정에 커다란 현액이 눈에 들어온다.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 라고 쓴 글씨가 기운이 넘쳐 보인다. 이는 헌종 당시 밀양부사 이인재의 아들 이증석이 열 살 때 쓴 글씨라 하니 가히 천재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영남제일루 현액 옆으로 강성여화(江城如畵)라고 쓰인 현액을 비롯해 영남루를 노래한 시문이 적힌 여러 현액을 만나볼 수 있다.
다시 걸음을 옮겨 누각의 난간으로 다가 선다. 솔솔 강바람이 시원하다. 그리고 펼쳐지는 밀양강과 밀양 시내의 풍경. 발아래로는 영남루의 대숲이 싱그러움이 가득하고 밀양 시내를 말굽 모양으로 굽이쳐 흐르는 밀양강의 풍경이 그만이다. 그래서 수많은 시인묵객에게 이 영남루가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곳에 와보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2층 누각의 난간에서 시원한 강바람과 함께 기막힌 조망을 잠시 즐기노라니 어느새 등골을 타고 흐르던 땀이 식는다.

천정의 보에 걸려있는 시문이 쓰여 진 현액들. 영남루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다.

단청을 한 천정의 보 사이의 벽면에는 재미있는 신선도가 그려져 있다.

영남루 우측 월랑으로 이어지는 계단. 현재 오래되고 낡아 진입금지다.

영남루 누각에서 내려 본 영남루 경내 풍경. 맞은편이 천진궁이다.
아쉽게도 우측 월랑인 침류각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노화하여 더 이상 들어 설 수 없게 막아 놓았다. 찬찬한 걸음으로 누각을 돌아보고 다시 영남루 앞마당에 선다. 그리고 잠시 짧은 생각에 잠겨본다. 옛날 그 옛날 영남사가 남아 지금 이런 모습과 함께 불보살을 모신 당우들이 남아 있다면 또 얼마나 대단한 명찰이었을까? 그리 됐다면 아마도 풍광 좋은 10대 명찰 안에 꼽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짧은 상상의 나래를 접고 영남루 맞은편의 천진궁으로 들어선다. 천진궁은 기와로 이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고 외삼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당이 틀림없어 보인다. 외삼문 안으로 들어서니 참도가 나타난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사당이다. 참도 끝 전각에 천진궁이란 현액 걸려 있다. 사당 인듯한데 왜 궁궐을 의미하는 궁자가 쓰인 것일까? 그 궁금증은 10초도 걸리지 않아 풀린다. 전각 안을 들여다보자니 중앙에 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그 위로 단군시조의 초상이 걸려 있다. 그리고 좌우 벽면에는 단군 이래 역대 8왕조 시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좌측 벽에는 부여, 고구려, 가야, 고려의 시조가, 우측 벽에는 신라, 백제, 발해, 조선의 시조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니 가히 궁궐 중에서도 최상의 궁궐이 아닐 수 없다.
이 천진궁에도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가 배어있다. 천진궁은 원래 조선 현종 6년에 단군을 비롯한 여덟 왕조의 위패를 모시는 공진관의 부속 건물로 지었는데 훗날 지금의 천진궁으로 위패를 옮겨 봉안하며 객사를 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일제 헌병대가 위패를 땅에 묻고 이 건물을 감옥으로 사용하면서 민족의 수난사와 함께하게 된다. 이는 극악한 일제의 정신문화 말살 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영남루 누각 난간에서 바라 본 대밭과 그 아래로 굽이쳐 흐르는 밀양강의 풍경.

영남루는 밀양시민들에게 사랑을 받는 훌륭한 쉼터이다. 부러움을 느껴본다.

천진궁의 외삼문인 만덕문. 천진궁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됐다.

외삼문으로 들어서니 천진궁이 나타난다. 일제강점기 수난사가 배인 천진궁이다.
광복이 되고 1957년에 밀양 유지들의 노력으로 대대적인 보수와 함께 원래 대덕전이던 이름을 지금의 천진궁으로 고쳐 부르게 된다. 그러므로 천진궁은 민족 수난사를 딛고 민족 기상을 바로 세우는 의지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아픈 역사를 들여다보고 전각 우측의 단군상 앞에서 참배를 올린다. 다시는 이 같은 통한의 역사는 되풀이 하지 않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어 본다. 영남루 뒤편으로 빠져 나오니 무봉사라는 사찰 안내판이 나타난다. 이제 발걸음은 무봉사로 옮긴다. 나중의 느낌이지만 만어사를 포기하고 이곳 영남루 일대를 둘러본 일은 참 잘한 선택이라고….

천진궁 내의 중앙에는 단군시조를 위한 제단과 초상이 봉안 되어 있다.

천진궁의 좌우측 벽면에는 단군 이래 여덟 왕조 시조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천진궁 전각 우측에 조성된 단군시조 석상. 뼈아픈 과거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