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릉의 곡장 뒤에서 내려다 본 풍경. 수락산과 불암산 사이에 있는 덕릉고개도 바로 이 덕릉에서 유래된 이름이 되겠다.
덕릉고개. 노원구 상계동에서 남양주시 별내면을 잇는 고개로 수락산과 불암산으로 이어지는 낮은 능선의 고개가 바로 덕릉고개이다. 이 덕릉고개에는 해방 전후까지 나라의 태평과 무사를 빌던 도당집이 있어서 당고개라고도 불리었다. 그래서 지하철 4호선 종착역 이름이 당고개역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덕릉고개는 어찌하여 붙여진 이름일까?
고개 이름에 덕릉이라고 붙여져 있으니 분명 능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알아보니 바로 이 고개 아래 수락산 자락에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묘가 있고 덕릉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 있는 흥국사가 바로 이 덕릉의 왕실사찰이자 능침사찰이다. 이미 수차례 다녀왔던 절이지만, 흥국사를 덕릉과 함께 찾아보기로 하고 다시 발길을 옮겼다.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종착역인 당고개역에서 내려 역사를 빠져 나왔다. 전날 눈이 제법 내리고 나서인지 은설의 불암산이 눈부시게 다가온다. 단단히 챙겨 입었는데도 늦겨울 칼바람이 옷깃 틈새로 파고들어 싸늘한 냉기로 살갗을 후벼 파고 있다. 길가 포장마차에서 어묵 세 꼬치와 뜨끈한 국물을 마시고 났더니 조금은 몸이 후끈해진다.

흥국사 일주문의 고색창연한 모습.

흥국사 설법전의 모습. ‘工’ 형태로 된 설법전은 능침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영산전의 모습. 영산전 역시 고색창연함이 느껴지며 전각도 아름답다.
길을 건너서 별내면과 왕복하는 마을버스를 탔다. 이곳 버스정류장에서는 별내면으로 가는 버스만 타면 흥국사를 갈 수 있다.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를 가니 덕릉고개 정상에 이른다. 고개에서 내려와 첫 정류장에서 내렸다. 차내 방송은 흥국사입구라고 알려준다.
흥국사 입구 왼편에 위치한 덕흥대원군의 묘에 먼저 들렀다. 흰 눈이 하얗게 덮인 숲 사이로 조금을 들어가니 하얀 눈이 가득 쌓인 묘역이 나타난다. 먼저 덕흥대원군의 장자이자 선조의 형인 하원군 묘가 나오고 그 위를 걸어 오르자니 대흥대원군의 묘가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3명의 대원군이 있었는데 그 중 제일 처음 대원군이 된 사람이 바로 선조의 아버지인 이초인 것이다.
후사가 없던 명종이 죽자 중종의 일곱 번째 아들인 이초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 균이 즉위 하는데 그가 바로 선조이다. 선조는 왕이 된 후 자신의 아버지인 이초를 대원군으로 추존한다. 그리고 아버지 덕흥부원군이 죽자 그를 왕으로 추존하려고 하지만 신하들의 강력한 반발에 무산되고 만다.

덕흥대원군의 묘의 전경. 선조는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지만 결국 이루진 못했어도 이 묘 만큼은 왕릉의 규모로 조성하였다.

덕릉을 지키고 섰는 무석인의 모습. 이곳은 독특하게도 문석인 석상은 없고 무석인 석상만이 묘를 지키고 섰다.

거북석상을 기단으로 하고 있는 신도비를 볼 수 있다. 신도비만 보더라도 일반 묘와는 다른 모습이다.
결국 왕릉이 되지 못하고 묘로 남게 되자 이에 크게 상심한 선조에게 내시가 묘안을 내는데, 동대문(흥인지문) 밖 숯가게에 사람을 놓아 나무꾼들이 나무 짐을 지고 오거나 숯을 지고 오면 어디서 왔냐고 물어 덕릉을 지나왔다고 말하면 밥과 술을 대접하고 나무 값과 숯 값을 후하게 쳐주면 덕흥대원군 묘가 아니라 덕릉이라고 소문이 날 것이라고 하여 선조는 내시의 묘안대로 숯가게에 사람과 돈을 풀기 시작한다.
그리고 정말 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 했는데 불암산과 수락산뿐만 아니라 영월에서 한강을 따라 나무를 해온 사람들까지도 덕흥대원군의 묘를 덕릉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따라서 민간에서는 자연스럽게 덕릉으로 격상이 되어 지금까지도 덕릉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덕흥부원군묘 덕릉을 돌아보고 다시 버스정류장이 있는 마을 입구로 발길을 옮겼다. 이 마을 이름이 덕릉마을로 흥국사로 가는 입구이기도 하다. 흥국사까지는 약 5백 미터 거리지만 작은 마을도 있고 산길도 호젓해서 걸어가기에 그만이다. 흰 눈 가득 쌓인 숲길을 조금 걷자니 흥국사 일주문이 나타난다. 규모가 제법 웅장한 단청 없이 거뭇한 일주문이 세월을 느끼기에 충분한 모습이다.
일주문을 지나 오르막길을 마저 오르니 흥국사 경내다. 먼저 보이는 건물이 설법전 전각이다. '工'자 형의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조선왕조의 왕실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전각의 모습이다. 이는 이곳 전각들을 지은 사람들이 궁궐에서 파견된 도편수와 목수들 이었기에 전각들이 궁궐의 양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산전의 돌계단. 왕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우아한 모습의 돌계단이다.

육각의 형태를 하고 있는 만월보전은 건축미가 대단히 아름답다.

만월보전 내에 봉안되어 있는 석조 약사좌불의 모습. 영험하다 하여 전국에서 찾고 있다.

흥국사의 범종각. 자연 목재를 그대로 살려 장승의 모습 같은 형상을 조각해 놓았는데 그 모습이 무척 재미있다.
설법전 맞은편은 영산전, 대웅전, 시왕전이 차례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중 대웅전은 지금 한창 복원 보수공사 중이다. 해체복원 보수공사와 실측 그리고 벽화보존까지 함께 이루어지는 공사다.
흥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봉선사의 말사로 599년(신라 진평왕 21)에 원광(圓光)이 창건하고 수락사라 하였는데 1568년 선조가 이곳에 덕흥대원군의 원당(願堂)을 지으면서 흥덕사(興德寺)로 바꿨다가, 1626년(인조 4)에 중건하면서 현재의 이름인 흥국사로 고쳤다. 이름을 흥덕사로 바꾼 선조는 원래 작은 사찰이던 흥국사를 궁궐을 짓는 도편수까지 파견하여 여러 전각들까지 지어가며 크게 불사를 일으키고 자신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능침사찰과 왕실사찰로 삼게 한 것이다.
흥국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이곳에 사용된 목재나 석재 그리고 건물의 양식들을 보면 궁궐에서 사용하는 수법과 많이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찰 전각에서는 볼 수 없는 잡상이 기와지붕 위에 올려져있는 것만 해도 보통 절집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선조가 이곳 흥국사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또한 그의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도 알 수 있는 반증들이다.
능침사찰은 다른 이름으로 조포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포사(造泡寺)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두부를 만드는 사찰을 말한다. 두부는 상하기 쉬운 음식이자 제물이다. 특히나 냉장기술이 별도로 없던 시대이니 궁궐에서 만들어 이동하는 사이에 쉬이 상하기에 왕릉의 능침사찰은 제물로 쓰일 두부를 만드는 별도의 임무를 맡았기에 조선왕조의 능침사찰들은 조포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된 것이다.
약사여래불이 모셔진 육각형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전각 만월보전까지 돌아보고 흥국사를 빠져 나왔다. 하얀 눈이 덮인 불암산이 순백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니 불암산은 부처님 산이 아니던가. 그 하얀 설산이 마치 만월보전의 하얀 약사여래의 모습으로 흥국사를 지긋이 내려다보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