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 폴폴 내리던 날 북한산 둘레 길을 찾았다. 앙상한 겨울 숲의 나무 가지들마다 흰 눈이 하얗게 덮여 있는 설경이 그리워, 검은 기와 대신 하얀 기와를 이고 선 전각들. 그 위로 부처님의 자애로운 미소가 가득 번지고 있을 절집이 그리워 산으로 향하는 것이다.

지하철 불광역에서 내려 구기터널을 향해 걷다보면 북한산 래미안아파트가 나오고 이 아파트 단지 옆을 지나서 공원길로 접어들면 작은 절집 하나를 만나게 된다. 옛날부터 있던 절터에 1947년 김도준 화상이 재건한 절 불광사다.

불광동은 독바위골 이라는 이름도 따로 가지고 있는데 이는 독을 많이 짓던 동네였고, 그 많은 항아리들에 부처님의 백호광명이 반사되자 그 빛을 아군의 거대한 진지로 여겼던 오랑캐들이 놀라서 도망을 치게 되었다는 이야기에서 붙은 이름이 불광(佛光)동이다.

불광사를 빠져 나오면 암벽을 따라 걷는 길이 시작이 되는데 울툴불퉁 화강암이 머리 위에 벌겋다. 한참이나 내릴 것 같던 눈은 이미 그치고 하늘은 말갛다. 돌아보면 시내가 내려다보이고 올려다보면 붉디붉은 화강암 암벽이 당당하게 솟구쳐 있다.

차라리 세상을 내려다보자. 시원하게 펼쳐지는 발아래 세상이 더 볼만 하지 않던가. 이즈음이 불광동 일대를 내려다보는 전망대 구간이다. 세상을 발아래 두고 걷는 탐방로는 잘 정비되어 걷기에 그만이다.

그리고 만나는 또 하나의 절집. 바로 선림사다. 밖에서 보면 제법 규모가 있어 보이는 모습의 절집이지만 새로 들어선 아파트 숲에 가려 왠지 옹색하고 답답해 보이기만 한다. 선림사 입구로 들어서던 길. 그 길에서 처음 만난 광경이 로드킬이었다. 말라비틀어진 채 납작하게 죽거간 뱀 한 마리의 사체.

‘아! 역시 인관과 자연이 부딪히는 곳이면 힘없는 생명은 이렇게 건조될 수밖에 없는 건가 보다’

로드킬을 당한 뱀의 사체가 가리키는 곳은 묘하게도 선림사였다. 선림사 경내로 접어든다. 문명이 만들어낸 콘크리트로 단장된 절집 대웅전의 모습에 아쉬운 감이 없지만은 않다. 삼성각 우측으로 발길을 옮겨 산 계곡 앞에서 마주치던 광경. 얼핏 보기에도 동자승을 무척 닮은 석조물이 쓰러져 누워있는 모습에 당혹감이 일어난다. 불현듯 스치는 생각 하나! ‘누군가가 일부러 이 석조상을 쓰러트려 놓았으면 어쩌나!’이다.

누워있는 석조상을 보니 걱정이 앞선다. 요 근간 정부여당의 불교 폄훼에 이어 훼불 사건이 많이 발생하고 있어서 이다. 선림사 보살님께 물으니 다행이도 훼불 사건은 아니고 지난 여름의 불청객 태풍 곤판스의 짓 이란다. 집중호우로 넘어진 석조물은 사람이 없어 다시 세우지 못하고 있는데 요즘 이곳 절집에는 장정이 없어 사실 일손이 많이 아쉽다는 이야기다.

선림사를 빠져나와 깔끔하게 조성된 롯데 아파트 단지 길을 따라 걷는다. 북한산 숲과 계곡으로 진입하는 길목으로 아파트 단지 사이로 흐르는 인공으로 조성된 개울의 시작 지점이다. 수변에 발파석을 성곽처럼 쌓아 만든 인공 개울이 시작되는 곳은 북한산 계곡의 청정 일급수가 그대로 유입되는데 그 바닥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만 아연실색을 하고 만다.

개울 바닥은 덕지덕지 콘크리트로 얼버무려 놓고 그 위에 자연석을 듬성듬성 쳐박아 놓은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부아가 치민다.

'과연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것일까? 이런 것을 허용해 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일까?' ‘요즘 4대강사업으로 세상이 시끄럽고 그 필요성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국민들이 부지기수인데 어떻게 이런 공사가 가능할까?’ 맑은 물이 흐르는 일급수의 초입에 이런 콘크리트 공사라니….

이 맑은 계곡물은 콘크리트 개울을 따라 기나 긴 구간을 흘러 갈 것이다. 수초 하나 자라지 못하는 바닥, 시멘트로 떡칠한 개울, 얼핏 보기엔 보기 좋게 정돈된 개울인 듯하지만 자연스럽고 친환경적인 건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지금 선진국들은 이런 콘크리트로 덧칠 한 개울들을 걷어내고 자연복원화 작업들이 한창인데, 정작 지금 거꾸로 가고 있는 우리는 어쩔 것인가.

자연은 가장 자연스러울 때 건강하다. 조금만 더 신경 써서 개발했다면 이렇게 참담한 모습으로 느껴지진 않았을 텐데….

아파트촌을 벗어나 진관사를 향해서 걷는다. 산을 인접한 동네들만의 특성인 듯 올망졸망 만들어진 텃밭들이 정겹다. 이런 텃밭들을 따라 걷는 오솔길에서는 가슴 속에 꼼실꼼실 피어오르는 작은 꿈 하나, '자연으로 살자. 자연에서 살자'이다. 이런 작은 소망 하나를 피워 올리며 묵묵히 길을 걷는다. 그렇게 걷다 보면 어느새 진관내동이다. 예전에 이곳으로 산행을 시작할 때는 굽이굽이 달동네를 거슬러 올라갔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이름하여 기자촌. 1969년. 이름처럼 기자들한테 준 혜택의 동네다. 기자들이 떠난 동네에 서민들이 들어와 살다가 그나마 재개발로 인해 모두 철거되고 그 잔해들만 널부러진 삭막한 풍경으로 남았다. 왼쪽으로 돌아보면 무너진 가옥들의 잔해 그득한 동네가 펼쳐지고 오른쪽으로 올려다보면 아름다운 북한산의 연봉들이 거칠게 흰 눈을 덮고 있는 풍광들이 하나 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걷다보면 솔숲 아름다운 쉼터. 예서 잠시 멈춰 하늘을 본다. 맑았던 하늘은 어느새 어둠침침해지고 금방이라도 하얀 눈을 쏟아 부을 표정이다.

기자촌을 지나 진관사로 들어선다. 찾고 싶으면 마음만 내면 언제고 찾아 볼 수 있는 절집이다. 진관사 입구의 ‘보혈다원’이 예전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얼핏 보면 초가집과 닮아져서 보는 눈과 가슴이 따뜻해진다. 아름다운 절집 '진관사'. 비구니 스님들이 계시는 절이라서 그런가? 정말 깔끔하고 단아하고 곱상하다. 수해 전부터 이 근처를 지나칠 때면 반듯이 들르는 절집이 됐다.

진관사를 벗어나 삼천사 입구로 가는 길로 접어든다. 보호수로 지정된 고목들이 늘어서있는 풍경은 서울 근교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풍경이다. ‘이곳 둘레길 구간은 참 볼 것이 많은 구간이로구나!’ 선림사를 지나던 구간에서 치밀었던 부아가 이제야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다.

다시 이어지는 오솔길을 따라 길을 걷는다. 그리고 다시 만나는 마을길. 영락없는 시골길이다. 아직 녹지 않은 흰 눈을 밟으며 걷는 길은 그림 같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북한산의 의상봉능선을 바라보며 산골마을을 관통한다. 밤나무숲으로 이루어진 밤나무골도 지난다. 오는 길에 중간 중간 조선시대의 궁녀와 내시들의 무연고자 묘지들이 보였다. 아무렇게나 누워있던 표지석이나 비석들을 보면서 가늘게 전해지던 연민. 후손을 이을 수 없던 사람들. 그런 그들의 묘지들이 파헤쳐지고 널부러지고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모습에서 느껴지던 연민이었다. 차후 발굴 예정이라니 다행스럽기는 하다.

이곳 밤나무골 길을 걷는 구간 역시 곳곳에 내시들의 묘소들이 보인다. 밤나무골을 지나 북한산성 입구로 가는 길이다.

농가와 농원 사이로 난 길이 목가적이다. 정말로 아름다운 길을 따라 북한산성 입구에 도착한다. 서서히 드리우는 밤 그림자 또렷해지자 다시 눈발이 비추이기 시작한다.

길에서 길을 묻는다. '개발의 길인가 보존의 길인가?' 어떤 길이 옳은 지 어떤 길이 그른지 장담하고 대답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훗날 이 강토와 이 자연의 주인인 후손들에게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은 하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