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그 여름 아침처럼 빗발이 추척거린다. 혼자 걷는 목포항. 호수 같이 잔잔한 항구의 바다 위에 빗방울이 떨어져 작은 파문들을 만들어 낸다.
그때도 이랬었지. 이렇게 빗방울이 만들어낸 수면 위에 작은 원들을 보며 항구를 걸었었지.
짙은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 흐릿한 하늘을 이고있는 목포항이 더욱 애잔하게 다가온다.
사공의 뱃노래가 가물거릴 것 같은 항구를 걸어 여객터미널로 간다. 섬으로 가는 길의 시작은 이곳 목포여객터미널이다.
그때도 목포 앞 바다에 떠있는 섬들이 너무도 보고 싶어 비금도로 가는 차도선에 오른 적이 있었다. 무척이나 느리게 가던 여객선. 사람이 사는 섬이면 다 들러주던 그 여객선. 그 느린 여객선 덕분에 많은 섬들을 좀 더 오래 바라볼 수 있었다. 그 느리게 달리던 여객선이 다시 그립다.
장산도를 거쳐 안좌도, 팔금도를 비롯해 몇개의 섬들을 더 거쳐 비금도로 가던 배. 다시 그 섬들이 그리워 여객터미널 안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배들은 발목이 묶여있다. 풍랑주의보가 발령중이다.
여객터미널을 지나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다. 자연방파제 역활을 하는 고달도가 해안도로와 마주보기를 하고 있다.
비구름을 덮어쓴 유달산이 그림 같다. 그 아래 달동네는 어촌마을.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을 돌아본다. 퇴락한 항구도시는 그 흔적을 골목길 마다 토해내고 있었다.
흐릿한 하늘 아래로 고달도와 목포 앞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어촌마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도 색다르고 또 아름답게 보인다.
유달산에 오른다. 두 해 전 여름. 목포로의 여행. 정말 꿈결처럼 좋았는데.
유달산으로 오르는 길목 마다 조명이 가득했었다. 특히 기억에 남던 풍경이 고하도와 유달산 일등바위였다.
푸른 조명으로 두른 산과 섬의 풍경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각인이 되어 버렸다. 밤에 보는 유달산도 아름답지만 낮에 보는 유달산도 그 못지않게 아름답다.
백두대간을 치달려온 산맥은 가지를 뻗어내려 노령산맥으로 이어지고 다시 호남의 남쪽 바다로 치달려 그 마지막 기운을 모아 솟구쳐 올린 곳이 바로 이 유달산이다.
나는 오늘 그림 같이 아름답던 일등바위가 그리워 유달산을 오르고 있다. 목포의 유달산. 유달산은 목포시민들의 자랑이자 자존심이기도 하다.
높이는 비록 228m로 낮은 산이지만 기암으로 가득하여 그 아름다움이 빼어나고 특히 다도해를 바라보는 조망이 훌륭하다.
유달산을 오르는 길의 시작은 노적봉 앞 유달공원에서부터다.
노적봉을 둘러본다. 노적봉은 이순신 장군이 뛰어난 전략가임을 말해주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노적봉 암봉 위에 볏짙을 쌓아 엄청난 양의 군량미로 위장했고 그 모습에 지레 놀란 왜군들은 냅다 도망을치고 말았으니 충무공 이순신의 기지야 말로 참으로 대단하다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노적봉을 돌아보고 유달산으로 오르는 계단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한다.
특이한 모양으로 가꿔놓은 히말라야시다 옆으로 유달산 입구를 알리는 표지석이 그리고 그 뒤로 노적봉과 목포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순신장군의 동상도 보인다.
동상을 지나 다시 계단을 오르면 만나는 대포 하나. 목포시의 정오를 알려주던 오포대다.
1904년 설치된 이 오포는 1669년에 제작된 것으로 경기도 광주에서 가져온 것인데 그나마 일제강점기 일본이 가져갔다하니 일제의 수탈은 참으로 가관일 수밖에 없다.
오포대 위의 정자 대학루에 도착한다. 목포시와 목포항 조망이 시원하게 펼쳐지기 시작한다.
유달산은 많은 정자들이 가는 길목 마다 자리잡고 있어 가는 걸음에 쉬어가며 내려다보는 풍광이 보기 좋다. 돌계단을 따라 오르다보니 암사면 위에 노래비 하나가 보인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다. 화강암으로 짜여진 노래비 안의 스피커에서는 목포의 눈물이 구슬픈 가락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사아공의 뱃엣노오래~~ 가아물을 거어리이고~~~삼학도오~~ 파도오 깊이 스며어어 드는데에~~ 부우두에 새에악~씨이이~~ 아롱젖은 옷자아아락~~~ 이별에 눈물이냐~ 목포오에에 설움~~~~”
참으로 구성지면서도 서글픈 가락이다. 목포에 대한 사랑과 망국의 설움이 복받쳐오는 듯하다.
구불구불 돌계단을 따라 오른다. 잘깍아 만든 화강암 돌계단. 그리고 화강암 돌난간. 특히 돌난간은 오르는 내내 눈길을 끌었다. 참으로 예쁘다. 참으로 멋스럽다. 기암과 어우러진 돌계단과 돌난간은 이질감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아름다운 돌계단을 따라 대학루에 오르고 다시 유선각에 오른다. 유선각은 유달산의 정자 중에 가장 아름다운 조망을 자랑한다고 한다. 1932년 목포개항 3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는데 태풍으로 무너진 것을 다시 중건하고 세월이 흘러 퇴락한 것을 1973년 다시 개축한 것이다.
유선각은 조망 뿐만 아니라 목포의 또 다른 상징성을 갖고 있는 유서 있는 전각이다. 시원하게 열리는 조망을 바라보며 유선각에서 잠시 머물러 본다. '이럴 땐 시집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간간히 불어오는 해풍을 맞으며 시 한 구절 한 구절을 곰곰이 읽어보고 싶어진다. 길을 나서면 누구나 시인의 마음이 되나 보다.
유선각을 빠져나와 전망대에서 목포의 서쪽 조망을 감상한다. 그리고 다시 도착한 곳이 관운각. 커다란 바위 뒤로 유달산의 아름다운 원경을 만들어내던 일등바위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전망바위에 오르니 아름다운 일등봉의 기암의 바위군들이 펼쳐진다. 참 대단한 풍경이구나.
일등바위 좌측으로 펼쳐지는 다도해의 풍경과 어우러지니 그야 말로 진풍경이다. 바다 풍경이 없는 유달산의 일등봉이었다면 아마도 그 아름다운 느낌은 반감했으리라.
그리고 마주치는 낯 설은 부조 조각상. 일등바위의 직벽의 벽면을 장식한 부조조각상에는 화려한 채색까지 더해 있는 것이다.
두 눈을 부릅뜨고 윗입술을 깨물고 있는 모습이 상당히 위압적인 모습이다. 거기에 온몸 주변으로 피어오르는 불꽃의 형상.
사뭇 위협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조각상 위로 ‘부동명왕(不動明王)’이라고 새겨져 있다.
부동명왕이라. 모습은 분명 불교의 천왕상의 모습과 닮아 있는데 이름은 낮 설기만 하다.
부동명왕은 밀교에서 대일여래의 사자라고 한다. 번뇌의 악마를 응징하고 밀교 수행자들을 보호하는 사자이기에 위압적인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는 개방적이고 공개적인 수행과 가르침을 이어가는 현교가 대부분인데 비해 일본은 비밀스런 가르침을 이어가는 밀교가 상대적으로 널리 퍼져 있어 밀교의 사자인 부동명왕의 모습이 낯설게 여겨진 듯싶다.
부동명왕의 부조상 뒤로 스님 한 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부조상의 모습도 보인다. 화려하게 색칠을 한 스님의 부조상 옆에는 역시 그 이름이 각자가 되어 있다.
‘홍법대사(弘法大師)’. 홍법대사는 일본 헤이안시대 일본불교 진언종을 일으킨 스님으로 당나라의 청룡사에서 불교를 직접 일본으로 들여가 밀교인 진언종을 꽃을 피운 고승이다.
그가 일으킨 진언종은 밀교를 받아들여 마음(정신)과 육체(물질)의 합일을 강조하고 현세에서의 이익을 인정하여 당시 귀족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수행방법이 현교이든 밀교이든 궁극적인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깨달음에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이곳 유달산 정상에 있는 홍법대사의 상과 부동명왕의 상이 조금 이상하다. 부조된 암벽의 각도가 마치 부동명왕이 홍법대사를 지키고 있는 듯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홍법대사가 일본에서 진언종을 일으키고 열반한 후 그의 제자들이 부동명왕을 홍법대사의 수호신으로 격하시킨 모양이다. 그래서 저런 형태를 하고 있는 듯싶다. 어찌보면 진언종이 왜색으로 비춰질법한 것이 이런데서 연유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왜 하필 이곳 유달산 정상에 이런 일본불교의 잔재들이 남아있는 것일까?
목포 주민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우리정기를 말살하려는 의도로 이곳 유달산 일대에 88개에 달하는 부동명왕과 홍법대사의 상을 부조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이곳 유달산 정상에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우리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어이없게도 종교까지 이용하였으니 어찌 보면 악랄하기 짝이 없는 족속들이다. 아름다운 목포의 유달산에 남겨진 흔적은 우리 역사의 상처이자 흉터처럼 느껴진다.
현재 목포시민은 이것을 없애자는 쪽과 그나마 보존이라도 하자는 쪽의 두 목소리가 팽팽하다.
없애자는 쪽의 목소리에도 이견은 없지만, 아프고 슬픈 역사이더라도 이대로 보존해서 교훈으로 삼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더구나 파서 없애 버린다면 그 자리 역시 더없이 흉해 보일 터이니.
부동명왕이나 홍법대사가 무슨 죄가 있어 이런 대접을 받아야하겠냐 마는 종교를 악용한 족속들 때문에 벌어지는 역사의 해프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일등봉에 오르니 남도의 다도해들이 다시 한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섬들을 품고 있는 바다가 마치 호수처럼 느껴진다. 어찌 보면 섬들이 호수를 품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유달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광들이 다시금 눈에 선하다. 마치 용이 바닷물에 머리를 쳐 박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던 고하도의 섬 풍경도. 목포 앞 바다가 호수처럼 보이게 만들던 달리도, 장좌도, 율도와 압해도의 섬 풍경도.
바다가 있고 섬이 있어 그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게 해주던 유달산은 유달리 아름다운 산이다.
이제 슬슬 유달산을 내려가야 겠다. 해무가 짙어지는 하늘은 비구름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하산길에 특정자생식물원과 난전시관을 들려 유달산조각공으로 간다. 섬과 바다를 상징하는 조형작품들이 전시된 야외 공원 위에서 절집 하나를 만난다.
관음사다. 일주문 역할을 하고 있는 커다란 귀목나무를 지나 경내로 들어선다. 유달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관음사의 기와담장에서 목포시를 내려다본다.
유달산의 혈이 그대로 흘러내려 거북바위로 모이고 그 혈이 모여든 거북바위는 옛날부터 영험하기로 소문 난 기도처로 지금도 목포 일대에는 그 유명세가 자자하다고 한다.
관음사 대웅전 좌측 마당에 납작 엎드려있는 커다란 바위가 영락없는 거북이 모습을 하고 있다.
1939년 토굴로 시작한 관음사는 당시 산신당으로 잘 알려졌고 이후 증축과 개축을 거듭하여 관음사라는 절집으로 법화종으로 관리해 오다가 1999년 조계종 종단에 등록되어 대흥사의 말사가 되었다. 이런 내력이 있음일까? 관음사는 지금도 산신기도도량으로 전국 신도들이 우정 찾는 절집이 된 것이다.
관음사를 내려오니 다시 절집 하나가 보인다. 백양사에서 직영하는 포교도량인 반야사다. 반야사를 들러본다. 곳곳에 허물어진 전각들이 이난영의 목소리만큼이나 애처롭다.
반야사를 돌아보고 북교동길을 내려온다. 잠시 그쳤던 빗방울이 다시 쏟아지기 시작한다.
유달산 기암의 봉우리들이 서서히 비구름에 잠겨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