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에서는 서서히 꽃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하던 지난 3월 10일. 전국적으로 때늦은 폭설이 내렸다. 때마침 양평의 용문에 들어가 있던 날, 아침에 눈을 뜨니 세상이 온통 하얗다. 산도 숲도 나무도 흙도 집도 논과 밭도 온통 하얀색이 칠해져 있다.

눈이 부시게 하얗고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풍경들이 펼쳐진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순간 잠깐 시야가 점멸되는 느낌을 받는다. 설광이 눈을 찌른다. 그리고 잠시 후…, 설국의 세상이 하나 하나 시야를 통해 가슴으로 들어온다. 아름답다. 가슴이 터질 만큼 아름답다.

산도 하얗고 숲도 하얀데 나무들도 하얗다. 나뭇가지 마다 눈꽃이 맺혔다.

이 아름다움을 어찌 표현한단 말인가. 그저 연신 비명소리 같은 탄성을 자아낼 뿐! 이런 것이 언어의 한계다. 눈 쌓인 마당을 강아지 새끼처럼 뛰어 다닌다.

설국으로 바뀐 산골마을 작은 농장은 그야말로 동화속 세상이 되어 버렸다. 오늘 하루 만큼은 피터팬이 되어도 좋다.

이렇게 흰눈으로 가득한 날은 산중 절집을 찾아가야 한다. 몇 차례 언급했지만, 언제부턴가 눈 내린 날이면 강박증처럼 절집을 찾아가야 한다는 소리가 머리 속을 헤집고 다닌다.

‘이렇게 보기좋게 눈이 내렸는데 산중 절집을 찾아가지 않으면 바~아~보~오~’

의식의 세계 저 너머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인 것이다.

겨울 내내 손길 한번 안갔던 사륜바이크의 시동을 걸어본다. 스위치를 눌러도 감감 무소식. 배터리가 완전 방전이 된 모양이다. 아침 식사을 준비하며 배터리에 충전기를 걸어 놓는다. 아침을 먹고 난후 다시 시동을 걸어본다.

두어 번 ‘푸륵푸륵’ 거리더니 ‘부다당’하고 시동이 걸려준다.

“나 세상 구경 좀 하고 올게…”. 아우에게 외출신고를 하고 산골 농장을 빠져 나온다.

흰눈으로 가득 덮힌 산골마을의 풍경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 외엔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일어나질 않는다. 마을을 끼고 흐르는 개울가의 풍경도 아름답고 허연 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마을도 더욱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망능리에서 조현리를 거쳐 오촌리로 향한다. 용문산 기슭의 천년 은행나무가 있는 용문사로 가는 길이다.

개천을 따라 이어지는 국도변의 풍경이 더없이 보기좋다. 아름다운 설경들이 투명한 개울물 속으로 첨벙첨벙 자맥질을 한다. 물 위에도 물속에도 설경으로 그득하다.

오촌리를 지나니 구름 속에 가려졌던 용문산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을 한다.

신점리 마을 뒤 중원산을 덮고 있던 눈구름도 머금었던 햇빛을 서서히 토해내기 시작하고 있다.

순백으로 치장한 설산이 토막 난 햇살들을 튕겨내고 있다. 드문드문 파란하늘이 열려준다. 설산이 보석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용문산관광단지 입구에 사륜바이크를 세워놓고 용문사로 향한다. 용문사 일주문으로 들어선다. 계곡의 바위들에도 흰눈이 덮여 있다. 수천 개의 흰색 둥근 모자들이 계곡물 위에 떠있는 듯하다.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온 바람 한 자락이 숲을 휘젓고 지나간다. 나무 가지들이 쌓여있던 눈 비늘을 털어내고 있다.

순간 눈보라 사이로 옅은 무지개 빛이 지나간다. 마치 관세음보살님께서 옷자락을 펄럭거리며 다녀가신 듯하다. 한 뼘 잿빛 구름 틈새에서 비집고 나온 햇살이 만들어준 풍경이다.

용문사의 경내로 들어선다. 천년의 세월을 살아온 은행나무가 가을의 황금빛 은행잎 대신 은백의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흰눈 가득한 절집은 언제 봐도 고혹적이다. 눈의 흰색 때문에 붉고 푸른 단청이 더욱 또렷한 색을 발하여 생동감이 넘쳐나니 좋다. 거기에 아름다운 추녀가 만들어낸 선들. 늘 긴장감이 가득한 도심의 직선들에서 벗어나 둥근 선들이 가득한 절집은 늘 여유와 안온함을 제공해준다.

용문산 용문사. 대한불교조계종 봉선사 소속 사찰로 649년 진덕여왕 3년에 원효대사께서 창건한 사찰이다. 도선국사가 중창 고려시대 공민왕때 나옹선사가 다시 중수와 개수를 하고 조선 세종29년에 소헌왕후 심씨의 원찰로 삼으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당시 절집 규모가 304칸에 300명이 넘는 스님들이 계시던 대가람이었다고 한다.

1907년 왜군에 의해 전소가 되버리고 소규모의 재건이 있었다가 그나마 한국전쟁을 치루면서 다시 소실되고 대웅전, 산신각.종각과 요사 일부가 남아 있으며 얼마전 육각의 관음전이 새로이 아름답게 지어져 있다.

또 마의태자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수령 1,100년의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30호로 용문사의 대명사가 되어 양평군의 명물이자 자랑거리다.

용문산의 높은 봉우리들이 서서히 잿빛 눈구름에서 탈출을 하고 있다. 절집 마당에도 햇빛이 내려와 앉는다. 녹아내리고 있는 춘설 사이로 잠시 주춤했던 봄이 다시 꼼지락거린다.

봄날 내린 눈이 만들어준 설국. 그 아름다운 설국에 취해 한낮 내내 미몽 속을 헤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