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다. 밤부터 내리기 시작하던 눈이 아침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지붕 위에 쌓인 눈이 제법 두툼하다. 이런 날이면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산으로 간다. 열일을 제쳐 두고서라도 산으로 가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이제 이렇게 보기 좋게 눈이 내리는 모습은 다음 겨울이나 되어야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느 겨울보다 혹독하게 추웠던 겨울이 올 겨울이었다. 삼한사온이 사라져 버렸던 겨울. 추위가 맹위를 떨쳤고 추위만큼이나 눈도 많이 내렸던 겨울이었다. 덕분에 아름다운 설경은 실컷 만끽할 수 있었지만.
이제 서서히 겨울이 물러서고 있다. 입춘이 지나고 설날 명절이 막 지난 지금. 그런데 다시 이렇게 하얀눈이 소담스럽게 내려주고 있는 것이다.
어느 산으로 가볼까? 순간 머리 속 검색엔진을 돌려본다. 네모 칸 하나를 만들고 '눈 오면 보기 좋은 산'이라고 입력을 하고 검색을 누른다. 순간 전두엽에 빨간불이 들어오면서 수많은 설경의 풍경들이 스쳐 지나간다. 안 좋은 두뇌가 괴로와지는 순간이다. 삼각산, 오봉산, 도봉산, 아차산과 용마산, 북악산과 인왕산, 예봉산, 검단산, 고령산, 수락산….
어디로 가야 하지. 접근성도 좋고 설경도 아름다우면서 세상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산을 고르다보니 딱히 끌리는 곳이 없다.
수락산까지 그림이 그려지다가 문득 떠오르는 산이 하나 있다. 바로 불암산이다. 기암과 절벽이 기막히게 어우러지는 산. '천년고찰 불암사와 천보사가 있는 산, 불암산. 그래. 불암산으로 가보자!'
생각해보니 눈 내린 불암산을 한 번도 올라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는 불암산을 올라 능선을 길게 타서 천보사로 갈 참이다. 천보사는 마애불도 유명하지만 대나무 담장 너머로 내려다보는 조망이 기막힌 절집이다.
갈길이 정해지니 마음이 더욱 급해진다. 지하철 4호선 종점인 당고개역에서 내리니 허연 불암산이 하얀 눈발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집을 나설 때 보다 눈발은 더욱 굵어진다. 덕릉고개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린다. 덕릉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할 참이다. 덕릉고개로 가는 마을버스를 탄다. 산 아래 마을을 빠져나오니 불암산의 숲이 시작이 된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눈꽃의 풍경이 환상적이다. 덕릉고개에서 내려 숲으로 들어서니 아니나 다를까? 눈으로 가득한 별천지가 펼쳐진다. 능선을 따라 오르는 길이 눈으로 가득하다. 쌓인 눈을 즈려밟으니 발목 깊이까지 파고든다.
사람 발자욱 하나없는 눈 쌓인 능선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걷는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발자국 도장이 흰 눈 위에 콕콕 찍혀져 나온다. ‘눈길 함부로 어지럽히며 걷지 말라, 뒤에 오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될 지도 모르니…’라는 서산대사의 선시 구절이 떠오른다.
비탈진 능선길을 오르니 불암산 북편능선의 암봉 앞에 이르른다. 평소 같으면 이 암봉에 올라 남양주 일대를 전망하곤 했었는데. 그러나 눈 가득한 암봉을 오르는 일은 기름을 안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꼴. 아쉬움 마음을 갈무리하고서 불암산의 주봉을 향해 다시 눈길을 걷는다.
여전히 사람 발자국 하나 없다. '아! 이 큰 불암산에 나 혼자란 말인가?' 갑자기 천하제일 갑부가 부럽질 않다. 천금을 준다해도 이토록 아름다운 설산을 이 처럼 홀로 누려볼 수 있는 일인가 말이다. 능선 옆 계곡 마다 눈꽃이 가득하다.
어느새 불암산의 정상이 보이는 광장에 이른다. 불암산의 주봉은 하나의 커다란 화강암으로 형성된 암봉이다.
불암산에는 재미있는 전설 하나가 서려있다. 전설에 따르면 원래 불암산은 금강산에 있던 봉우리 중에 하나였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기로 하였으나 한양에는 남산이 없다하여 천도를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금강산에 있던 불암산이 자기가 남산이 되고 싶어서 한양으로 떠났고, 지금의 자리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남산이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양의 남산이 될 수 없었기에 다시 돌아서서 금강산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한번 떠난 금강산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불암산은 돌아선 채로 그 자리에 머물게 되었고, 그래서 불암산은 지금처럼 서울을 등지고 있는 모습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황당한 내용의 전설이기는 하지만 금강산이 관계된 전설이 남았다는 것은 그만큼 산세가 아름답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불암산은 어느 계절에 봐도 풍광이 훌륭하다. 불암산의 명물 쥐바위와 두꺼비바위를 지나 정상으로 오른다.
밧줄을 타고 오르던 바윗길은 어느새 목재 테크로 조성한 계단길이 대신하고 있다. 해발 520m의 불암산. 불암산은 필암산(筆岩山)이라는 이름과 천보산(天寶山)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불암산(佛岩山). 불암산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처님 바위의 산이다. 실제로 불암산은 거대한 암봉으로 형성된 산으로 험준한 산세는 물론 그 풍광이 빼어나 삼각과 도봉과 수락을 비롯해 서울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산이다. 불암산은 불암동 방향에서 바라보면 거대한 암봉이 마치 송낙을 쓰고 계신 부처님과 닮았다.
불암산 정상에서 세상을 내려다본다. 눈구름으로 깔린 세상이 천지분간이 어렵다. 손바닥만하게 보이는 속세도 눈구름에 오리무중이다. 천길의 암장이 온통 흰눈이다. 이 커다란 암벽에 땅거미처럼 달라붙은 산꾼들은 다 어디로 갔나? 바위벽 틈새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낸 노송들만이 바람과 맞서고 섰다.
다시 기암과 암장을 따라 이어진 목재계단을 따라 정상을 내려온다. 오르는 길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내려가는 길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와 시야에 들어와 박힌다. 아름다운 설경으로 가득한 불암산의 모습들을 뇌리 각인하며 암봉을 내려온다. 그래야 다음 겨울 또 그 다음 겨울에도 눈이 내리면 불암산이 퍼득 떠올려질 것 같아서다.
암봉을 내려와 다시 능선길을 따라 걷는다. 이 능선을 따라 끝까지 진행을 하면 삼육대학교 뒤편까지 이어진다. 학도암으로 가는 능선을 따라 몇번을 오르고 내리니 헬기장이 나타난다. 헬기장을 주변으로는 옛날 신라가 축성한 것으로 보이는 불암산성의 일부가 남아있다. 불암산성을 지나 잠시 산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좌측편 능선길로 접어든다. 천보사로 가는 길이다.
마음 급할 것 없이 능선을 걷다보니 천보사를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이 나타난다. 계곡을 따라 얼마를 내려갔을까? 이윽고 계곡 너머로 절집 담장이 드러난다. 천보사다.
담장을 돌아 천보사 경내로 들어서니 왼편 자연석에 천연보궁이라고 각자가 되어있다. 불암산의 명왕봉의 암봉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천보사가 천연보궁이라니! 명왕봉의 암벽에 자연적으로 불보살님들이 모셔져서 천연적멸보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기도영험이 많은 사찰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이 없었다고 한다.
불암산의 다른 이름이 천보산(天寶山)이라는 불리운 이유가 여기 있음인 듯싶다. 천보사 경내를 돌아 마애불 앞에 이른다.
천보사는 조계종 14교구 범어사의 말사다. 거대한 암봉에 아래 마애부처님께 그저 절만 올릴 뿐이다. 그 옆에서 스님 한분이 묵묵히 쌓인 눈을 치우고 계신다.
“스님. 여기 마애불은 언제 조성된 것이에요? 장중하고 아름답습니다.”
“글쎄요. 제가 이 절집으로 온지가 며칠이 안 되었습니다. 다음에 오시면 자세히 알아 알려드리겠습니다.”
홍천의 수타사에서 오래 동안 계시다가 요 며칠 사이에 이곳 천보사로 오게 되었다는 도경스님은 후덕하고 넉넉한 외모에 말씀도 재미나게 해주시던 스님이시다.
“여기 절집이 너무나도 아름답지요? 이렇게 눈이 가득하니까 산도 절집도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 수행처로 많은 산과 절집을 돌아보았는데 그 어느 산중 절집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렇다. 천보사는 산중 깊숙이 자리하고 있음에도 그 담장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이 훌륭한 사찰이다. 담장 아래로 펼쳐지는 남양주 일대의 풍경도 좋고 뒤로 하늘을 이고 선 붉은빛 암봉과 그 암봉에 모셔진 불보살님들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요산요수를 말씀하시며 아름다운 산과 계곡이 있고 거기에 이토록 흰눈 가득한 절집이 있으니 이보다 더 좋고 더 아름다울 수 있느냐는 스님은 다시 묵묵히 쌓인 눈을 쓸고 있다.
어찌 보면 이렇게 눈이 내리면 귀찮고 번거로울만도 하련만 스님의 표정은 온화하고 느긋하여 그 모습이 부처님을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간다.
마애불에서 내려와 기와담장에서 다시 한 번 조망을 감상한다. 서서히 그쳐가는 눈발 사이로 발아래 세상이 하얗게 드러나고 있다.
천보사의 가파른 길을 걸어내려 온다. 그리고 다시 만나는 바위 하나. 계곡 위로 머리를 쳐들고 숲 사이에서 이무기 한마리가 불쑥 머리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다. 자연석 치고는 어찌 저리도 사실감이 있단 말인가? 금방이라도 긴 혀를 낼름거릴 듯한 바위를 지나쳐 불암동에 도착을 한다.
하루의 산행과 들렀던 천보사의 풍경이 모두 꿈만 같다. 불암산 기슭을 걸어 나오는 길. 돌아다보니 멀리 하얀 보관을 쓰고 계신 부처님께서 옅은 눈발을 날려주며 환송을 해주시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