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전부터 벼르고 있던 길을 나서는 아침. 막바지 매서운 한파가 기승을 부린다. 다행히 오후부터 날씨가 풀린다하여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하다. 양주의 동두천시에 연해있는 칠봉산과 천보산을 찾아나서는 길이다.
칠봉산은 암굴의 와불이 유명한 대도사로, 천보산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회암사지로 너무나 유명한 산이다.
무엇보다 266칸의 대가람의 터, 회암사지는 꼭 한 번은 찾아보고 싶은 곳이었기에 막상 작심을 하고 떠나는 길은 설렘과 기대로 가득해진다.
작은 보온병 한 가득 뜨거운 물을 담고 간단한 도시락까지 준비한 후 아침식사는 뜨끈한 국물과 함께 든든하게 먹어둔다. 아무래도 산행 시간과 거리가 길어질 수도 있을 듯싶기 때문이다.
혹시나 싶어서 아직 남은 잔설이 걱정돼 아이젠과 방풍용 점퍼 하나를 더 준비해서 대문을 나선다. 역시 오후나 되어야 날씨가 풀린다는 기상청의 말대로 찬 공기가 알싸하게 코끝으로 파고 든다. 그래도 하늘은 쾌청하기 이를 데 없어 맑고 파랗다.
드문드문 있는 소요산행 전동차를 기다리며 플렛폼 안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뽑아 홀짝거린다. 커피 한잔을 다 마시고도 한잔을 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소요산행 전동차가 플렛폼으로 들어온다.
전동차에 올라타니 빈자리가 많다. 토요일 아침 소요산행 전동차가 이렇게 한적하다니. 분명 이렇게 좋은 날씨면 차내는 산행객으로 왁자할 터인데 오늘 따라 평소의 주말 보다는 적은 편이다. 어쨌든 한적해서 좋다.
배낭에서 이어폰을 꺼내 잔뜩 쟁여둔 음악들을 무한반복으로 선택해 놓고 음악을 듣는다.
지긋이 눈을 감으니 사진으로 보았던 산과 산사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오가고 있다. 음악의 종류에 따라 일어나는 감흥도 종류가 달라진다. 이렇게 혼자 나서는 길에는 음악보다 더 좋은 친구가 없다. 때에 따라서는 친구 한 사람보다 음악이 편할 때가 많다.
묻는 말이 없으니 대꾸할 필요가 없어 좋고 그러다 보면 상념에 잠겨있기가 좋으니 이렇게 혼자 가는 길에는 음악이 제일 좋은 벗이 되어주는 것이다.
물론 늘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이렇게 홀로 작심하고 나서는 길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덕정역사을 빠져나와 길을 건너 송내상회로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사전에 아무리 많은 정보를 모아놔도 막상 초행길은 늘 정보와 다른 현실을 맞닥뜨리게 된다.
송내상회로 가는 버스는 정보와는 다르게 별로 없었다. 다시 한참을 기다린 후 버스를 타고 송내상회에서 내린다. 대도사로 가는 초입이 바로 이 송내상회 앞 정류장이다.
시골길을 따라서 걷는다. 나지막한 능선이 길 양편을 따라 준봉들을 향해서 이어지고 있다. 겨울 시골길은 다소 삭막한 풍경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걷기에는 즐거운 길이 시골길이다. 간간히 만나는 목장의 소떼들 우는 소리도 그렇고 어느 전원주택의 입구에서 도로까지 심어놓은 메타세콰이어 길도 보기가 좋고, 시골동네 마다 만나볼 수 있는 느티나무나 팽나무 고목도 보기가 좋다.
이런 시골길은 봄날 걸어가면 정말 아름답다. 벚꽃도 피고 하얀 배꽃과 진홍빛 살구꽃과 앵두꽃, 옥매화 흐러진 담장과 연녹의 새싹이 파릇파릇 피어오르는 논밭두렁이 있는 시골길은 도심에서는 죽어도 맛볼 수 없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목가적인 풍경이 서서히 겨울 야산의 풍경으로 바뀌어 간다. 비탈진 도로를 따라 다시 한참을 걸어 오른다.
그리고 드디어 나타난 작은 절집. 대도사. 시골길을 따라 대도사까지의 거리가 3km. 약 40분 정도가 소요된다는 정보는 딱 맞는 정보다. 대도사(大度寺)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사찰로 규모는 작지만 칠봉산으로 인해 근래에 많이 알려진 사찰이다.
대도사 경내로 들어서니 범종각 좌측 아래로 커다란 바위 하나가 있다.
바위 중앙에 돌로 만든 현액 하나가 걸려있다. 와불전(臥佛殿). '저곳에 들어서면 누워계신 부처님을 뵐 수가 있겠구나' 워낙 낮은 입구라서 거의 엎드리듯 구부리고 들어선다. 안에 들어서니 엄청 낮은 석굴 안에 부처님이 누워계신다. 엎드려야 부처님을 뵐 수 있으니 그야말로 부처님과 참배자 모두가 누운(와) 불전인 셈이다.
사진으로 보았던 것 보다 규모가 작아 내심 조금은 실망스러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부처님이 계신 곳이 크기가 무슨 상관인가. 정성이 중요하고 갖는 마음이 중요한 것을. 와불전에서 구부리고 앉은 채로 삼배를 올린다.
대도사는 전각이 몇 안 되는 절집으로 큰법당인 각황전과 범종각 그리고 아래 요사가 전부이다. 입구에서 얼핏 보기에는 제법 규모가 있을 듯 싶어 보이지만 막상 실제 규모는 작은 편이다. 아마도 개인소유의 사찰(私刹)을 태고종 종단에 등록한 절집이 아닌가 미루어 짐작해 본다.
법당에 영가를 모셔왔는지 상복 차림의 불자들이 여럿 보인다. 대도사 부처님은 와불전에서 친견하였으니 이제 칠봉산으로 오르는 일정이 남았다. 대도사 각황전 우측으로 가지런히 돌계단이 놓여져 있다. 계단을 따라 오르다가 시선을 들어보니 바위 한 덩어리가 범상치 않다.
이렇게 산으로 오르는 길에 돌계단을 정비해 놓았다면 필시 저 바위에 뭔가가 있으리라.
돌계단을 마저 올라 바위 사이로 들어서서 우측으로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커다란 바위에 기대어있는 작은 바위 한덩어리가 비스듬히 누워서 ‘ㅅ’자 형태의 문을 만들고 있다.
“맞아 이런 풍경을 정말 많이 봤지! 청계산에서도. 삼각산에서도. 팔공산에서도…. 그래. 저렇게 생긴 바위문은 거의 세 바퀴를 절을 하면서 돌면 장수 한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져 오지.”
'ㅅ'자 형태의 바위문을 들어서니 커다란 바위가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그 중 제일 큰 구멍에 산신령이 백호를 깔고 앉아 계신다. '오호! 여기는 자연을 그대로 한 산신각이로구나.' 이런 기묘한 바위는 대부분 기도처로 잘 알려져 있다. 마이산 탑사도 가까이는 인왕산의 인왕사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쉬는 우리나라의 바위숭배사상이 남긴 현상들이다.
능선을 따라 오르다보니 다시 커다란 바위에 이른다. 큰 바위 두 덩어리 위로 두 개의 둥그스레한 바위 두 개가 얹혀진 신기한 모양이다. 이름하여 매봉이다.
매처럼 생겼거나 매가 많이 앉는 바위에 붙는 이름이 보통 매봉이다. 그런데 이곳 매봉은 앞에 붙은 표지판의 설명이 좀 다르다. 임금님이 이곳에서 사냥을 위해 매를 날려 올렸다 하여 매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바위봉우리인 것이다.
임금님의 사냥터라! 칠봉산을 오르는 내내 이곳 칠봉산이 임금님과 관계가 있는 산이라는 설명이 유독 많이 보인다.
나중에야 대략 짐작으로 미루어 보건대 소실되기 전 회암사와 연관이 있지 싶다. 이 매봉 역시 바위 모습이 신묘해서 그런지 바위 앞에 향과 초를 피울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마도 옛날에 이곳 대도사 일대가 양주에서 알아주는 기도처가 아니었을까 싶다.
다시 능선을 따라 한참을 오르니 정자가 있는 봉우리와 만난다. 칠봉정이라는 정자가 있는 깃대봉이다.
칠봉정은 산행객에게 마련한 지붕이 있는 쉼터이고 그 옆이 봉우리가 깃대봉인 것이다. 깃대봉 역시 임금이 사냥을 나가 사냥을 시작한다는 표시를 하기 위해 깃발을 꽂았던 봉우리라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칠봉산은 육산으로 흙으로 된 산이다. 아래서보면 기암괴봉이 많아 험준해 보일 듯한 산이지만 막상 산행을 하다보면 산은 너무나도 부드럽고 편하기만 하다. 능선 역시 대부분 완만해서 느긋하게 숲을 즐기며 걷기에는 더없이 좋은 산이 이곳 칠봉산인 것이다. 봄에 각종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하면 숲과 꽃을 즐기기에 너무나도 좋은 산이지 싶다.
다시 능선을 따라 한참을 걸어오르다 보니 능선 양편으로 바위들이 가득하다. 임금께서 이곳에 돌이 많다하니 이름은 그대로 석봉이 된다.
석봉을 지나 다시 만나는 봉우리가 투구봉이다. 임금이 이곳에서 투구와 갑옷을 벗어놓고 휴식을 취하던 봉우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정상을 2백여 미터 남겨둔 지점에서 준비해간 점심을 먹는다. 산에서 먹는 밥맛은 언제나 꿀맛이다. 식사를 마치고 칠봉산의 정상으로 오른다. 정상의 이름이 돌봉이다. 해발 506미터로 석장봉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아마도 돌이 많아서 연유된 이름들일 것이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이 시원시원하다. 양주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회암사가 있는 천보산으로 가려면 장림고개로 가야 한다. 수리봉을 지나 장림고개로 하산을 시작한다.
그리고 장림고개를 지나 다시 천보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천보산의 정상을 올랐다가 하산길에 회암사와 회암사지를 둘러볼 것이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정상을 향해서 부지런히 걷는다. 기온은 이미 영상의 기온으로 바뀌어 걷기에 좋은 날씨다.
봉우리 두어 개를 넘어 천보산 정상에 오른다. 다시 열리는 시원한 조망. 돌아보니 칠봉산의 연봉들이 아스라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해발 420미터의 천보산(天寶山). 천보산 역시 육산이지만 아래서 보면 기암의 암봉으로 산세가 아름답게 보이던 산이다.
절벽 아래로 회암사와 회암사지도 한눈에 들어온다. 서둘러 하산을 해야겠다. 이번 산행은 무엇보다도 회암사지를 돌아보는 것이 우선이 아니었던가.
능선 길과는 달리 회암사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고 거칠다. 하지만 그 풍광만큼은 더 할 나위 없이 아름답기만 하다. 절벽 마다 기묘하게 비틀어져 자라는 소나무가 있는 풍경들. 그리고 그 아래로 펼쳐지는 천년고찰의 터….
바위 절벽 사이로 돌아내려오니 오솔길 가운데로 커다란 비석이 나타난다. 하얀 화강암 비석이 저물기 시작하는 태양빛에 물들어 누런빛이 감돌고 있다.
회암사지 선각왕사비의 모조비로 양주시에서 원형을 재현하여 만들어 세워놓은 비석이다. 그 비석 옆으로 비석을 받치고 있던 귀부만이 일부는 부숴진 채 납작 엎드려있다.
선각왕사비. 보물 제387호로 국보급문화재이다. 고려말의 승려 나옹선사를 추모하기 위해 왕이 세운 비석이다. 선각왕사비를 돌아내려가니 회암사의 삼성각이다. 과거의 영화는 간데없고 지금은 작은 절집으로 회암사가 존재하고 있었다.
대웅전에 들어선다. 삼배를 올리고 대웅전 앞 마당으로 걸어나와 잠시 풍경을 감상한다. 대웅전 지붕 위로 천보산이 파란하늘을 이고 병풍처럼 회암사를 두루고 섰다.
대웅전 우측의 솔숲으로 오른다. 나옹선사의 부도 및 석등과 지공선사의 부도 및 석등 그리고 무학대사 홍융탑과 쌍사자석등이 차례로 나타난다.
나옹선사와 지공선사의 부도와 석등은 모두 경기도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무학대사 홍융탑과 쌍사자석등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석등과 부도들을 돌아보고 다시 경내로 들어서다 스님 한분과 마주친다. 회암사의 총무스님이신 현탁 스님이시다. 잠시 스님께 이곳 회암사지의 복원계획에 대해 말씀을 여쭙는다.
회암사지의 복원이요? 글쎄요. 그게 가능할까요? 천문학적인 비용 드는 복원사업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전부터 복원에 대한 계획은 수차례 있긴 했지만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요. 한때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경주의 황룡사의 복원을 계획했던 적이 있었지요. 거기 역시 천문학적인 복원비용 때문에 복원을 포기했잖아요.
이곳 회암사지도 현 양주시청장이 내세운 공약이 회암사지의 복원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복원자금이 엄청나서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상황이어서 얼마 전부터 양주시민과 시민단체가 추진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복원추진회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정부에서 지원을 받아 장기적인 복원사업으로 계획을 세워보는 방법도 있지 않냐는 질문에 스님이 다시 말씀을 이으신다.
지금 4대강 사업한다고 거기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 붓고 있는데 사찰복원이 가당키나 하겠어요? 복원이 문제가 아니라 있는 문화재나 제대로 지켜줬으면 좋겠습니다. 호주나 미국 같은 나라가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바로 역사와 문화재 입니다. 그들은 100년만 지난 건물도 문화재로 지정해서 보호를 하고 있잔아요.
스님께서는 우리 국민들이 문화재를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나도 잘못되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신다.
종교를 떠나 문화재를 문화재로만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300년 400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우리 조상들 대부분이 불자였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시주해서 절집을 짓고 부처님을 봉안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믿는 종교가 달라졌다고 해서 소중한 유산까지 배타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서는 안돼는 일이지요.
회암사가 복원되면 더없이 좋기야 이를 데 없기는 하지만 너무 꿈같은 이야기라는 스님의 말씀에서 왠지 모를 패배감을 맛보는 것 같아 씁쓸한 여운이 돌아오는 길 내내 가시질 않았다.
회암사를 빠져나와 회암사지 전망대 앞에 이르렀다. 넓디넓은 절터 위로 겨울 삭은 낙엽들 나뒹구는 모습이 허망하다. 주춧돌과 계단만 남은 절터를 바라보노라니 다시 안타까움이 가득해진다.
이곳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가 자주 머물던 사찰이었다고 한다. 대가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왕들이 머물 수 있도록 별도의 공간이 조성된 하나의 행궁이기도 했다는 스님의 말씀이 기억이 난다.
‘아! 그래서 칠봉산에 임금에 대한 전설이 많이 서려있었구나!’
태조 이성계는 빼어난 활솜씨뿐만 아니라 사냥을 무척 즐겼다하니 아마도 양주 칠봉산 일대에서 자주 사냥을 했을 터. 그래서 그곳에 임금과 관계된 전설들이 많았음이 퍼뜩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저 넓은 절터에 수많은 전각들이 서있을 모습을 상상해 본다. 왕궁에 버금가는 대가람이 얼마나 웅장했을까?
기록에 의하면 회암사는 1328년에 인도에서 온 지공화상이 아라난타사를 본떠서 창건한 266칸의 대가람이었다. 고려와 조선의 왕들로 비호를 받던 이 대가람도 명종 때 순식간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곳 회암사에서 문정왕후의 갑작스런 죽음이 그 시작이 된다.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허응당 보우스님을 크게 신임했고 그런 왕실의 비호를 덕분에 거의 고사 직전의 불교를 부흥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스님이 바로 허응당 보우스님이시다.
하지만 문정왕후의 갑작스런 죽음이 발단이 되어 유생들이 크게 반발하여 일어났고 보우 스님은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리고 그 유생들로 인해서 회암사는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숭유억불 정책의 상징적 희생양이 바로 이 회암사인 것이다. 역사란 참 아이러니하다.
개인적인 불만으로 수원성의 서장대를 불태우고 국보1호 숭례문을 불태우는 나라. 종교 이념이 틀리다고 해서 천년고찰 향일암을 불태우는 나라. 단군 시조상의 목을 치고 석불의 목을 날리는 나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문화재를 수장시키려는 나라.
역사는 후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성하기 위해서 쓰여지는 것이라고 했다. 왕권을 견제한다는 명목아래 이 소중한 문화유산이 그 터만 남아버렸다.
하긴 오늘날에도 내 불만과 내 종교관과 내 이익에 반한 개발 때문에 이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망가지고 사라지고 있으니 말해 무엇하랴. 어찌 보면 이 모든 것이 다 잘못된 역사의식과 빗나간 이기적인 종교관의 결과가 아닌가도 생각을 해 본다. 후회하지 않은 역사를 써나가려면 반성이 우선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야 다시는 이 같이 우리 문화유산들이 훼손되는 일들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산을 오를 때면 언제나 방하착을 배우고 온다. 그래서 산으로 가는 길에는 마음의 짐을 몇 덩어리씩 지고 올라간다. 힘들여 땀 흘려가며 오르는 길, 발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며 큰숨 몰아쉬며 마음의 짐들을 한 덩어리씩 내려놓고 온다. 일상에서 만들어진 그 짐들을 내려놓고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홀가분하고 가볍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왠지 더 무거운 짐 한 덩어리가 가슴 한구석에 틀어박혀 오래고 남아 있다. 회암사지의 무너진 돌계단의 무게만큼 무거운 무게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