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신동 재래시장 뒷쪽에서부터 숭인동으로 넘어가는 뒷길에는 작은 고갯길이 하나 있다.

이 길의 이름이 당고개길이다. 우리나라 지명 중에 제일 흔한 지명이 당고개가 아닐까 싶다. 대개는 이렇게 이름이 붙은 고개에는 서낭당이 있어 당집 혹은 신수(神樹)와 돌무더기탑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내 어렸을적부터, 이 길을 자주 지나쳐보았건만 서낭당이나 돌탑 같은 것은 본적이 없고 무속인들이 크고 작은 굿을 벌이는 모습을 간간히 볼 수는 있었다.

옛날 이 고개에는 마을제사를 지내는 도당(都堂)이 있어 당고개라는 이름이 붙었고 이 근방에는 점술가와 무속인들이 많이 모여살았다. 이곳이 채석장이 되기 전까지는 당고개 위의 큰바위에 ‘낙산 산신령’이 모셔져 점괘가 영험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조선 순조 때부터 모여든 점술가와 무속인들이 무려 200여호를 이루었으니 그야말로 점술무속인 집단거주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를 짓기 위해 이곳에 채석장이 들어서면서 낙산의 바위는 깨지고 파헤쳐졌다. 이로 인해 낙산 산신령이 산을 떠나가 점괘가 잘 나오질 않는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를 믿던 점술 무속인들의 대부분은 이곳 당고개를 떠나 지금의 점술인촌인 미아리 고개로 자리를 옮겨가게 되었다고 전한다. 어렸을 적 이 고개를 지나칠 적마다 보았던 크고 작은 굿판들은 이곳이 영험있는 점술 무속인촌이었기 때문이었음을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 한편 부끄럽기도 하다.

이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서면, 좌측 높다란 곳에 허연 화강암 바위 한 덩어리 아래로 다소곳이 자리한 절집 하나가 드러난다. 이 절집이 바로 안양암(安養庵)이다.

안양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조계사의 말사로 1889년 성월대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안동권씨 감은사 종중의 소유라고 하는데, 십여 년 전까지는 원효종의 소속사찰로 소송과 분규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원래 사찰과 땅의 소유주가 별도인 개인사찰이었는데 한국불교미술박물관 권대성 관장이 그 땅을 사들여 조계종 조계사의 말사로 등록하면서 안정을 찾았다.

안양암 창건주의 아들 태준 스님이 1916년에 주지가 되면서 안양암을 중건하게 되었는데, 이 스님이 주지가 된 이후 조선총독부에 엄청난 친일행각을 시작한 모양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종교인 108명 중 한사람이었다고 하니, 이태준 스님이란 분이야 말로 잘못된 길을 걸어도 한참이나 잘못된 길을 걸어간 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종교인의 한사람으로 존경은커녕 후세에 지탄을 받는 대상이 되어 버렸으니 그의 한평생 살림살이도 실패로 돌아간 셈이다.

스님이 절집을 뒷전에 두고 부귀영화를 쫓다가 닭 쫓던 개 모양이 되고나니 절집 족보가 바뀌는 것은 어찌 보면 사필귀정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곳 안양암에 조선말기의 아름다운 불교문화재들이 보존되어 있음을 알고, 이곳을 사들여 보존복원에 힘을 아끼지 않는 한국불교미술박물관 권대성 관장의 안목과 문화재 사랑에이다. 그에게 경의를 표해도 모자람이 없을 듯싶다.

안양암의 낡고 오래된 산문 안으로 들어선다. 곰삭은 장류와 반찬들이 가득찼을 것 같은 항아리들이 놓인 장독대 너머로 대웅전이 보인다. 대웅전 좌우측으로 관음전과 명부전의 전각이 대칭을 이루고 섰다.

먼저 대웅전으로 들어서서 삼배를 올리고 머리를 들어보니 석가모니부처님 뒤로 아름다운 후불탱화가 눈을 번쩍 뜨이게 한다. 아미타후불도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85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다시 좌측벽면을 돌아보니 또 한 점의 탱화가 예사롭지 않다. 감로도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86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그 옆으로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단계로 나눠 그린 팔상도가 병풍처럼 펼쳐져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모두 조선말기 대가들의 역작들이다.

대웅전을 나와 우측을 바라보면 바위 벽면에서 기와지붕을 빼꼼이 내민 전각이 서 있다. 관음전이다. 이런 형태의 전각들은 들어가 보면 보통 감실이 있는 석굴이 조성되어 있다. 단청을 입힌 담담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엿보이는 유리문을 열고 감실로 들어선다. 바위를 파낸 바위벽에 부조를 한 관음보살님이 보관을 쓰고 지긋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앉아계신다.

이 관음보살님이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된 안양암 석감마애 관음보살상이다. 석감마애란 돌로 된 감실이 있는 바위벽에 새겨진 불상을 뜻하니 안양암의 관음전은 석감마애가 딱 맞는다.

1909년경에 조성된 문화재로 통도사 지장암 마애불과 함께 조선 최말기의 마애불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또한 최근 발견돼 미디어붓다에 최초로 보도된 왕십리 안정사 대웅전 뒤 암벽감실에서 발견된 민불형태의 마애좌불상도 같은 맥락으로 여겨진다.

관음전과 마주하고 있는 명부전으로 들른다. 명부전의 문을 열고 얼굴만 들이밀고 절을 올린다. 명부전은 지옥의 심판관 시왕을 모시는 곳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영가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곳이라서 그런 걸까? 약간은 으스스 함을 느끼게 되는 곳이 이곳 명부전이다. 명부전을 돌아 계단을 따라 오른다. 의산당을 지나니 금륜전이 나타난다.

금륜전 왼편으로 돌계단이 이어진다. 안양암을 뒤로 두르고 있는 커다란 암장으로 오르는 돌계단이다.

돌계단의 중턱에 이를 즈음 다시 만나는 사람 키 높이의 낮은 마애석불 하나. 섬세한 조각 수법이 옅 보이지는 않지만 투박하면서도 둥글둥글한 모습에서 서민적 정서가 가득하여 정겹기만 하다.

이곳 안양암 보살님께서는 약사여래라고도 하시지만 다른 글에서는 아미타여래로도 나오기도 하여 다소 혼란스럽다. 그러나 기자의 눈에는 아무래도 아미타여래의 모습이 맞는 듯 보인다.

이 작은 감실마애는 조성 시기를 알 수 있는 다른 자료가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후사가 없는 아낙네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고 마애불의 돌가루를 긁어다가 마시고 후사를 얻었다는 숱한 이야기가 많은 영험한 마애불이다.

돌계단을 따라 마저 오르니 암벽 아래로 동굴 두개가 뚫려 있다. 들어서니 'ㄷ'자로 이어진 석굴이다.

어느 스님께서 기도를 위해 이곳을 파들어 간 것일까? 아니면 어느 소박한 중생이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 이렇게 바위를 뚫어 놓은 것일까?

용도와 의도는 알 수 없지만 바위굴 안에는 석순처럼 자라는 고드름이 얼어 달려 있다.

천오백불전으로 내려오는 길 주변에는 숯덩이며 기와더미와 전돌 조각들이 어지럽다. 종무소에 들려 보살님께 여쭈어보니 몇 해 전 이곳에 화재가 있어 몇몇 전각들이 소실되었고, 길 주변의 전돌과 기와조각은 그 흔적들이란다.

안타까운 현장이지만 다행히 올해부터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복원공사를 시작한다고 한다.

이왕 복원을 하는 김에 소실된 전각들뿐만 아니라 사찰의 주변경관도 말끔히 단장이 되어야 할 것같다.

안양암의 뒤편으로는 아름다운 바위가 둘러있어 더없이 좋은데, 담장이라든가 조경에는 조금 아쉬움이 있다.

암자치고는 규모도 있고 소중한 문화유산도 많은 사찰이니 생성시기와 관계없이 이 정도면 상당히 유서가 있는 사찰이 아닐 수 없다. 좀 더 많은 관심과 아낌이 필요할 절임에 틀림이 없다. 종교건물로서의 절집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유산의 공간으로 바라본다면 인근에 거주하는 시민들 역시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이곳에 다녀가시는 분들이 다들 이렇게들 말해요. 도선사보다도 훨씬 좋은 절이라고요.” 절마다 자기 절을 내세우는 게 관례이겠지만 종무소 보살의 말에는 안양암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묻어 있다. 아마도 도선사 마애불입상과 이곳의 석감마애 관음보살상을 견주어 말하는 것이겠다.

삶의 내음이 질펀한 창신동 골목의 당고개길. 이 좁은 길로는 의류와 침구류의 원단을 실어나르는 택배 오토바이들이 분주하다. 골목에서 들려오는 미싱 돌아가는 소리, 기름 냄새 덜빠진 원단 냄새는 안양암이 있어 모두가 또 하나의 목탁소리이고, 또 하나의 향 내음이다.

이 남루한 골목에 살고 있는 아름다운 부처님과, 그리고 아름다운 절집 안양암이 십우도의 입전수수처럼 저자거리에서 중생들과 어우러져 그 진정한 가치를 발하는 날, 이곳에도 진정한 극락세계가 열릴 수 있을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