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왕이 아침마다 등산하여
이름 붙여진 조왕사 (朝王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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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쳐진 그윽한 곳
한여름 불볕 더위도
한가닥 청풍에 땀이 개인다.
법당 안에 안치해 논
고려 때 돌부처님 영험 있다고
금성산 오르내리는 등산객들
두 손 모아 합장하고 고개 숙인다.
<시 ‘조왕사’ 전문 1998.8 김태한>

여름이 극성을 부리던 어느 날, 부여 조왕사(朝王寺, 주지 혜광 스님)를 찾았다. 절집에서 20년을 넘게 일했는데도 그저 바람에 흘러가는 소리로 한두 번 절 이름을 스쳐 들어보았을 뿐, 한 번도 참배하지 못한 절이었기에 부여 출장길에 일부러 시간을 내어 절에서 하루를 묶었다.
조왕사라는 절 이름에 처음에는 막연하게 혹시 조왕신과 관련이 깊은 절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절을 찾는 순간 이 절이 백제의 왕이 자주 들러 참배하고 기도했던 백제의 천년고찰임을 알게 되었다. 특히 일본사람들이 조왕사를 각별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아마도 이 절에는 무엇인가 유서 깊은 이야기와 유물들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과 함께.
조왕사는 부여 시가지와 백마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국립부여박물관 뒤쪽의 금성산 남쪽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절과 관련된 자세한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김태한의 시에 언급된 것처럼 백제의 왕이 아침마다 등산길에 들러 예배를 한 절이라 절 이름이 조왕사라고 붙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거의 폐사로 내려오던 이 절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 현재의 절 뒤편에서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좌상을 발견한 후, 삼일운동이 발발했던 1919년 김병준이 법당을 지어 중창하고, 석불을 불단에 봉안하면서 절의 생명을 되찾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 후 1981년에 요사채를 지었고, 1984년에 일본인들이 돈을 모아 범종각 불사를 했으며, 1997년에 대웅전을 중수하여 비로소 사격을 갖췄다. 백제의 옛절이라는 점, 그리고 25년 전 일본인 불자들에 의해 불교전래에 고마움을 뜻하는 보은의 종각이 중수된 점으로 미루어 일본인들과 관계가 많은 절이다.


대웅전은 정면 3칸·측면 3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 불단에는 높이 1.27m, 대좌 높이 96cm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금성산 석불좌상’이라는 명칭으로 1973년 12월 24일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로자나불 좌상은 현재의 조왕사 뒤편에 매몰되어 있었다가 1913년 홍수 때 다른 석재들과 같이 드러났으며 민영천이라는 사람이 본래의 터에서 발굴했다고 한다. 특히 이 불상은 치병과 득남에 영험하다고 하여 민간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예배되어 오다가 조왕사를 건립하면서 1919년 김병준이라는 불자가 불당 한 칸을 건립하고 옮겨 안치하였다. 이후 옛 부여박물관으로 옮겨 소장되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고려시대 양식의 불상이다.
이 불상이 봉안된 조왕사 뒤편 산언덕에는 폐사지가 있으나 주위에 기와 조각만 흩어져 있을 뿐 가람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불상을 이건하기 위하여 당시 민영천이 비로자나불을 발굴하고자 팠는데 그 밑에서 백제시대 금동입불이 발견되어 현재 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비로자나불 좌상은 두 손을 앞가슴에 모은 지권인을 하고 있는데, 몸체에 비하여 머리가 큰 편이고 현재는 육계와 나발을 새로 만들어 복원한 것이다. 목은 가슴과 밀착되어 있을 정도로 짧고 삼도의 표현은 없다. 얼굴은 볼이 살찌고 턱이 완만하여 상호는 둥글며 풍만하고, 엷은 미소를 띠고 있으나 입술은 굳게 다물었다. 이마에는 백호를 박았던 흔적이 있으며, 큰 귀는 어깨까지 닿았다.
어깨의 선은 팔꿈치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었다. 어깨가 좁지만 둥근 배와 어울려 안정감이 있다. 신체 각 부분의 윤곽은 굵고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천의가 양 어깨를 덮은 통견으로 신체에 밀착되어 무릎까지 덮고 있는데, 옷 주름은 형식적으로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군의는 U자형으로 중첩되었다. 결가부좌의 자세로 지권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지만 손과 발의 세부 조각기법이 퇴화하여 형식화되었다. 그리고 양 무릎 사이에는 역시 형식화된 발바닥이 조각되어 있다.
대좌는 상중하대석이 모두 사각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대석은 안상(음각된 연꽃무늬)이 새겨진 각형(角型)의 방형 받침을 각출(刻出)하고, 그 위에 1변 3판의 복엽연화문을 3엽씩 장식하여 배치하였다. 중대석도 방형으로 각면에는 연꽃 봉우리를 양각하였으며, 상대석은 하대석과 같이 앙연(仰蓮)의 연화문으로 장식하였다. 나머지는 하대석의 기법을 답습하였다. 불의가 간략하게 표현된 점과 두 무릎 사이에 형식화된 발바닥을 표현한 점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대웅전에는 비로자나불좌상 외에도 아미타삼존불입상과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안치되어 있고, 불상 뒷면에는 후불탱과 산신탱, 아미타설법도, 신중탱 등 4점의 탱화가 걸려 있다.

요사채는 정면 4칸·측면 2칸 규모의 주심포 공포 구조이며, 범종각은 정면·측면 1칸 규모의 주심포 공포 사모지붕 건물이다. 대웅전 앞에는 1987년 홍수 때 발견된 옛 탑재를 모아 세운 석탑이 서 있다. 석탑이 아니더라도 도량 곳곳에 옛 도량의 부분이었던 석재들이 즐비하게 나열되어 있다. 정밀한 발굴과 복원이 절실해 보인다.
절 마당에는 ‘조왕사 약수터’가 있는데 부여에서 가장 깨끗한 약수터로 이름난 곳이다. 조왕사 뒤편 계백공원으로 나 있는 등산로로 산책을 나온 부여의 주민들이 오르내리다가 절에 들러 약수를 들이킨 후엔, 법당을 향해 합장 삼배를 하는 모습이 연신 이어지고 있다. 아마도 백제의 왕들도 이 약수로 갈증을 달랬을 것이다.
조왕사에는 백제가 불교를 전해준 데 대한 보은으로, 일본나가노(長野) 시민들이 552년 백제 성왕(聖王)이 조성해 일본의 흠명천황에게 보내 현재 일본 나가노현 선광사(善光寺)에 모셔져 있는 백제 아미타삼존불(일명 一光三尊佛; 한 광배에 세 부처님을 모신 형태라는 뜻)을 그대로 본떠 보내온 금동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일본 나가노현의 '도래문화를 아는 모임'(회장 후쿠시마 일본 선광사 현증원 주지)소속 회원 100여명은 이 불상의 복제 옛 백제의 수도 부여에 옮겨 봉안하기 위한 법회를 한일 월드컵대회가 치러졌던 2002년 6월 9일 나가노현 소재 재일본 한국불교 태고종 총본사인 금강사에서 봉행했다. 모임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나가노현 주민들이 모은 기금으로 조성된 이 불상은 일광삼존불이 거쳐갔던 바닷길을 고스란히 거슬러 같은 해 10월 4일 부여의 조왕사(朝王寺)에 모셔졌다.

일광삼존불은 일본에서는 비불이라 하여 공개를 하지 않는 최고의 보물이다. 과거에는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오직 천황만이 친견을 할 수 있었다. 일반에 공개된 후에도 7년에 한번만 친견할 기회가 있는데, 이때면 전국에서 700에서 800만명이 모여들 정도다. 선광사는 어느 종파에 속해 있지 않고 모든 종파에서 공동으로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선광사 아미타삼존불을 본뜬 불상이 145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던 즈음에, 방송작가 이윤수씨가 한 잡지에 기고한 글은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어 소개한다.
한일 월드컵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 6월입니다. 일본과 나란히 월드컵을 치르고 있지만, 일제 강점의 아픈 역사 탓에, 또 사죄할 줄 모르는 오늘날 일본의 역사 인식 탓에, 일본은 여전히 가깝지만 먼 나라로 여겨집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이번에 한일 월드컵 축제 분위기에 맞춰 일본 땅에서 이루어지는 감동어린 불사 소식을 전할까 합니다.
≪일본사기(日本史記)≫에 이런 글이 남아 전하고 있습니다.
'흠명천왕 13년(552년) 겨울 시월에 백제의 성왕이 금동의 석가상 일체와 번개(幡蓋) 약 천, 경론 약 천 권을 헌납했다.'
일본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처음 전해진 기록입니다. 일본식 표기라 그렇지, 당대 뛰어난 박사들이 일본에 문화를 전하던 시기였으니 분명 헌납의 개념이 아니라 전해준 것입니다.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하사한 것이겠지요. 당시 신교(神敎)를 믿던 일본은 불교를 공인할 것인가를 놓고 갈등 중이었습니다. 백제계 도래인(渡來人)이자 지역의 실권자였던 소가노 이나메는 적극적으로 불교를 수용하자 했고, 군신 모노노베는 국신(國神)의 노여움을 탄다고 절대반대 의사를 표명했지요. 소가노 이나메는 자신의 집에서 백제 성왕이 보낸 불상을 모시고 예불을 올립니다. 원흥사로 불리던 이곳은 일본 최초의 사찰이 됩니다. 지금도 백제와 지형이 닮은 일본 나라현에 가면, 소가노 이나메의 집터에 향원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은 종교문제 외에도 귀족간의 패권 다툼이 전쟁으로 번져갑니다. 반대론자였던 모노노베는 아예 원흥사를 불태우고, 성왕이 보내준 불상마저 강에 던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3대를 이어 60년 동안 이어진 전쟁은 마침내 불법을 수호하는 계기가 됩니다. 일본의 역사 속에서 이 전쟁은 '숭불전쟁(崇佛戰爭)'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소가씨 집안과 손잡고 전쟁을 치른 성덕태자는 자신이 승리하면 절을 짓겠다는 발원을 하고, 그렇게 세워진 절이 오사카의 사천왕사지요.
성왕이 하사한 백제 불상이 버려진 강은, 지금도 오사카에서 흐르고 있습니다. 이 불상과 관련한 흥미로운 기록이 전합니다. 굴강에서 선광이란 인물이 불상을 건져 올립니다. 불상을 등에 업고 고향 땅에 돌아와 원선광사라는 절을 세웁니다. 그 시기가 602년입니다. 이후에 몇 군데로 옮겨져 봉안됐고, 7세기 중엽부터 나가노시에 자리한 선광사에 모셔졌다는 것이 선광사 연기(年記)에 남아 전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당시 버려진 불상을 업고 온 선광이란 분이, 백제 최후 의자왕의 왕자 선광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곳에 모셔진 불상 역시 일본에 최초로 전래된 백제 불상이란 점을 누구도 의심치 않습니다. 현재 선광사는 7백만명의 불자를 지닌 유서 깊은 절이자 대표적인 민중불교사찰로 한인 교포들만도 십만 명 이상 모이는 절입니다.
천사백오십년의 역사를 간직한 백제 불상은 금동으로 조성된 아미타 삼존불입니다. 국보로 지정돼 있고 비불이라고 해서 아무 때나 그 모습을 친견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가마꾸라 시대에 다시 똑같게 제작한 비불의 모습을 7년에 한번, 개장법회 때 불자들에게 공개합니다. 그 아미타 삼존불 앞의 촛불은 단 한 번도 꺼뜨린 일이 없다고 합니다.
아미타 삼존불 중심의 아미타 부처님은 높이가 약 45센티미터 규모입니다. 양옆의 보살상은 약 30센티미터로, 하나의 광배를 뒤로하고 세분이 서있는 독특한 양식 때문에 1광 3존 아미타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구름 문양으로 둘러싸인 광배에는 일곱분의 부처님이 앉아 계십니다. 본존불의 뒤로 연꽃 문양이 도드라져 보입니다. 세 분의 수인은 담징의 벽화로 유명한 법륭사의 아미타 삼존불과 닮아 있고, 서산 마애불과도 그 모습이 유사합니다. 이제 이 불상은 일본 전역에 자리한 전국 선광사회를 통해 선광사 관련 사찰마다 모셔지고 있습니다. 백제인의 혼이 깃든 불상이 일본 전역에서 추앙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선광사 주지 후쿠시마 스님은 5년 전부터 큰 원을 세웠습니다.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불상의 분신을 조성, 다시 삼존불의 고향땅 부여로 안치하려는 운동이 그것이지요. 나가노 시민들과 전국 선광사 신도 사이에 불상 조성을 위한 기금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불상은 일본 최고의 불모 서촌공조 씨에게 맡겨져 1년 넘는 세월 동안 정성 속에 조성됐습니다.
조왕사에 아미타 삼존불이 모셔지는 날, '보은의 종' 타종 소리는 울림조차 각별할 것입니다. 천사백오십년만에 다시 백제인의 숨결을 간직한 채로 일본 땅에서 귀향하는 아미타 삼존불. 이제 옷깃 여미며 백제인의 불심과 예술혼 깃든 삼존불을 반겨 맞을 채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미타 삼존불은 백제 절터 위에 90년 전에 복원된 절 조왕사에 모셔집니다. 조왕사에는 이미 일본인들이 조성한 '보은의 종'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 종은 일본 도마야현 교원사의 가마다 스님이 발원해, 일본에 불교와 문화를 전해준 백제인들을 기리고 왜곡된 한일 관계를 참회하는 의미로, 뜻있는 일본인들이 마음 하나로 모아 전달된 종입니다. 이윤수(문화예술 전문 방송작가)
이런 백제의 얼이 전해 내려오는 천년고찰 조왕사는 범종각만이 말끔할 뿐, 나머지는 손 댈 곳이 많은 절이다. 남아 있는 백제의 불교문화가 드문 현실에서 백제의 흔적이 역력한 조왕사의 중창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조왕사는 곧 요사채 등의 불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부여 도심에 위치한 조왕사가 흥하는 날, 이 땅에 찬란했던 백제불교의 영화가 부활하게 될 지도 모르니, 혹시 불사의 복덕을 짓고자 하는 이에게 시주를 권한다.
조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이다. (전화: 041)835-4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