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구제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문제가 거기에서 끝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데카르트가 위대한 철학자인 것은 맞지만 그가 근대를 연 다음에도 내가 세계와 신의 종속물이라는 패러다임에 입각한 종교는 여전히 남아 힘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철학에 근거하여 근현대인 모두가 인간이 주인이고 이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받아들였다고 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주인인 자기 자신을 신 앞에 꿇어앉히고, 이성의 펜대를 꺾고 믿음에 귀의해 온 것입니다.
물론 근대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무신론자의 수가 꾸준히 증가 추세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 큰 흐름으로 볼 때(전국 지도적으로 볼 때) 이같은 사조가 더 거세질지언정 역류하여 반대쪽으로 흘러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긴해도 여전히 높은 이성(지성)을 자랑하는 많은 지식인들이 이성을 포기하고 믿음에 귀의하고 있으며(우리는 그중 한 사례를 근래에 이어령 선생의 기독교에의 귀의를 통해 보았습니다), 자신의 삶의 주인이기를 포기하고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우리는 이 의문을 인간의 실존(實存)으로부터 풀어야 합니다(‘실존’이라는 말은 철학 용어로서 매우 의미심장한 말인 바 제가 지금 이 용어를 제대로 잘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쓰는 실존이라는 말의 의미는 저 나름의 용어로서 일반적인 쓰임과는 조금 다를 수 있으니 그 점은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실존은 종교, 또는 삶의 길(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일괄타결적인 해답)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종교와 ‘길’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부처님은 ‘여덟 갈래의 거룩한 길’을 말하였고,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공자님은 “나의 길은 하나로 꿰뚫는다.”라고 말하였고, 노자는 “길은 자연을 본받는다.”라고 말하는 등 모든 성자들이 ‘길’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공간의 관점에서, 지금 우리 눈앞에 세계, 또는 우주가 펼쳐져 있습니다(그리고 나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놓인 세계(나 자신을 포함)를 읽는 독도법(讀圖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반적으로 읽는 법이고, 두 번째는 실존을 걸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읽는 법입니다(이 두 번째 독도법으로부터 부처님의 철학이 시작됩니다).
일반적인 독도법은 무심결에 모든 사람들이 세계를 읽는 방식입니다. 그 방식으로 세계를 읽게 되면 “나는 세계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일반적인 독도법에서 볼 때 이 세계가 나를 태어나게 하였고, 나는 이 세계의 일부입니다. 이 관점은 일견 지극히 타당해 보입니다. 내가 태어나보니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세계가 있었습니다. 또, 나는 내 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부모님에 의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이것은 곧 나는 이 세계에 대하여 후차적인 존재, 또는 종속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상은 공간적인 관점에서 본 나와 세계의 관계입니다만, 시간적인 관점에서도 비슷한 추론이 성립합니다. 내가 태어나보니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시간이 있었습니다. 즉, 나는 시간에 대해서도 후차적인 존재, 종속적인 존재입니다.
이 관점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공간적으로는 우주 전체를 거쳐 우주를 만든 신을 상정하게 되고, 시간적으로는 태초에 이르러 역시 시간을 출발시킨 원동자(原動者), 또는 제일동인(第一動因)으로서의 신을 상정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렇게 상정된 신을 원동자로 하는 세계관이 우리 자신을 객체로 만들고, 피구제자로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같은 관점이 근현대인으로서의 자기 독립주의, 이성 중심주의와 배치됩니다.
나는 현대인이고, 따라서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나는 현대인으로서 이성적으로 나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신이 주체가 되는 세계관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나에게는 실존적인 요구가 있습니다. 나는 번뇌에 시달려야 하고 마침내는 죽어야 합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 싶습니다. 즉, 나는 데카르트적 인식을 통해 나 자신을 세계로부터 독립시켰습니다(개인주의 의식, 개별자아). 그 결과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 자체가 나의 실존적인 요구에 대답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리하여 현대인은 앞으로 가도 위험하고, 뒤로 가도 위험한, 외줄 위에 선 광대가 되었습니다.
현대인인 우리 앞에는 세계로부터 자신을 분리한 존재, 즉 개별자로서의 자유가 있습니다. 비교해 볼 때 고대인은 현대인에 비해 아주 조금밖에는 이 자유를 향유할 수 없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관습적으로나, 패러다임 면에서나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이 점에서 현대인은 분명 축복받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의 뒷면은 책임입니다. 개별자로서의 나는 나 자신의 삶에 대해 전적인 책임, 실존적 책임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의미 또한 내가 책임지고 찾아야 합니다.
몸이 아파도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돈이 없어도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고독해도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삶의
모든 걱정을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많은 문제를 어떻게 다 책임지지요?
우리는 이 문제의 홍수 앞에 막막함을 느낍니다.
삶은 ‘문제와 그 해결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너무나도 많다보니 해결되지 못한 채 남은 문제가 쌓여갑니다. 그 쌓여감이 나를 짜증나게 하고, 나를 화나게 하고, 나를 울게 하고, 나를 상처받게 하고, 나는 무겁게 하고, 나를 지치게 합니다. 나는 지금 힘겹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어려움은 인간에게는 인간 자신만의 능력으로써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부처님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능력은 1인데 우리에게 주어진 짐은 100도 넘고 1000도 넘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종교에 자신을 의지합니다. 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절대자(신)에게 떠넘기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맞닥뜨리는 문제는 앞에서 예시한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학자는 종교를 ‘궁극관심에 대한 답변’이라고 말했습니다만, 인간에게는 궁극 관심이 있고, 이 문제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가로막습니다.
세계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죽음 이후는 어떻게 되는가?
그렇지만 이런 유의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있겠습니까? 아마도 없거나 매우 드물 것입니다. 혹 있다면 그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이거나, 임마누엘 칸트쯤 되는 대철학자이거나, 메시아 의식(예수), 또는 붓다 의식(석가모니 붓다)을 가진 특별한 사람일 것입니다.
전세계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책은 모두 몇 권이나 될까요? 백만 권? 아닙니다. 세계의 도서관에는 그보다 수십만 배나 많은 양의 책들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이 세계를 다 읽어낸 전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직 인간은 세계의 일부밖에는 읽어내지 못하였습니다. 인류 문명 6천 년의 역사는 곧 인간이 세계와 자기 자신을 읽어온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아직도 인간이 갈 길은 멉니다.
문제는 그렇게 멀고 먼 앎의 길을 통해 얻어낸 인류의 지혜 중 나는 극히 일부분을 취득할 수 있을 뿐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 점에서 현대의 인류는 고대인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저는 앞에서 고대인은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적었기 때문에 모르는 부분을 가설로써 채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인은요? 현대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가설(모름, 믿음)의 부분보다는 과학(앎, 과학)으로 채워진 부분이 늘어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해석되지 않는 많은 부분이 남아 있고, 그 부분은 여전히 가설, 또는 믿음으로 메꿀 수밖에 없는 것이 현대인, 또는 인간의 사정이자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UFO에 대한 믿음은 그렇게 해서 생겨납니다. 버뮤다 삼각지대의 미스터리도 그 공간에서 자라납니다. 축지법· 신통술· 종교적 기적 등 온갖 전설과 신화, 상상과 혼란이 그로부터 생겨납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이 세계 전체를 해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나는커녕 인류 전체의 지혜를 총합한 입장에서 보더라도 그런 장담은 하지 못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 세계 앞에 무력함을 통절하게 느낄 수밖에 없고, 그 통절한 자기비하(自己卑下)의 마인드를 딛고 우주적 절대 지자(絶對知者)로서의 신이 등장합니다.
그 점에서 신은 인간의 지적 한계에 대한 답변이자 손쉬운 해결책입니다. 완전지(完全知), 또는 절대지(絶對知)를 가진 분이 신인 것입니다. 그에 비할 때 나의 지, 인간의 지는 불완전한 지이며 상대적인 지입니다.
절대지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지성은 매우 무력한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계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에 대해 답변하지 못합니다. 시간이 어떻게 하여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답변하지 못합니다(빅뱅 이론이 이에 대한 훌륭한 답변으로 등장해 있습니다만 여전히 유대교와 기독교는 《성서》의 〈창세기〉를 기반으로 세계의 시초를 설명합니다).
그런 인간 앞에 예언자가 등장하여 신의 말씀이라며 답변을 제시합니다. 인간은 처음에는 그 답변에 대해 저항합니다. 그렇지만 앎에 대한 목마름, 무지에 대한 무력함에 절망한 끝에 인간은 마침내 자신의 이성의 펜대를 꺾고 외칩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신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문제는 신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교주)가 한 사람만이 아니라 데 있습니다. 그들 각기 다른 예언자는 각기 다른 신, 각기 다른 길을 가르칩니다.
유대교에는 그들 나름의 예언자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예언자들 위에 예수라는 상위의 예언자(신, 신의 아들)를 내세웁니다.
힌두교에서는 《베다》와 《우파니샤드》를 남긴 예언자들을 숭상합니다.
이슬람교에서는 마지막 예언자인 무하마드에게 내린 말씀만이 진실한 신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합니다.
단군교·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에서도 나름대로의 예언자를 내세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갈라질 뿐입니다. 어쩌다 절 밑에 살다보니 불교 신자가 되고, 학생 시절 멋모르고 교회에 갔다가 목사님의 말씀이 그럴듯하게 여겨져 기독교 신자가 됩니다. 아랍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이슬람교 신자가 되지 않기는 어렵습니다. 북한에서 살면서 증산교 신자가 될 리도 없습니다.
거기까지 생각한 근현대적 지식인은 여러 답변들을 검토하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그 또한 난감한, 끝이 없을 것 같은 머나먼 길입니다. 그중 한 가지 전통만 연구하더라도 평생이 걸립니다. 아니, 평생을 바쳐도 다 연구해내지 못할 만큼 각각의 전통은 심오하고 방대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전통들은 백 년, 천 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나보다 훨씬 탁월한 이들이 갈고, 닦고, 기름치고, 조이고, 운전해 온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직관, 또는 감정에 따르게 됩니다. 이성으로 판단하는 것도 좋겠지만 느낌으로 보아 이것이 좋다, 싶은 쪽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직관과 느낌· 감정이 반드시 진실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이상이 현대의 지식인 앞에 놓인 종교, 또는 길에 관한 딜레마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현대인은 르네상스적 기초 위에서 궁극 관심을 해결하고 싶어하지만 자신의 지성(이성)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자괴감을 느낍니다. 현대인은 나 자신이 주인인 상태를 저버리지 않는 것을 전제로 궁극 관심 문제를 풀려고 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자괴감을 느낍니다. 그리하여 지성을 꺾고 믿음을 받아들이며, 주체성을 포기하고 신을 받아들입니다. 이 점에서 현대인 또한 고대인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지성(이성)을 통해서 궁극관심에 답하는 길, 자신이 세계의 주체자라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상태로 궁극관심에 답하는 길, 실존을 걸고 세계와 자기 자신을 읽는 두 번째 독도법으로부터 성립한 길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시한 길, 불교가 그것입니다. <<strong>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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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정빈 선생의 개인사정으로 당분간 연재를 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