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존재하는 모든 것은 슬프다
자발운동이 가라앉자 이번에는 상념이 줄을 이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이 상념은 이전의 상념과는 좀 달랐습니다. 주로 교리에 대한 정리와 해석으로서의 상념이 떠오른 것입니다. 지금 제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불교 철학적, 종교 논리적인 생각은 거의가 다 그때 정리한 것들입니다.
그 기간이 한 달 정도 진행되고나서 감정적인 변화가 왔습니다. 마음이 지극히 진지해졌습니다. 내가 마침내 죽게 된다는 것을 염(念)하는 때가 많아졌고, 그 염으로부터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가 더욱더 강화되어갔습니다.
마음은 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또 내려갔습니다. 마치 수영장에서 물에 잠기는 사람처럼, 저는 마침내 마음이 바닥에 닿는 것 같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마음에 바닥이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그때의 경험에 의해 어떤 정신적 심리적 안정감을 갖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 한 번 진실하게 살아보는 거야!”
그 바닥에서 저는 저 자신을 향해 말했습니다. “이왕에 한 번 죽을 목숨, 구차스럽게 굽고 휜 마음과 타협하지 말자. 옳은 길, 바른 길, 떳떳한 길, 사람다운 길로 걸어가보는 거야!”
힘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마음 안에서 슬픔이 우러나 올라왔습니다. 진실에 사무치는 슬픔이었습니다. 그 슬픔과 함께 저는 울었습니다. 소리를 내어 울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소리를 낸 것보다 더 간절한 슬픔 속에서 저는 소리를 내지 않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한 울음이었습니다.
나 자신이 너무나도 측은해 보였습니다. 나는 위로받아야 할 존재였습니다. 도덕에, 윤리에, 선에 짓눌리기 이전에 나를 사랑할 자는 나 자신이 가장 먼저였습니다. 나를 사랑할 자는 오직 나 한 사람밖에 없을지도 몰랐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가진 자의 당연한 요구입니다. 그것은 도덕 이전의 문제, 실존의 문제입니다. 생명 가진 모든 존재는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가장 강력하게 사랑하게 마련이며, 그것을 부정하는 그 어떤 가르침도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 점은 부처님 또한 인정하시는 바입니다.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자는 없다.”는 파세나디 왕과 말리카 왕비의 견해를 들으신 다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하오. 이 세상 끝까지 간다고 해도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찾을 수 없소.”
그러나 부처님은 덧붙이십니다. “그렇다면 남들은 어떠하겠소? 그 또한 자기 자신이 가장 사랑스럽지 않겠소? 그러므로 우리는 남들 또한 자기 자신이 가장 사랑스러운 줄 알아 남을 해쳐서는 안되는 법이오.”
저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제 자신이 안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통해 저는 제 아내가 안스러운 존재임을 깨우쳤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이, 가족들이, 이웃들이 안스럽고, 딱하고, 슬픈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저는 나에 대한 안스러움을 통해서 존재 일반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이치를 “섬은 물밑에서 하나다.”라는 경구로 설명합니다.
인간은 저마다 자기 자신입니다. 나는 네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닌, 우리는 저마다 독립된, 떨어져 존재하는‘섬'(개별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외롭습니다. 외롭기 때문에 남을 향해 나아갑니다. 생각해보면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갈구하고 예찬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남을 향해 나아가는, 남에게 의지하는 가치로서의 궁극입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부처님은 미움과 더불어 사랑도 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왜요? 그 또한 남과의 관계, 남에게 의지하는,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사랑을 버립니다. 남들과의 관계에 대한 일체의 기대를 끊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수행자를 처음 맞는 것은 건혜, 즉 바짝 마른 지혜로서의 ‘사막 지대’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의 섬으로서 다른 섬을 향해 나아가다가 돌아와 자기 밑바닥으로 파고들어가는 셈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바닥에 닿습니다.
그러면?
그러면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때 그는 자신이 남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나는 물위에서는 개별자로서 남들과 따로따로이지만 그 본성에 있어서는 하나로 연결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비는 이로부터 우러나옵니다.
자비는 동정의 일종입니다만 본질에 있어서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동정은 나는 딱하지 않고 남이 딱할 때 일어납니다. 그러나 자비는 내가 딱함으로써 남이 딱하게 보일 때 일어납니다. 자비에는 동정에는 없는 무주상성(無住相性)이 있습니다.
나는 딱하지 않고 남만 딱한 동정에는 우월감 내지는 자만심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딱하기 때문에 남이 딱하다고 여기는 사람의 자비에는 그런 불순성이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 자비심에도 차등이 있습니다. 그 차등에 따라 사람의 수준, 수행자의 수준에 차이가 생깁니다.
저는 남들을 다섯 그룹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1) 사랑하는 사람
(2) 좋아하는 사람
(3) 중립적인 사람
(4) 경쟁 관계에 있는 사람
(5) 적, 또는 원수
만일 어떤 사람의 자비심이 제5그룹의 사람에게까지 미친다면 그는 성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니, 제5그룹은 고사하고 제4그룹에게 자비심을 일으킬 수만 있어도, 그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고 기뻐할 수만 있어도 성자의 경지가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그때 계발된 저의 자비심은 고작해야 제1그룹의 사람에게 미칠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도 항상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컨디션이 좋을 때만 발휘되는 자비였습니다(컨디션이 아주 좋을 때에 제2그룹이나 제3그룹에게도 자비심이 발휘되는 것 같은 때가 있긴 합니다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저는 그 자비심으로써 가장 먼저 집사람에게 말을 건네 보았습니다. 그때의 저의 말투는 너무나도 진지하여 집사람이 부담을 느끼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다행하게도 집사람은 저의 말을 잘 들어주었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죽게 마련인 가엾은 존재요.”
하고 저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수행이야말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가장 훌륭한 길이오. 그러니 우리 함께 수행합시다.”
제 생각에 가장 큰 자비는 남에게 수행을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또한 나처럼 수행에 몰입하여 자기 자신을 내적으로 성장시키면, 그로부터 마음의 여유와 평안을 증장시키면 그것이 그에게 가장 큰 이익이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물론 남에게 물질을 베푸는 것이나 보다 더 이해심 깊은 태도로 너그럽게 상대방을 수용해 주는 것 또한 자비심 깊은 사람이 당연히 하게 마련이 행동일 것입니다. 제가 그때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1그룹의 사람, 특히 아내에게 수행을 권한 것은 사실입니다.
나아가 저는 제2그룹의 사람들에게도 수행을 권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그것을 그만두었는데, 그것은 저의 진지성 또한 병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진지성은 저에게는 진지성이었지만 남에게는 부담이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나 자신에게만 몰두하느라고 남들의 감정, 남들의 입장을 챙기지 못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서 그때 저는 향기가 나면 벌나비가 저절로 찾아온다는 제 이론을 확고하게 정립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저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후 저는 “남이 묻지 않으면 명상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한 번만 말한다.”는 원칙을 갖게 되었습니다.
남이 묻는다는 것은 나의 향기가 남에게도 느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그에게 내가 향기를 낸 원천을 말해주는 것은 이익중생에 속하는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남이 물을 정도가 안 된 사람으로서 자기가 하는 수행, 자기가 믿는 종교를 남에게 권하는 것은, 자신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남에게는 강요, 또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인간은 저마다 자기 자신이고, 저마다 자기 자신의 주인입니다. 이 말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길일지라도 자기가 가기 싫으면 가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에게 자기의 길을 강제하거나 강권할 수 없습니다. 다만 원하는 사람, 물어오는 사람에 한하여 “가고 안 가고는 그대가 결정할 사항이다. 나는 다만 그것을 말해주노라.”라는 태도를 길을 안내해줄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상대가 나와 피를 나눈 혈육일지라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나의 아내에게조차도, 나의 자식들에게조차도, 나의 부모, 나의 형제에게조차도 나의 생각은 강요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몇 년의 세월이 더 흘렀고, 그 사이에도 저는 꾸준히 명상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95년, 저는 미얀마 양곤에 가서 빅쿠(bikkhu: 비구: 比丘)가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한국에서 법문을 들은 적이 있고, 그 분을 제 자동차로 모시며 함께 3일 동안 전국 투어를 같이 한 적도 있는 찬미에(Chanmyay) 수도원의 우 자나카(U. Janaka) 사야도(sayadow: 큰스님)로부터 명상 지도를 받았습니다(그때의 경험에 대해서는 저의 책 《김정빈의 마음 공부》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 다음 돌아왔는데, 차명수 선생이 저를 삼성 그룹 연수원에 소개하였습니다. 그 인연으로 삼성 그룹 연수원에서 명상을 지도하게 되었고, 그 일이 어느 신문에 기사로 실렸습니다. 그러자 그 기사를 읽은 어느 출판사에서 명상에 관한 책을 써보지 않겠느냐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그러기로 하고 곧 집필에 착수하였습니다.
20여 일만에 책 한 권이 쓰여졌습니다(저는 책을 아주 빠르게 쓰는 편입니다). 아직 제목은 지어지지 않은 상태였는데, 얼마 후에 출판사의 편집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책 제목을 ‘마음을 다스리는 법’으로 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너무나 평범한 제목이어서 잠시 망설였습니다. 불교 신자가 아닌 편집장으로서는 불교 권에서 마음을 다스린다는 말이 얼마나 자주 쓰이는지, 그래서 얼마나 식상하게 되어버렸는지를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더 참신한, 문학적인 재치가 있는 제목을 저는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편집장은 자신이 지은 제목을 강력하게 권했습니다. 더하여 편집장은 말했습니다. “이 내용은 한 번 읽어서 될 내용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 책의 표지를 하드카바로 만들 예정입니다.”
지금은 하드카바 책이 많지만 당시에는 일반도서로 하드카바 장정을 하는 경우가 귀했습니다. 이로써 볼 때 편집장과 출판사 측에서 나름대로의 성의와 열의를 갖고 책을 다루고 있다는 것, 따라서 책의 제목 또한 허투루 지은 것이 아니라 고심 끝애 지은 것일 거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얼마 후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 출판되었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다시 편집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반응이 대단합니다!” 2쇄를 찍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3쇄, 4쇄, 5쇄…. 책은 중쇄를 거듭하였습니다.
1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저는 그 책을 읽고 있는, 또는 읽었다는 분을 만나곤 합니다. 지난 번 명상 모임에도 그 책을 읽은 분이 두 분이나 오셨을 정도로 그 책은 나름대로 베스트셀러였습니다. 그렇지만 책은 쉽게 읽히는 간단한 책은 아닙니다. 꽤나 논리적인 저의 사고방식이 투영된 그 책은 법정 스님이나 틱낫한 스님의 책처럼 시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논리, 논리, 논리….
저는 독자들을 향해 논리적으로 명상을 이해시키려고 애썼고, 그 결과로써 마음을 ‘지금-여기’에 둘 필요성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여기’ 중에서도 참다운 여기는 ‘나 자신’이며, 그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관찰하는)’ 것이 위빠싸나 명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읽기에 쉽지 않은 그 책이 널리 읽힌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먼저 그 책이 나오던 당시 사람들의 심리가 꽤나 불안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막 ‘한보사태’가 터져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인 불안을 느끼던 때였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라는 제목은 꽤나 호소력있게 독자들에게 다가갔을 것입니다.
명상을 다룬 책으로서, 특히 위빠싸나 명상을 다룬 책으로서 십만 부에 가까운 독자에게 읽힌 책은 아직까지 제 책밖에는 없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얼마 후 그 책은 출판사의 도산과 함께 절판되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출판사에서 그 책을 내기를 원했고, 그런 식으로 무려 네 번이나 책이 새로 나오게 되었습니다(마지막으로는 처음 원고가 조금 보강되어 《즐거운 수행》(다산북스)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 책은 비교적 시간이 지나도 가치를 지니는 편인가 봅니다. 이런 식으로 예전에 냈던 책이 재출간되는 사례가 많은 이유를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룬 책을 많이 내는 편인 저는 그것이 마음이라는 것이 시간에 따라 유행을 타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마음만을 다루신 대가이셨고, 그럼으로써 그 분의 마음에 대한 가르침은 이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호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의 마음에 대한 글들이 어찌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저는 십 년 정도는 살아 남을 만큼의 힘을 가진 글을 쓸 수는 있는가 싶어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낸 지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그동안 저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사업을 벌였다가 실패를 하는 과정에서 삶을 바라보는 관점에 일대 수정을 가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경험을 통해 저는 그동안 세속적 가치를 거의 인정하지 않던 관점을 바꿔 세속에는 세속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세속 가치가 더 중요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세속에도 나름의 ‘정신’이 있고, 그 정신은 그 나름으로 위대하며, 어떤 면 거룩하다고 말해도 좋다는 것이 지금의 관점입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미얀마에서의 명상 수행 이야기와 더불어 저의 책 《김정빈의 마음 공부》에서 자세히 말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지금의 제 견해를 바탕으로 이 코너의 중심 주제인 명상에 대해 차근차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