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선덕여왕 11년(642)에 7월에는 의자왕이 이끄는 백제군의 침략을 받아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이 함락되고, 8월에는 대야성(大耶城)이 무너짐으로서 서쪽의 대백제 방어선을 지금의 경산인 압량까지 후퇴해야 했다. 대야성이 무너지던 8월에 백제는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나라로 통하는 길목인 당항성(黨項城)까지도 위협했다. 고립무원의 신라는 사직의 보전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신라 조정에서는 김춘추를 고구려로 보내 군사원조를 청했지만 실패한다. 이듬해인 643년 정월에는 당나라로 사신을 파견했다. 그리고 선덕여왕은 유학하고 있던 자장(慈藏)을 귀국시켜 줄 것을 당나라 황제에게 정식으로 요청했고, 이 해 3월에 자장은 급히 돌아왔다. 온 나라가 그의 귀국을 환영했다. 위기의 신라를 어떻게 구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던 자장은 귀국 즉시 국왕에게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자고 건의했다. 그는 선덕여왕에게 탑 세우기를 건의하면서 자신이 오대산 태화지에서 만났던 신인(神人)의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자장이 중국의 태화지(太和池) 곁을 지날 때 홀연히 신인(神人)이 출현하여 물었다.
“어떻게 이곳에 왔습니까?”
자장이 대답했다.
“보리(菩提)를 구하려는 때문입니다.”
신인이 절하고 또 물었다.
“당신 나라에 어떤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자장이 답했다.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했고, 남으로는 왜인(倭人)과 접하는데, 고구려 백제 두 나라가 변경을 침략하여 이웃의 적이 횡행하는데, 이것이 백성들의 화란이 됩니다.”
신인이 말했다.
“지금 당신 나라는 여자로 임금을 삼았기에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 나라가 도모하려는 것이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장이 물었다.
“고국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하면 이익이 되겠습니까?”
신인이 말했다.
“황룡사(黃龍寺)의 호법룡(護法龍)은 나의 장자로써 범왕(梵王)의 명령을 받고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 그 절에 구층탑(九層塔)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王業)이 오래 태평할 것입니다. 탑을 세운 뒤에는 팔관회(八關會)를 설하고, 죄인을 용서하면 외적이 해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경기 남쪽의 언덕에 한 정사(精舍)를 짓고 함께 나의 복을 빌면 나도 또한 은덕을 갚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玉을 바치고는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신라는 여자로 임금을 삼았기에 덕은 있지만 위엄이 없어서 이웃 나라가 도모하려는 것입니다.”
신인의 이 말은 중요하다. 신라가 직면한 위기의 책임을 선덕여왕에게 돌리는 여론이 있었다. 여왕은 위엄이 없어서 이웃 나라가 업신여겨 침략한다는 것이었다. 선덕여왕 12년(643) 9월 신라가 사신을 당에 파견해 군사원조를 청했다. 당나라 태종(太宗)은 신라 사신에게 세 가지 계책을 제시했다. 다음은 그 중의 하나였다.
“그대 나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아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게 되고, 임금의 도리를 잃고 도적을 불러들이게 되어 편안할 때가 없다. 내가 나의 친척 한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 임금으로 삼되, 자신이 홀로 임금이 되기 어려우니, 마땅히 군사를 보내어 호위를 하겠다. 그대 나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려 그대들에게 맡겨 스스로 지키게 하겠다.”
태종의 계책이란 신라를 병탄(倂呑)하려는 흉계를 표현한 것에 불과하고, 여왕이 다스리는 신라를 그 자신이 업신여기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선덕여왕을 실주(失主)라고 하면서, 그를 퇴위(退位)시키고 당나라 왕족 중의 한 사람을 왕위에 추대하여 당나라 군사를 신라에 주둔시키자는 당 태종의 제안이 신라 조정에 전해졌을 때 그 충격은 컸다. 여왕패위론(女王廢位論)은 신라의 국가 존립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신라 조정의 국론(國論)은 분열되었다. 여왕폐위론에 반발하면서 현 체제를 유지하려 했던 세력이 있었는데, 김춘추와 김유신과 자장 등의 경우다. 그러나 국왕폐위론에 동조하는 세력도 있었다.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자장은 당 태종이나 비담보다 먼저 국내외의 여론을 파악했지만, 여왕을 면대해서 이를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자장은 쓴 약에 당의정을 바르듯 신인의 입을 빌려서 자신의 생각을 말했던 것이다. 선덕여왕은 듣기 거북한 건의를 받아들이고 여러 신하들과 이 일을 의논했다. 신하들은 말했다. “백제로부터 공장(工匠)을 청한 뒤에야 가능할 것입니다.”당시 신라에는 구층목탑을 세울만한 기술이 부족했던 것이다. 보물과 비단을 선물하면서 백제에 공장을 청했고, 아비지(阿非知)가 명을 받고 왔다. 김춘추의 아버지 용춘(龍春)이 소장(小匠) 200명을 인솔하여 이 공사를 주관했다. 처음 탑의 기둥을 세우던 날이다. 장인 아비지는 본국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고 의심이 생겨 일손을 멈추었다. 홀연히 대지가 진동하고 컴컴한 속에서 한 노승과 한 장사가 금당(金堂)의 문으로부터 나와서 그 기둥을 세우고 그들은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아비지는 뉘우치고 그 탑을 완성했다. 선덕여왕 14년(645) 3월이었다.
구층탑은 꼭 1년 만에 완공되었다. 국가 존망의 위기 상황 하에서 높이가 225척(약 80m)이나 되는 거대한 구층목탑(九層木塔)을, 그것도 백제 공장을 초청하면서까지, 서둘러 세우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웅장한 탑의 모습이나 그 속에 봉안한 불사리(佛舍利)에 의해서 왕실의 존엄과 권위를 돋보이게 하려는 목적이 그 이유였을 것이다. 구층탑을 통해서 왕실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과시함으로서 실추된 여왕의 위엄 또한 돋보이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웃 나라의 항복과 구한래공(九韓來貢)의 의미를 부여하여 통일의 의지까지 탑 속에 담았다. 주변의 이웃 나라들을 구층에 대비시켜 구한이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탑의 기둥을 세우던 날 백제의 아비지가 본국이 망하는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에는 구체적으로 백제의 정복을 겨냥하고 있었다.
자장이 모시고 온 불사리(佛舍利)의 일부를 봉안한 이 탑은 종교적인 신성성을 확보했고, 신라 불교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구층탑의 종교적 신성성은 찰리종(刹利種)으로 강조된 선덕여왕의 권위와도 연결되었다. 자장이 당의 오대산에서 만났던 문수보살은 신라왕이 천축의 찰제리종(刹帝利種)이라고 했다. 인도 사성계급 중의 하나인 크샤트리아가 곧 찰제리종이다. 신라왕실이 찰제리종이라는 것은 곧 신라 왕실이 석가족(釋迦族)과 같다는 것으로 신라왕실에 신성하고 특별한 권위를 부여한 것이다.
자장은 건탑(建塔)의 공덕을 강조했다. 탑은 온갖 좋지 못한 일들을 없애고, 그 나라를 외적으로부터 수호한다. 이것이 무구정경(無垢淨經)에서 설하고 있는 건탑의 공덕이다. 태화지 곁에서 만난 신인은 자장에게 말했다. 황룡사는 호법룡(護法龍)이 수호하고 있으니 탑을 세워 나라의 안녕을 도모하라고. 불법을 수호하는 용이 지키고 있는 황룡사에 불사리를 봉안한 구층탑을 세움으로서 나라를 수호하려는 의지를 굳건히 했다.
신라 삼보(三寶) 중의 하나인 황룡사 구층탑은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국가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신라 하대 경문왕(861-875) 때는 전면적인 개축을 하기도 했고, 고려시대에도 다섯 차례나 중수했다. 황룡사 구층탑을 건립한 공덕으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다고 인식했던 왕건은 서경에 구층탑을 세워 후삼국통일을 기원하기도 했다. 불사리를 봉안한 이 탑에 대한 일반인들의 신앙적 관심 또한 적지 않았다. 혜심(慧諶 : 1178-1234)은 이 탑에 올랐던 감회를 “한 층을 다 보고 또 한층 보면서, 걸음걸음 높이 올라 점점 넓게 바라본다.”고 읊었다. 일연은 “탑에 올라 어찌 구한의 항복만을 보겠는가? 천지가 평안함을 비로소 깨달았다.”고 노래했다.
고려 고종 25년(1238)에 야만 몽고병에 의해 황룡사의 구층목탑은 불탔다. 800년을 우뚝 서 있던 탑이 한 순간에 재로 변했다. 770년의 세월이 흘러간 그 자리에는 주춧돌만 남았다. 역사의 흔적은 새삼 무상을 일깨워 준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김상현(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