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一然)은 목암(睦庵)이라고 자호(自號)했다. 목주(睦州) 진존숙(陳尊宿) 도명(道明 :780-877)의 효성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진존숙의 속성은 진(陳)씨. 도명은 휘(諱)다. 목주는 지금 절강성(浙江省) 건덕현(建德縣)으로 진존숙이 살았던 곳. 황벽희운(黃檗希運)의 제자로 목주 용흥사(龍興寺)에서 문풍(門風)을 떨쳤던 진존숙, 그는 밤마다 짚신을 삼아 몰래 길에다 두고 일부는 팔아서 죽을 끓여 어머니를 봉양했다. 이 일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를 진포혜(陳蒲鞋)라고 부르기도 했다. 일연의 효성도 이에 못지않았다. 77세의 국사(國師) 일연은 산을 내려가 95세의 노모를 모셨다. 96세로 돌아갈 때까지. 국사의 효성에 조야(朝野)가 찬탄했다. 그가 편찬한 <삼국유사>에 효선편(孝善篇)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효선편에는 진정(眞定), 대성(大城), 상득(向得), 손순(孫順), 빈녀(貧女) 등 신라의 효행 사례를 수록하고 있다. 경덕왕(742-764) 때의 상득(向得)이 흉년으로 거의 굶어죽게 된 아버지에게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봉양한 이야기와 진성여왕(887-897) 때의 가난한 여인이 어머니를 봉양한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도 비슷한 기록이 전한다. 흥덕왕(809-826) 때 손순(孫順)은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어린아이를 매장하려다 석종(石鐘)을 얻고, 아이도 살리고 부모도 봉양할 수 있었다. 손순매아설화는 자식보다 부모를 선택한 손순의 효행에 천지도 감응했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불교는 인륜을 허물고 윤리에 벗어나 있다.”
이는 유가에서 불교를 비판할 때 상투적으로 하던 말이다. 부자(父子)․군신(君臣)․부부(夫婦)․장유(長幼)․붕우(朋友) 등 인륜을 특히 강조했던 유교의 입장에서 볼 때, 출세간의 종교인 불교는 마치 인륜을 허무는 것처럼 착각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불교도 인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다만 유교와는 그 이해와 해석이 다를 뿐이다. 불교에서도 당연히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한다. “항상 부모를 존중하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이는 <화엄경>의 가르침이다. “오직 오늘만 자효(慈孝)를 찬탄하는 것이 아니라 무량겁(無量劫)에 걸쳐 항상 찬탄할 것이다.” 이는 <잡보장경(雜寶藏經)>의 교훈이다. 그리고 대각국사 의천(義天 : 1055-1101)은 강조했다. “불효만큼 큰 죄가 없고, 효도만큼 큰 복이 없다.”고. 문제는 효도의 방법이고 실천이다.

의상(義相)이 태백산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것은 문무왕 16년(676)이다. 그가 화엄대교(華嚴大敎)를 강설하자 그 소문은 두루 퍼졌고, 진정(眞定)도 군대에 있으면서 그 소문을 들었다.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의상법사가 태백산에서 불법을 풀이하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것을. 진정의 마음은 이미 화엄도량 부석사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어머니를 봉양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는 장가도 들지 못한 채 군대 복역의 여가에 품을 팔아 홀어머니를 봉양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다리 부러진 솥 하나, 그것이 집안의 유일한 재산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그 솥마저 절 지을 쇠붙이를 구하는 승려에게 보시해 버렸다. 밖에서 돌아온 진정에게 이 사실을 말하며 어머니는 아들의 생각이 어떠한지 살펴보았다. 진정은 기뻐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불사(佛事)에 시주하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솥이 없다고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이에 질그릇으로 솥을 삼아 음식을 익혀 어머니를 봉양했다.
진정은 어느 날 망설이며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효도를 마친 뒤에는 의상법사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불도를 배우고자 합니다.”
어머니가 말했다.
“불법은 만나기 어렵고 인생은 너무나 빠른데, 효도를 다 마친 후면 역시 늦지 않겠느냐? 어찌 내 생전에 네가 불도를 알았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 같겠느냐? 주저하지 말고 속히 가는 것이 옳겠다.”
진정이 말했다.
“어머님 만년에 오직 제가 곁에 있을 뿐인데, 어찌 차마 어머님을 버리고 출가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아, 나를 위하여 출가하지 못한다면 나를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비록 생전에 온갖 풍성한 음식으로 봉양하더라도 어찌 효도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나는 남의 집 문간에서 빌어서 생활하더라도 또한 타고난 수명대로 살 수 있을 것이니, 꼭 나에게 효도를 하려거든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진정은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 어머니는 즉시 일어나 쌀자루를 거꾸로 터니 쌀이 일곱 되가 있었는데, 그 날로 밥을 다 짓고 말했다.
“네가 도중에 밥을 지어 먹으면서 가자면 더딜까 염려된다. 내 눈 앞에서 당장 그 하나를 먹고 나머지 여섯을 싸 가지고 빨리 떠나도록 하라.”
진정이 흐느껴 울면서 굳이 사양하며 말했다.
“어머님을 버리고 출가하는 것도 역시 사람의 자식으로 차마 하기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몇 일간의 미음거리까지 모두 싸 가지고 간다면 천지가 저를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세 번 사양하고 세 번 권고했다. 진정은 어머니의 그 뜻을 어기기 어려워 길을 떠나 밤낮으로 갔다. 3일 만에 태백산에 이르러 의상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제자가 되어 법명(法名)을 진정(眞定)이라고 했다.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출가하기를 망설이는 진정과 당장 집을 나서라고 재촉하는 어머니의 대화는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진정 어머니의 입을 빌려서 토로하고 있는 불교의 효, 마치 웅변조로 들린다.
“불법은 만나기 어렵고 인생은 너무나 빠른데, 효도를 다 마친 후면 역시 늦지 않겠느냐?
어찌 내 생전에 네가 불도를 알았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 같겠느냐?
주저하지 말고 속히 가는 것이 옳겠다.
나를 위하여 출가하지 못한다면 나를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것.
비록 생전에 온갖 풍성한 음식으로 봉양한다고 그것을 어찌 효도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나는 남의 집 문간에서 빌어서 생활하더라도 또한 타고난 수명대로 살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효도를 하려거든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무기(無寄) 운묵(雲黙)은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1328년)에서 부모의 은혜를 강조했다.
“처음 태에 품으신 뒤부터 열 달 동안 마음을 놓지 않으며, 또한 낳을 때 고통이 끝없으나 낳은 뒤에는 괴로움을 잊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내어 품에 안아 젖을 먹여 기르며,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주신다. 그 자식이 커서는 모셔 봉양 받을 것을 잊고, 사랑하는 마음을 끊고 놓아주어 스승에게 맡겨 출가하여 출세간(出世間)의 을 닦게 하니 어버이의 은혜가 가장 깊다.”
자식이 성장하면 부모는 봉양 받을 것을 잊을 뿐 아니라, 사랑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끊고 출세간의 업을 닦게 해주는 은혜가 있다는 해석은 역시 불교적이다. 아들의 봉양을 마다하고 출가를 권하여 출세간의 업을 닦게 한 진정 어머니, 그는 풍성한 음식으로 봉양받기보다 아들이 불도를 알았다는 소식 듣기를 원했기에 아들의 출가를 권했다.
진정은 부석사 의상 문하에서 부지런히 수업했다. 의상은 제자들에게 <화엄경>과 그의 저서 <화엄일승법계도>를 강의했고, 그리고 자주 훈계했다. “마땅히 마음을 잘 쓰도록 하라.” 그리고 누누이 강조했다. “언제나 깊이 생각하도록 하라”고. 의상에게는 십대제자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진정(眞定)․상원(相元)․양원(亮元)․표훈(表訓) 등은 더욱 뛰어나 사영(四英)이라고 불렸는데, 진정은 사영 중의 한 명이었다.
진정은 출가한 지 3년 만에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다. 진정은 가부좌를 하고 선정(禪定)에 들었다가 7일 만에 일어났다. 설명하는 이는 “추모와 슬픔이 지극하여 견디기 어려웠으므로 정수(定水)로써 슬픔을 씻은 것”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선정으로써 어머니의 환생하는 곳을 관찰했다”고 했으며, 또 어떤 이는 “실리(實理)와 같이 하여 명복을 빈 것”이라고 했다.
선정에서 나온 뒤에 이 일을 스승 의상에게 아뢰었다. 의상은 문도를 거느리고 소백산의 추동(錐洞)에 들어가 풀을 엮어 초막을 짓고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중에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알뜰한 제자 지통(智通)은 스승의 강의를 정리했다. 90일간의 강의 요지를 정리해 두 권의 책으로 묶고 <추동기(錐洞記)>라 하여 세상에 유통시켰다. 혹은 <지통기(智通記)>라고도 했다. 추동은 풍기의 송곳골로 비로사로 가는 초입의 좁은 골짜기에 있다. <추동기>는 고려 전기까지 유통되었다. 저자가 법장(法藏)으로 표기된 채 일본에 전해오는 <화엄경문답(華嚴經問答)> 상하 2권이 의상의 <화엄경> 강의를 지통이 저리했던 <추동기> 바로 그것이다. 필자가 이 사실을 학계에 보고한지도 이미 10여 년 세월이 흘렀다.
돌아간 진정의 어머니, 오직 아름다운 그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한 화엄법회는 90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석 달 동안이나 <화엄경>의 진리를 들을 수 있는 좋은 인연. 그것도 신라화엄시조 의상의 강설을 들을 수 있었다니, 어찌 행복하지 않았으랴. 강경(講經)이 끝나자 그 어머니는 아들의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이미 하늘에 환생했다.”
“어머님을 버리고 출가하는 것도 사람의 자식으로 차마 하기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몇 일간의 미음거리까지 모두 싸 가지고 간다면 천지가 저를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울면서 홀어머니를 떠나갔던 진정. 문전걸식하며 살던 여인. 석 달간의 <화엄경> 강의를 듣고 이제는 하늘에 환생했다는 어머니. 화엄대교의 정법을 듣고 해탈한 영혼은 훨훨 하늘을 날았을 것이다. 더 이상 아무 미련도 집착도 없이.
“갖가지 음식과 여러 진귀한 보배로 공양하는 것은 부모의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니요, 부모를 인도하여 바른 법으로 향하게 하여야만 은혜를 갚음이라고 한다.”
<부사의광보살소설경(不思議光菩薩所說經)>의 말씀이다. 결국 불교의 효는 부모를 인도하여 정법(正法)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해탈(解脫)케 하는 것이다.
효선편(孝善篇)의 효선이란 효와 선 두 가지를 가리키는데, 선은 옳고 바른 정법(正法)을 의미한다. 일연이 진정의 출가수행을 효선쌍미(孝善雙美) 즉 효와 선 두 가지가 아름다웠다고 한 뜻도 여기에 있다. 불교에서는 스승과 삼보와 정법(正法)에 효순(孝順)할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8세기 중반의 대성(大城)은 전세(前世)와 현세(現世)의 이세부모(二世父母)에게 다 같이 효도 했다고 한다. 모량리(牟粱里)의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는 집이 궁색하여 생활이 어려움에 부자 복안(福安)의 집에 품팔이를 하고, 그 집에서 준 약간의 밭으로 의식의 자료로 삼았다. 모자는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흥륜사(興輪寺)에서 개최하는 법회에 고용살이로 얻은 밭을 보시했다. 여기까지가 김대성의 전생 이야기다. 죽은 대성(大城)은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아들로 환생(還生)했다. 전생에 닦은 보시 공덕에 의해서. 그리고 김대성은 석불사(石佛寺)와 불국사(佛國寺)를 창건하여 전생의 부모와 금생의 부모 은혜에 보답했다. 한 몸으로 전생과 현생의 이세(二世)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었던 것도 좋은 보시의 영험 때문이었고. 가난하던 전생에도 어머니를 권하여 보시공덕을 닦음으로서 효도했던 대성, 그는 금생에 두 절을 지음으로써 이세부모에게 효도했던 것이다.
8세기 중반에 활동한 진표(眞表)는 훗날 아버지를 절에 모시고 함께 불도를 닦음으로써 효도를 했다. 진표는 12세에 출가의 뜻을 품고 아버지에게 말씀 드렸더니,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의논하여 허락했다. 진표는 두 번 절하고 말씀드렸다. “삼계(三界)의 길은 불안하고 군생(群生)과 함께 살아 구별이 없습니다. 오늘 이후에는 비록 세상에서 만나 뵙기 어려워도 깨달음을 얻는 날에는 한 곳에서 서로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라고. 훗날 진표는 금강산 용연(龍淵) 아래에 발연사(鉢淵寺)를 창건하고 아버지를 모셔다 함께 도업(道業)을 닦았다. 그리고 금강산에 상부사의암(上不思議庵), 중부사의암, 하부사의암 등 세 부사의암과 안양암(安養庵)을 창건했다. 진표가 아버지를 모시고 아침저녁 봉양하며 왕래한 곳이 안양암이고 모든 산들이 눈 아래에 펼쳐지는 높은 언덕을 효양(孝養)이라 한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오지만, 부모의 몸을 빌려서 이 세상으로 올 수 밖에 없다. 자식이 자라면 사랑하는 마음도 끊고 놓아 준다. 자신의 몸을 통해서 왔을망정 자신의 소유로 착각하지는 않는다. 둥지를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날아가기를 빌어준다. 자식은 잊지 못한다. 그 지중한 은혜를.
김상현(동국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