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757년 무렵의 어느 날 신라의 대궐.

효성왕(孝成王)은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아우 헌영(憲英)이 태자가 되었다가 742년에 왕위에 올랐으니, 곧 경덕왕(742-764)이다. 경덕왕의 왕비 삼모부인(三毛夫人)은 순정(順貞)의 딸, 그녀는 어머니 수로부인(水路夫人)을 닮아 예뻤을 것이다. 왕은 2년(743) 4월에 각간(角干) 김의충(金義忠)의 딸을 후비(後妃)로 맞아서 만월부인(滿月夫人 : 시호 景垂太后)이라고 했다.

왕비에게도 후비에게도 후사(後嗣) 소식은 없었다. 십 수 년을 기다려 보았는데도. 이 일로 왕의 고민은 점점 늘어만 갔다. 경덕왕의 옥경(玉莖)은 길이가 8촌(寸)이었다고 한다. 어떻게 왕의 음경 크기까지도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스스로 자랑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1척(尺) 5촌(寸)이나 되었다는 지철로왕(智哲老王)의 그것에 비하면 초라하기만 한데도. 아무튼 이를 기록한 다음에 경덕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고 한 것으로 보면, 왕비보다는 그에게 더 문제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왕은 13년(754)에 황룡사의 종을 만들었다. 무게가 49만 7천 5백 81근이나 되는 이 거대한 종은 봉덕사종(에밀레종)보다도 4배나 더 큰 것이었다. 종의 시주(施主)는 삼모부인과 효정(孝貞) 이간(伊干)이었다. 효정은 성덕왕 13년(714) 정월부터 17년 정월까지 4년 동안 중시(中侍)를 역임했던 인물이다. 국왕과 왕비는 왜 이처럼 큰 종을 만들고자 했을까? 아들 얻기를 간절히 발원했던 것은 아닐까? 황룡사종이 만들어지던 경덕왕 13년까지는 삼모부인으로 호칭되던 왕비,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출궁(出宮) 당했다. 시주 공덕의 영험도 없이.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이 출궁의 이유였다. 그래도 그를 사량부인(沙梁夫人)에 봉했던 것은 특별한 대접이었던 것 같다.

만월부인으로부터도 후사의 소식은 없었다. 14년의 기나긴 세월을 기다렸는데도. 아들에게 왕위 물려주기를 열망하던 경덕왕은 고승의 법력(法力)을 빌려서라도 그의 희망을 이루고자 했다. 그래서 표훈(表訓)을 궁중으로 초청했다. 의상(義相)의 제자 표훈은 화엄학승(華嚴學僧)으로 유명했을 뿐만 아니라 불국사에 살면서 항시 천궁(天宮)을 왕래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당대의 대표적 고승이었다.

후사를 얻고자 하는 경덕왕의 집념은 대단했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왕비 삼모부인을 출궁시킬 정도로. 그러나 후비를 맞은 지 14년의 세월이 흘러도 후사를 얻지 못하자 그는 초조했고, 동시에 조정의 중신들도 왕위 계승 문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굳이 아들을 얻어 왕위를 물려주려고 고집하는 왕은 이미 나이가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비록 아들을 얻는다고 하드라도 그 아들은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게 되고, 어린 왕의 등장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음을 예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이에 표훈은 국왕에게 간곡하게 간했다. 천제(天帝)의 권위를 빌리면서까지.

“아들을 고집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왕은 이미 표훈의 말을 새겨듣지 않았고, 천제의 우려함도 개의치 않은 채 자신의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같은 말을 되풀이 할 뿐이었다.

“아들을 얻어서 뒤를 이을 수만 있다면, 비록 나라가 위태롭더라도 만족하겠습니다.”

기어이 경덕왕은 아들을 얻었다. 만월왕후(滿月王后)를 맞이한 지 15년만인 758년에. 왕은 매우 기뻐하였다. 19년(760)년 7월에 세 살 어린 아들 건운(乾運)을 태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765년 6월 왕은 세상을 떠났다. 여덟 살 태자가 즉위하니, 곧 혜공왕(765-780)이다. 태후가 섭정(攝政)을 시작했지만, 정사(政事)가 다스려질리 없었다.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표훈이 예상했던 일이고, 욕심에 사로잡힌 경덕왕이 고집 버리지 못한 때문이었다.

“혜공왕은 장년이 되자 노래와 여색에 빠져 각처로 돌아다니며 노는 것이 절도가 없고 기강이 문란해서 천재(天災)와 지이(地異)가 여러 차례 나타났다.” 혜공왕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썼다. “왕은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날부터 왕위에 오를 때까지 항상 부녀처럼 놀아서, 비단주머니 차기를 즐기고, 도류(道流)와 함께 희롱했다. 그러므로 나라에 대란이 있었다.”

혜공왕 4년(768) 7월 대공(大恭)이 반란을 일으켜 33일간이나 왕궁을 포위했다. 왕의 군사가 이를 평정하기는 했지만, 이때부터 전국의 96각간(角干)이 서로 싸울 정도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다. 770년 8월에 김융(金融)이, 775년 6월에는 김은거(金隱居)가, 이 해 8월에는 염상(廉相)이 차례로 모반했다. 그래도 이 난들은 진압할 수 있었다. 777년에는 3월과 4월 두 번이나 왕경에 지진이 일어났다. 상대등 김양상(金良相)이 상소하여 시국을 극론(極論)했다. 780년 2월 김지정(金志貞)이 모반하여 왕궁을 포위했다. 김양상 일파의 제거를 노리는 친위 구테타 성격이 짙었다. 김양상과 김경신(金敬信) 등은 군대를 일으켜 김지정 일파를 진압했다. 그리고 혜공왕도 시해했다. 이로써 태종무열왕으로부터 계승되어 오던 신라 중대(中代) 왕실은 마감되고, 하대(下代)의 혼란이 시작되었다.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던 표훈의 말이 맞았다.

충담(忠談)은 경덕왕의 청에 의해 지은 향가 안민가(安民歌) 끝 구절에서“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는 태평하리라.”고 읊었다.

그러나 나라가 위태롭더라도 아들을 얻어 왕위를 물려주기를 고집했던, 그래서 표훈의 건의와 하늘의 경고까지도 무시했던, 후사를 얻은 뒤에는 풍악(風樂)에 빠져버렸던, 주색에 빠져 나라를 망쳤던 걸(傑)과 주(紂)를 거울삼아 허물을 고쳐 나라의 수명을 길게 해야 할 것이라는 간언(諫言)을, 그것도 지난날의 총애하던 신하 이순(李純)으로부터 면대한 자리에서 들어야만 했던 경덕왕, 그는 임금답지 못했다.

민심(民心)이 곧 천심(天心). 그러기에 표훈은 천제의 경고를 통해 민심을 왕에게 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채지 못했던 경덕왕, 그로부터 신라 중대 왕실은 이미 기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