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성왕은 즉위 16년(538년)에 사비로 도읍을 옮겼다. 뒤로는 백마강이 흐르고 앞으로 평야가 펼쳐지는 부여는 중흥의 큰 뜻 이루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123년간의 왕경 시절 부여에서 꽃 핀 백제문화, 백마강 주변에는 여러 유적과 전설 아직도 전해온다. 천정대, 왕흥사지, 부소산성, 고란사, 낙화암, 자온대, 조룡대 등.

부소산 서북쪽 백마강 건너 울성산성 산록에 왕흥사(王興寺)가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절은 법왕 2년(600)에 공사를 시작하여 무왕 35년(634)에 완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 발굴된 청동사리함 명문에는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서 577년에 이 절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절 이름 ‘흥왕사’에는 왕실 융창의 염원이 담겨 있다. 이 절은 사비 천도 이후 백제 왕실의 대표적 원찰이었다. 그러기에 국왕은 자주 배를 타고 절로 가서 향 피우며 나라의 평안을 기원했다. 왕이 행차할 때면, 먼저 강가 언덕의 바위에서 절을 했다. 10여 명이 앉을 정도의 이 돌은 저절로 따뜻해 졌다. 그래서 이 바위를 돌석, 즉 구들돌이라 했다. 규암나루 북쪽에 우뚝 솟은 암벽이 곧 그 돌이고, 여기에 새겨진 자온대(自溫臺)는 우암 송시열(1607-1689)의 글씨다.

고란사 앞에서 강을 거슬러 가면 범 바위가 나타나고, 부근의 동북 편에는 임금바위와 신하바위도 보인다. 이곳이 호암사(虎巖寺) 정사암(政事巖)이다. 백제에서는 재상을 뽑기 위해서 후보 3, 4명의 명단을 상자에 넣어서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 열어서 이름 위에 점이 찍혀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다. 이런 연유로 이 돌을 정사암이라고 했고, 흔히 천정대(天政臺)로도 불렸다. 1349년 5월에 배를 타고 백마강을 여행했던 이곡(李穀)은 주행기(舟行記)를 남겼다. 그때 들은 천정대설화는 이렇다.

조룡대로부터 서쪽으로 5리쯤 가면 강의 남쪽에 호암사가 있다. 바윗돌이 벽같이 서고, 절은 바위를 지고 있다. 바위에 호랑이의 발자국이 있어서 마치 잡고 올라온 것 같다. 바위 서쪽에 천 척(尺)이나 되는 낭떠러지가 있고, 그 꼭대기를 천정대(天政臺)라고 한다. 대개 백제 때에는 하늘과 더불어 통할 수가 있어서, 사람을 쓸 때면 그 이름을 써서 대 위에 두고, 임금과 신하가 포(袍)와 홀(笏)을 갖추고 북쪽 언덕 모래톱에 늘어 엎드려, 하늘이 그 이름에 점찍는 것을 기다린 후에 취하여 썼다. 향토 사람들이 서로 전하는 말이 이와 같다. 호암으로부터 걸어서 그 대에 이르면, 대에 남은 터는 없고, 오직 돌이 반공에 솟은 것뿐이다.

천정대 주변에는 지금도 백제 기와가 발견된다.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곡이 찾았던 14세기 중반에는 천정대의 남은 터는 없고, 호암사만 있었다. 하늘이 점찍어 주는 인물로 재상을 삼고자 했던 백제의 정치는 곧 하늘의 뜻을 따르려는 것이었다.

마지막 왕은 달랐다. 의자왕은 하늘의 뜻은 고사하고 충신의 간언도 듣지 못했다. 그는 신라를 공격하여 여러 차례 승리했다. 2년(642) 7월 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고, 8월에는 대야성을 불태웠다. 9년 8월에는 석토성 등 7성을, 그리고 15년(655) 8월에는 신라의 30여 성을 빼앗았다. 계속된 승전보로 의자왕은 신라를 주머니 속의 물건인양 생각했다. 16년(656) 3월 왕은 궁녀와 더불어 주색에 빠졌다. 좌평 성충(成忠)이 극간했다. 왕은 분노하며 그를 옥에 가뒀다. 다시는 간하는 사람 없었다.

19년 무렵부터 불길한 일들이 자주 터졌다. 19년(659) 5월 사비하에 길이 30척의 고기가 죽었다. 9월 궁중의 홰나무가 사람이 곡하듯 울었다. 밤에 궁궐의 남쪽 길에서 귀신이 울었다. 20년 봄 사비하의 물이 핏빛처럼 붉었다. 4월 수만 마리의 두꺼비와 개구리가 나무 위로 모였다. 6월 왕흥사 승려들은 보았다. 큰물을 따라 배의 돛과 같은 것이 절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모두 망국의 조짐이었다. 그래도 주색에 빠진 왕은 몰랐다. 20년 6월 귀신이 궁궐에 나타나 외쳤다.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 그리고는 땅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곳 파보니, 거북 한 마리 있고, 등에는 “백제는 둥근 달과 같고 신라는 초생 달과 같다.”고 씌어 있었다. 무당은 말했다. “둥근 달은 가득 찼기에 곧 기울 것입니다.” 노한 왕이 그를 죽였다. 어떤 아첨꾼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왕성하게 되고 신라는 장차 미약해진다는 뜻입니다.”왕은 기뻐했다.

기어이 일은 터졌다. 660년 7월 당의 13만 대군과 신라의 5만 군사가 부여를 향해서 밀려오고 있었다. 9일. 계백장군 5천 결사대와 함께 황산벌전투에서 분전타가 전사했고, 이 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도 웅진강 입구로 쇄도했다. 12일. 나당연합군 사비성 공격. 강 건너에 진을 친 당나라 군사. 이상한 일이었다. 당나라 군사가 강을 건너려고 하면, 구름과 안개가 피어올라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이러기를 몇 차례, 사람을 시켜 강을 살펴보도록 했다. “강에는 여울돌(磯石)이 있고, 그 밑에 용혈(龍穴)이 있어서 백제를 호위하는 때문입니다.” 소정방은 술법(術法)하는 자의 계교(計巧)를 써서 낚시 밥을 던져 용을 낚으려 했다. 백마(白馬)를 미끼로 사용했다. 미끼를 물어버린 용, 다시는 안개와 구름을 피우지 못했다. 백제를 지키던 백마강의 호국용, 그 용이 결정의 순간에 낚시 밥에 홀리고 말다니.

도성을 향해 진격해 오는 연합군 18만, 이에 맞서 싸우던 백제군 1만 명 전사. 7월 13일 밤.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했다. 성첩(城堞)에 당나라 깃발 나부끼기 시작하자, 궁녀들은 대왕포(大王浦) 높은 바위 위에서 강물로 떨어졌다. 무상한 꽃잎처럼. <삼국유사>는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이라고 했지만, 흔히 낙화암(洛花岩)이라 불렀다. 660년 7월 18일. 의자왕 사비성으로 와서 항복. 그렇게 끝났다. 백제 678년의 막은 내렸다.

패망한 왕조의 어느 도읍지가 쓸쓸하지 않으랴만, 백마강의 저녁놀은 더욱 슬픈 역사를 되새기게 한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의 강. 그러나 백마강은 무정한 세월 따라 흐르지 못한다. 고란사 저녁 종소리 평화롭고 강물에 스며드는 달빛 비단결 같아도 조룡대를 휘감아 흐르는 강물은 아직도 아우성친다. 버티는 용과 끌어내려는 낚시꾼, 이 때문에 조룡대에는 낚시 줄 흔적과 용의 발자국 새겨졌고, 세월의 물결에도 선명하게 남았다. 1348년의 긴 세월 흘러도 역사의 강 백마강은 의자왕의 한 마디 후회는 잊지 못한다. “성충의 말 듣지 않아 이 지경 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