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저는 불교대학의 7호관 학습정보 플라자에서 컴퓨터를 쓰고 있습니다. 도서관의 일부인데요, 도서관과 다른 점은 혼자서 조용히 공부하는 방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세미나를 한다든지 토론을 한다든지 뭔가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우리의 경우에는 학과마다 학과실을 하나씩 마련해 주었는데, 과연 우리 학생들이 얼마나 토론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를 오가면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요, 이 교토통신 역시 이곳에서 쓰고 있습니다.
왜 교토통신과 같은 글을 썼으며, 지금도 쓰고 있는 것일까요?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 머리말에서 엔닌(圓仁)스님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엔닌 스님이 당나라에서 했던 생각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다만 하나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당시 뒤쳐져 있던 일본의 불교 수준을 국제적이었으며 최첨단이었던 당나라의 수준만큼 끌어올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저 자신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미미한 존재로서 학계의 말석에 자리할 뿐이지만, 우리의 불교학이 하루라도 빨리 세계수준에 도달하여, 세계의 학계에서 평가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인도철학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인도철학의 과제는 오히려 인도의 철학을 토착화하여 우리의 철학, ‘우리의 인도철학’으로 만들어가는 데 있다고 봅니다. 그런 관점으로 인하여 인도철학의 불교적 해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 다음 세대에는 그렇게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한 가지 생각 뿐입니다. 물론,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 안에는 우리 불교가 보다 밝은 미래를 가졌으면 하는 염원에서, 그 미래를 위한 설계라는 차원에서 일본불교 참고하기라는 의미 역시 있겠습니다만, 오늘은 불교학의 차원에서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불교학의 수준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높아져야 한다.
바로 이 염원으로 인하여, 인도에 갔을 때는 『배낭에 담아온 인도』(여시아문)를 썼으며, 일본에 와서 교토통신을 쓰고서 그 일부를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정우서적, 2006)로 꾸며 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일종의 '특파원 보고' 내지는 세작(細作)의 첩보보고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선진 학계에 대하여 일종의 간첩행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저의 학문적 지향성과는 다르지만 불교사본의 문헌학적 연구 동향을 보고한 「세계는 지금 노르웨이로 가고 있다」라는 글을 쓴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앞으로 혹시 제가 다른 어떤 나라, 예컨대 미국이나 유럽을 가게 되면 그때는 역시 그 나라에 대한 글, 그 나라의 문화에 대한 글, 그 나라의 학문적 전통을 살피면서 우리를 돌아보는 글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저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의 후학들 역시 이러한 자각을 좀더 많이 가졌으면 합니다. 지금 유학이나 단기 교환학생으로 외국에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개인의 발전과 더불어 그 이상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의 학문을 끌어올리는 데 내가 이바지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을 좀더 생각해 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아쉬운 마음이 들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이 홈페이지에 '유학정보실'이라는 방이 있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해외에 연수를 간다든지 유학을 한다든지 해서 남이 경험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게 되면, 뒤에 오는 후배들의 시행착오를 줄여주기 위해서라도 그 경험담이나 노우 하우를 좀 모아놓자, 고 하는 취지에서 만들었던 방입니다. 해외연수를 다녀온 몇 몇 학생에게 그런 부탁을 한 일이 있지만, 아무도 그런 일에 신경을 쓰지 않더군요. (다만 유학의 경우에는 그 과정에 있을 때는 거의 따로 시간 내기 어려울 것으로 짐작됩니다만, 지나고 나면 좀 여유를 가지고 그런 글을 좀 써주신다면 좋겠다는 생각은 합니다.)
우리나라 대표로서 출전하였다라는 자각이 좀 더 아쉬웠던 것입니다. 적어도 불교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공심(公心)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마음이 불심이고, 신심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교토에 살 때, 함께 지냈던 강종원 선생의 경우에는 그런 마음이 매우 강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렇게 우리 불교학의 수준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생각 자체는 교토에 오기 전부터 이미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에 제 자신이 아무런 도움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자각에서 교토로 오게 된 것입니다.
「세계로 간다는 말의 의미」라는 글 속에서 그 당시의 생각을 좀 엿볼 수 있습니다. 세계 학계 속에서 활동을 하여야 한다, 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는데요. 그렇다면 제가 「세계로 간다는 말의 의미」 속에서 했던 이야기를 저 자신은 얼마나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일까요? 저의 교토 이후를 돌아보겠습니다.
우선, 일본의 학계에서 발표를 하자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세 차례 시도를 하였습니다. 첫째는 일본인도학불교학회에서 「아르쥬나의 회의에 보이는 의미」는 주제로, 제가 늘 공부하는 『바가바드기타』에 대한 발표를 하였습니다. 이 논문은 사사키 히까리(佐佐木 日嘉里) 선생님의 일본어 감수를 받으면서, 여기 있을 때 쓴 논문입니다. 2003년 가을에 여기 불교대학에서 개최된 학회에서 발표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뭔가 번지 수가 맞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였습니다. 제가 이미 해석을 위하여라는 글 속에서, 일본학계의 학풍이 제가 지향하는 학풍과는 서로 다르다는 점을 말씀드린 바 있었는데요. 그 간격을 절감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세계화라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우리 자신의 것을 그대로 세계에 옮기고 번역하는 것으로 세계화가 잘 이루어질 것인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데요. 그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세계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나 방법론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호응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만약 제가 일본인도학불교학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으려면 그 사람들, 그 주류의 사람들이 하고 있는 작업, 그들이 쓰는 언어, 그들이 쓰는 방법론을 취하면서 그 세계 속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저의 것이 아니지요. 세계화를 지향하면서도 그 장벽에 막힌 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화에 성공하려면, 결국은 제가 말하는 자기철학은 없게 됩니다. 이 길은 유학파가 아니라면 현실적으로 어려운 길입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세계화에 대한 비판과 반론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그러한 비판은 일리 있는 측면이 있다고 저 역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져만 갑니다.
나머지 두 번의 논문은 모두 『천수경』과 관련해서인데요. 이 역시 일본 학계에서는 무관심한 분야이고, 언제 누가 읽어줄 지 알 수 없는 글을 쓰고 발표한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좋은 인상을 준 것은(많은 관심을 받은 것은) 역시 하나조노(花園) 대학 국제선학회에서 발표한 선종에서 대비주를 외우는 이유(선학연구 제81호, 하나노조대학. ; 천수경의 새로운 연구, 민족사, 2006)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관심을 갖는 선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들이 미쳐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였습니다. 이런 방향이 한 줄기 활로(活路)가 아닌가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저는 1년동안, 가족이 한국에 있었음에도 한 번도 귀국을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바로 일본어 때문입니다.
영어는 안 되어도, 일본어라도 하자. 그러면 50-60%는 된다.
미국의 불교학자들의 저서에서 참고문헌을 한번 보십시오. 대개 일본어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본어로 발표하면 그 정도는 읽힐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하루라도 더 있자, 그러면 조금이라도 일본어는 더 는다.
이 역시 곧 절망으로 바뀝니다. 학회에 가서 발표를 한 결과, 일본의 학자들이 편안하게 질문을 하거나 반론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일본어는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외국어대 인도어과에서는 힌디어 교수를 초빙할 때, 인도에서 3년 이상 살았는가를 기준으로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공감이 갔습니다. 귀국후에는 점점 더 일본어를 잊어가게 됩니다.
3년 이상 외국에서 공부하는 길, 어떤 길이 있을까요?
유학 외에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영어 공부 역시 현실의 노동을 핑계로 전혀 진척하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에 저의 불행(?)이 있습니다. 유학을 하지 않은 국내파라면 국내파로서의 프라이드를 찾아서 거기에만 굳건히 의지한 채 유학파를 경원시 하면서 나름으로 행복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는 그것이 아니지요. 그렇다고 해서 유학파인 것도 아니고, 세계화에 성공한 것도 아니고 ---.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 국내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불편할지도 모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국내에서 공부하는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
저도 모릅니다. 어느 쪽에도 자기 학문의 정체성을 뿌리박지 못한 채, 국내파의 한계를 고스란히 갖고 있으면서(장점 역시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지만), 유학파처럼 세계적 학문으로의 지향을 갖고 있는 자의 흔들림은 아마도 계속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행(?)한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질문하는 우리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흔들림 속에서 괴로워 하면서 오늘까지 살아가고 있기에 나는 부끄럽지는 않다.
또 바로 그러한 흔들림이야말로 내 학문의 정진과 새로움을 위한 촉진제/양식이 되어
왔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면서, 저로서는 이 흔들림을 우리 학생들에게 좀더 전염시켰으면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좀더 고민 속으로 몰아넣고 싶습니다. 보다 젊은 시절에 말입니다.
그때 그 시절 제가 생각했던 것 중에 중요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면서 시작해 보기로 합니다. 근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요코하마 베어스타스로 이적한 구도(工藤)라는 프로야구 선수이야기가 TV에 자주 나옵니다. 그는 지금 전지훈련을 갔는데, 26번째 맞는 겨울 전지훈련이라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프로에 갔다고 생각해도 26년이나 프로야구 선수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이는 40대 중반입니다. 그것도 그는 투수입니다. 현재 215승을 올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이 여기서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은 듯 합니다. 불교학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불교학과 일본 불교학의 전체적 수준 차이를 낳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에는 바로 수(數)의 차이가 있습니다. 즉 학자층의 두께 말입니다.
이 차이를 좁히는 데에는 두 가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많은 불교대학(불교교양대학을 포함하여)을 만들어서 불교학자들의 활동의 현장을 늘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학자들 힘 밖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불교학자들 내적으로는 어떻게 노력할 수 있을까요? 오래 사는 것입니다. 즉 학문적으로 오래 사는 것입니다. 학자로서의 학문활동 하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저는 오노다 슌죠(小野田俊藏) 선생으로부터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침 그날 저희들 앞의 책상에 나가오 가진(長尾雅人, 최근 선생의 저서 『중관과 유식』이 소운스님 번역으로 동국대 출판부에서 간행되었습니다. 제 책에 많이 나오는 아라마키 선생의 은사입니다.) 선생의 고희를 기리는 영어논문집이 놓여 있었습니다. 오노다 선생의 말입니다.
지금 나가오 선생은 연세가 아흔 셋인데, 지금도 집으로 학생들을 불러서 범어문헌을 읽고 있다.
일본의 학자들에게 왜 『전집』이 수십 권씩 나오는지 그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천재라서가 아닙니다. 다만 꾸준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즈키 다이세쯔, 나카무라 하지메, 히라카와 아키라 ---- 등등 누구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전집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 원동력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저 에이헤이지(永平寺) 벽에 써붙여놓은 잠언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현역이다.
나가오 가진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서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공부를 조기(早期)에 놓게 만드는가? 조로(早老)케 하는가? 우리 학자들로 하여금 학문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는가?
정말 우리도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공부만 하자.
그때 제가 생각한 아무 것에는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불교학자들에게 공부를 조기에 놓게 만드는 유혹은 세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보직. 둘째, 학회의 임원활동. 셋째, 외부의 강연활동.
몇년전에 우리 학교에 교환교수로 오신 슈쿠도쿠(淑德)대학의 이소오카 데츠야(磯岡 哲也) 교수에게 한국의 대학교수는 어떤지 그 인상을 몇 번이나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일관되게, 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한국의 대학교수들 너무 바쁘다.
우리나라에서 지금 학자들을 매우 바쁘게 만드는 원인은 대개 학문 외적인 것들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씀드린 세 가지 일은 필요한 일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보직이라는 것도 대학이라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존재하는 한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학회의 임원활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활동을 돌아가면서 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학회가 유지되고, 우리들이 어떻게 논문을 발표할 장(場)을 유지해 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외부 강연활동 역시 반드시 악은 아닙니다. 대학의 사회에 대한 봉사이기도 하고 기여이기도 합니다. 교수들의 업적평가에는 그러한 봉사활동 역시 평가대상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세가지를 일종의 '독'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리고서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외치면서, 공부 이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자고 맹서에 맹서, 또 맹서를 하였습니다. 아침에도 하고 저녁에도 하였습니다.
법보신문의 이재형 기자가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를 읽은 독후감으로 바로 이 점을 지적하더군요.
선생님, 홀로결사를 주장하셨는데, 보조스님께서도 소임을 나누어서 경영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소임을 나누어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임을 나누어 맡아서 수고하는 분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결사를 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여전히 ----.
그렇게 아침 저녁으로 맹서를 하면서, 귀국하면 아무 일도 안하고 공부만 하겠다던 저는 과연 어떻게 하였을까요? 학과장 2년을 하였고, 불교대학원 교학부장이라는 보직도 몇 개월 하였습니다. 열심히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학회의 소임 역시 했습니다. 외부의 강연활동 역시 더러 하였습니다. 아, 차디찬 맹서는 어디갔던 것일까요. 그럼, 이 세 가지 일을 '삼독'으로부터 해제해도 좋을까요?
아닙니다. 여전히 그것들은 세 가지 독입니다. 하지 않을 수 있다면 하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즈츠 도시히코(井筒俊彦) 선생같은 분은 자기 책을 주로 내주던 출판사인 이와나미(岩波)문고에도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 제가 썼지요.
공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공부한다'는 상(相)에만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105쪽)
저는 지난 3년 반 동안 자의든 타의든 세 가지 독에 적잖이 물들면서 시간을 허비한 일이 많았던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죽을 때까지 현역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잘 하든 못 하든 논문을 쓰고 책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수준이 세계적이든 그렇지 못하든, 우리가 이제 후학들을 위해서 진정으로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은 다른 그 무엇이 아닙니다. 장학금을 모아 주는 것도 아니고, 학회를 발전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어떤 학문 외적인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학문적인 일, 그것 뿐이 아닌가 합니다. 논문 쓰고, 책 쓰는 일입니다.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일 것입니다. 정말 우리 후배들에게 고(故) 나가오 가진 선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렇게 학문일생(學問一生)을 보내는 선배들의 모습을 만들어서 보여주자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을 저는 그때 그 시절 바로 이 교토에서 했습니다. 선배, 동료, 그리고 후배들 모두 저의 이 마음을 지켜주시길 빕니다. 이 마음이 흔들리는 저를 발견한다면 가차없는 질정(叱正)을 해 주시길 빕니다.
오늘은 지금으로부터 4년 반에서 3년 반 전에 제가 했던 생각들을 되돌아 보면서, 교토 이후의 제 삶이 과연 얼마나 그에 충실하였던 것인지 반성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뿐입니다.
2007년 1월 1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