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와서 며칠 지나지 않아서 '불교대학'의 국제교류과에 인사를 하러 갔습니다. 국제교류과는 제가 여기 있을 때 많은 신세를 진 행정부서입니다. 그래,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 책도 드릴 겸해서 간 길이었습니다. 마침 요시다 카즈히코(吉田勝彦) 선생이 계시더군요. 이 분은 연세대에서 7년 유학을 하신 분으로서 한국 담당 직원으로 한국인 유학생을 여러가지로 살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시다 선생이 제게 책을 한 권 주시지 않겠습니까. 바로고려대장경의 연구(동국대 출판부, 2006)입니다. 이 책은 작년에 비로소 나왔지만, 그 책의 태동을 알리는 이야기를 비록 짤막하지만 제가 이미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에서 한 일이 있습니다. '우수한 고려대장경에 문제많은 영인본'에서 바바 히사유키(馬場久幸) 선생의 고려대장경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후기에 이렇게 덧붙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2003년부터 동국대와 일본의 불교대는 장기적인 공동연구의 주제를 '고려대장경'으로 하여 각 2인의 교수님이 참여하고 있습니다.(257쪽)
요시다 선생이 제게 주신 책 고려대장경의 연구는 바로 이 공동연구의 결과물이 집성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 학교와 일본의 자매대학들 사이에는 매년 학술대회를 개최하던 것이 초창기 교류의 모습이었습니다. 불교대와의 사이에도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러한 학술회의가 성과물의 집적이 없이 일회용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일면서 새로운 교류의 형태를 모색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우리 학교측에서 먼저 주체적으로 제안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불교대학 학장이면서 여기 '불교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하신 보광스님(불교대학과의 교류에는 코디네이터/창구 역을 하신 것같습니다.)께서 공동연구의 형태로 전환하자는 제안을 하셨다고 합니다.(『고려대장경의 연구』, 254쪽) 불교대학 쪽 카운터파트는 나미카와 다카요시(並川孝儀, 당시 문학부장) 선생입니다.
이때가 2001년 10월의 일이었다 합니다. 그리고 그 주제를 '고려대장경'으로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매우 적절한 주제선택이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뒤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고려대장경이야말로 한일/일한 간의 불교교류의 한 증거/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학교에서는 불교학과의 계환스님과 인도철학과의 정승석 교수님이 연구자로 나서게 되었고, 여기 불교대학에서는 불교학과의 마츠나가 치카이(松永知海) 선생과 사학과의 카이 히데유키(貝 英幸) 선생이 공동연구자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마츠나가 선생에 대해서는 역시 바바상 이야기를 하면서 짧게나마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카이 선생은 제가 모르고 있던 분입니다. 이 네 분의 논문들이 한국어와 일본어로 함께 수록된 책이 고려대장경의 연구입니다.
몇 일 동안 이 책에 실린 네 분의 논문을 검토해 보면서 공동연구는 성공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 분 모두 적지 않은 공력을 들인 것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3년의 연구기간이었다고 하는데, 그 기간도 빠듯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계환스님은 고려대장경의 성립 배경에 대해서 기존의 연구성과를 전부 살펴보시면서 새롭게 정리/종합하시고 있었으며, 일찍이 고려대장경연구소의 의뢰를 받아서 그 해제를 작성하였던 정승석 교수는 고려대장경의 불전명이 정식화(正式化)되는 양식을 살폈습니다. 이 논문은 고려대장경에 수록된 모든 불전의 이름을 다 조사하였는데요. 개원석교록 등의 목록류를 다 살피면서, 혼란스럽기만 했던 불전의 이름이 권위있는 모습으로 정착되어 가는 과정을 조사하였습니다. 방대한 표를 통하여 일일히 그 불전 이름의 양태를 비교할 수 있도록 부록에 실었는데요. 그것만 봐도 얼마나 공력이 갔을까 짐작하게 합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종래 연구에서 오류를 범한 부분을 바로 잡고 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불전명의 조사가 왜 필요한지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제가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에서 우리나라에 고려대장경 연구자가 안 나타나는 안타까움을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번 연구를 통하여 계환스님이나 정승석 교수님과 같은 분이 존재함을 내외에 과시한 것은 또 하나의 성과라고 생각됩니다.
다음 일본의 선생님들 연구입니다만, 우선 마츠나가 선생의 연구를 살펴보겠습니다. 일본의 전통시대에 대장경의 간행은 세 번에 걸쳐서 이루어집니다. 종존이라는 스님이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하여 만든 종존판(宗存板, 17세기 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치고문 역할을 했던 천태종의 덴카이(天海1536-1643)가 만든 천해판(天海板), 그리고 황벽종의 데츠겐 도코(鐵眼道光, 1630-1682)가 만든 황벽판(黃檗板) 등입니다. 마츠나가 선생은 오랫동안 천해판이나 황벽판에 대한 조사연구에 종사해 오던 분인데요. 이번에는 에도시대에 닌쵸(忍징) 스님의 고려대장경과 황벽대장경의 대교작업에 대한 연구를 하였습니다. 닌쵸스님은 그 당시 유포본으로 널리 읽히던 황벽판, 구체적으로는 대승본생심지관경을 읽는데 문맥이 통하지 않아서 안넨(安然, 천태종의 스님을 가리키는 듯)이 지은 보통수보살계광석(普通授菩薩戒廣釋)이라는 책에 인용된 대승본생심지관경의 해당 구절과 대조해 보니, 황벽판 자체에 오류가 많다는 것을 알게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본(善本)을 구하여 황벽판과 전체적으로 대조하는 작업을 하였던 것이지요. 그때 동원된 선본이 바로 고려대장경입니다.
물론, 정교수님 논문에도 나옵니다만, 고려대장경 자체에도 오자나 탈자 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볼 때 선본임은 틀림없었다고 합니다. 특히, 고려대장경 편찬작업을 책임지고 이끌었던 수기(守其)스님의 교감 내용을 모은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 30권의 존재는 그 선본의 선본다운 이유를 잘 밝혀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 좋을 것입니다. 닌쵸스님은 고려대장경과 황벽판을 전장(全藏) 대조하여 황벽판의 오류를 바로 잡는 '교정부'와 고려대장경에는 있으나 황벽판에는 없는 경전들을 수록한 '보결부'를 출판하였다고 합니다. 애시당초 100권 규모로 계획하였다 하니, 그 작업의 방대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츠나가 선생의 논문의 요지는 이 대조작업에 닌쵸스님이 뛰어들게 된 동기로서 닌쵸 스님의 전기에 보면 바로 대승본생심지관경의 황벽판 내용이 부실하다는 점에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과연 그랬는가 하는 것을 실제로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고려대장경과 대조해 보니, 적어도 대승본생심지관경의 경우에는 그렇게 전장대조를 발심할 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결론으로 제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닌쵸 스님은 왜 고려대장경과 황벽판의 대조작업이라는 엄청난 작업을 하게 된 것일까? 그 배경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게 되지요. 그에 대한 해답은 아직 마츠나가 선생은 제시하지 않고, 다만 이번 논문은 새로운 문제제기만 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카이 선생 논문입니다. 사실, 제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도 카이 선생 덕분인데요. 며칠 전에 국제교류과의 요시다 선생으로부터 카이 선생을 소개받았습니다. 학자가 학자를 만나는 것은 글을 통해서여야 합니다. 겉으로 악수하고 만나는 것은 만남이 아닙니다. 그래서 공자님께서도 글로써 친구를 만난다(以文會友)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카이 선생은 1963년생입니다만, 주로 일본의 중세시대를 연구하는 것같습니다.
이 분 논문은 「고려판 대장경과 일본의 중세」라는 논문인데, 주로 무로마치 시대 고려대장경의 수용(일본어로는 '請來'라고 합니다만, 저는 여기서 수용이라 옮겨봅니다. '청래'는 수입과는 다릅니다.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그저 외교적으로 보내주기를 청하여 얻어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일본사에 대해서 어두운 형편이라 쉽지 않은 글이었습니다. 사실, 정교수님께서도 지적하고 있습니다만, 우리의 고려대장경에 대한 연구는 주로 판각의 주체가 누구냐 라고 하는 역사적인 것과 서지학적 연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뿐이라는 점입니다. 이번에 마츠나가 교수나 카이 선생이 한 것과 같은 테마의 연구도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카이 선생의 논문에서 우선 시선을 끄는 이야기는 일본의 경우에는 대장경에 대한 전체적인 판각을 한다거나 하는 필요성을 내적으로 느끼고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일본불교계에서 선호한 경전은 특수한 몇 몇 경전으로 한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1등은 법화경이고 2등은 정토삼부경입니다. 이러한 몇 몇 경전들만을 중점적으로 수용하고 요구하였기 때문에 전체적인 대장경에 대한 필요성이나 욕구 자체가 없었지 않느냐 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만, 수긍이 갑니다. 거기에 종파불교로서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무로마치 시대에 조선에 대하여 대장경을 청하게 된 것이 16회 정도인데, 이 중에 한번을 제외하고서 조선정부는 다 대장경을 보내준다는 것입니다. 시기적으로는 태종시대부터 연산군 때까지입니다. 조선시대 전체로는 약 40여회 정도 된다는 이야기를 저는 다른 문헌에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선물이 고려대장경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일본측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느 절에 모시겠다는 것을 명기하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또 조선정부로서도 찍어놓은 고려대장경이 한 질 다 되지 않아서 곤란을 겪거나 여기저기서 구해서 한 질을 맞추어서 보내주기도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 대장경을 구하러 간 사신이 대장경을 안 준다면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식의 협박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절실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면서 카이 선생은 오우찌(大內)라고 하는 무로마치 시대에 큐수 지방을 책임지고 있던 다이묘(大名, 영주) 집안에서는 막부와는 무관하게 개인적으로도 대장경을 요구하였다고 합니다. 그 회수가 무려 17회입니다. 조선 태조부터 성종에 이르는 긴 기간입니다. 이러한 사례는 모두 조선왕조실록을 인용하고 있으므로 정확한 사례라 할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오우찌 씨는 백제의 후손이라고 하는 자기의 출신을 이야기하면서까지 조선정부에 동질감을 불러일으켜서 고려대장경을 얻으려고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카이 교수 논문을 통하여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경우 고려대장경, 즉 고려재조대장경의 완성 이후에는 다시 대장경 간행을 하지 못하지요. 곧 억불의 시대인 조선시대가 되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고려대장경 자체가 나름으로 완벽하였기에 뭔가 그 필요성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한 까닭에 지속적으로 선본인 고려대장경을 요구하게 되고, 또 새로운 대장경에의 요구가 있었던 것같습니다. 그 결과 종존판, 천해판, 황벽판이라고 하는 세 번의 대장경 간행이 있었으며 닌쵸스님에 의한 대교작업까지 있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최근 우리 학교 불교학과 석사학위 논문으로, 일본인 가와세 유끼오 선생에 의하여 이 닌쵸스님의 대장경 교감에 대한 논문이 한 편 나왔습니다.)
한일/일한불교교류사에 있어서 고려대장경의 존재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이를 주제로 한 공동연구를 하고, 그 성과물이 한국어와 일본어로 동시에 수록되어서 한일불교학계에 공표되었다는 점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과거의 교류에 대하여 함께 돌아봄은 곧 현재의 교류 그 자체라 할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대학간의 학문적 교류에 있어서, 그 대학의 외형적 평가나 등수에 집착하는 시각도 있는 것같습니다. 그렇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외형적 등수나 평가에 무관하게 교류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하는 사실, 또 전체적으로는 등수가 밀리더라도 특정 학문분야나 특정 전공분야의 교수 등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를 보완할 수 있는 파트너쉽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닌가 합니다.
더욱이 이번 교류의 또 다른, 후속적인 성과는 바로 카이 선생과 같은 젊고 역량있는 학자가 우리 학교로 건너온다는 사실입니다. 교환교수 형태로 우리 학교에 와서 연구활동을 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4월에 오신다는 데요. 사실, 제가 여기 불교대학을 다녀간 뒤에도 경주 국사학과의 김신재 교수님이 다녀가셨는데요. 불교대에서 아무도 오지 않아서 '불평등교류'가 되고 있었는데, 크게 다행한 일입니다. 그렇게 발심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역시 이번 공동연구라고 생각됩니다. 종래의 공동연구자들과의 지속적 교류도 예상할 수 있지만,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지고 주고 받음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또 다른 자매대학과도 그 공통의 관심사를 찾아서 공동연구와 같은 형태의 실질적인 학술교류가 이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2007년 1월 16일
김호성(동국대 인도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