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교토통신을 쓸 때, 쓰고 싶었으나 쓸 수 없었던 글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입니다. 바로 순례입니다.

순례라고 하면 우리도 지금은 많이 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국내에서 성지순례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후반 정도가 아닌가 합니다. 순례 역시 여행 아닙니까. 그런만큼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반증이라 봅니다. 70년대 후반 무렵부터, 어느 정도 국내 여행은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절마다 스님들이 신도들을 인솔해서 가지요. 우리 신도들 역시 대개 가정에 매여있는 주부의 입장에서 어디 따로 여행이라고 하기가 정말 어려웠던 시대이구요. 그래서 절에서 하는 성지순례에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번잡하고 무거운 노동과 속박의 현장으로부터 벗어나는 하나의 엑소더스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러한 순례가 이제는 우리 경제의 키와 함께 자라서 세계로 넓어졌습니다. 인도를 비롯하여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로 넓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불교사에서 일반의 신자들이 성지를 순례한다는 것 자체가 언제부터 가능했던 것일까요? 전통시대에도 있었던 것일까요? 신라, 고려, 혹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것일까요? 사실, 이에 대한 연구같은 것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아마도 매우 어려웠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순례 역시 여행인지라 막대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인데 일반민중의 입장에서는 사실 그날 그날 밥 먹고 사는 것마저 쉽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사찰 순례를 한다는 것은 이미 사회경제적으로 상층이 아니라면 어려웠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 후기에 이루어진 사찰기행문학으로서 유명한 것이 산중일기인데요. 작자는 유학의 선비입니다. 비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양반 사대부가문이라고 하는 사회경제적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렵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실제 산중일기의 저자도 노비나 하인을 데리고 다니면서 여행을 하였던 것이지요.

그 외에 일반 민중들이, 그것도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무리를 지어서 불교성지를 순례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지 않은가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더욱이 불교가 억압당하는 입장에 있었기에 더욱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는 다른 것같습니다. 성지, 일본에서는 대개 레이죠(영장, 靈場)이라고 합니다. 또 순례라는 말도 헨로(遍路)라고 합니다. 정확하게 영장을 순례하는 일이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에도 시대에 더욱 성행했던 것같습니다. 우리의 경우에도 현재는 윤달에는 세 곳의 절을 순례라는 것이 좋다고 하여 삼사순례를 하거나, 오대보궁 순례 등 셋트화된 성지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일본만큼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본에는 영장들이 다양하게 셋트화되어 있는 것이 특색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사카, 나라, 교토 등의 서일본을 의미하는 사이코쿠(西國)에 33개소, 관동지방 전체에 걸친 반도(板東) 33개소, 그리고 지금의 교통수단으로는 도쿄에서 1시간 20분만에 갈 수 있다는 치치부(秩父) 34개소가 있습니다. 이를 합하면 모두 100개소입니다만, 모두 관음영장입니다. 관세음보살 신앙의 성지라는 것입니다. 이 중에 아마도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사이코쿠 33개 영장인 듯 합니다. 지난 여름에 저희들이 찾아갔던 센다이 근교 마츠시마(松島)에 있는 즈이간지(瑞巖寺)라는 절에서는 그 경내에 사이코쿠 관음영장 33개소를 작게 만들어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경내에 모셔진 관세음보살님께 한번 씩 참배하면 곧 저 멀리 사이코쿠에 가지 않더라도 간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라고 하는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것이지요.

불보살과 관련해서만 영장이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불교의 한 특성인 종파불교와 관련하여 조성된 영장 역시 적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대표적으로는 정토종 개조인 호넨(法然)의 25개영장과 진언종의 개조인 구카이(空海)의 88개 영장입니다. 호넨의 영장은 역시 교토를 중심으로 한 긴기(近畿)지방에 모여 있으며, 구카이는 그의 고향인 시고쿠(四國)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장은 모두 번호가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고찰들을 가보면, 이 절은 사이고쿠 관음 영장 33개소 중의 몇 번째 절이라는 것이 현판에 적혀서 게시되어 있는 모습을 흔히 보게 됩니다. 한 절에 몇 가지 영장의 의미가 중복되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번호로 매겨져 있는 영장이 되는 사찰을 다른 말로 후다쇼(札所)라고 하는 데요. 신자들은 이들 영장의 순례를 한 번 해서 마치는 것을 누구나 다 염원하는 것이지요. 또 평생에 걸쳐서 몇 번이나 반복적으로 구카이의 시고쿠 88개 후다쇼를 순례한다든가 하는 염원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셋트화된 영장을 순례하는 데에는 하나의 증명절차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각 영장의 사원에서 받는 붉은 도장(朱印)입니다. 그것을 아예 모아서 찍을 수 있도록 족자처럼 만들어진 것도 있고, 노트 처럼 만들어서 가지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습관이 되어서 일본의 관광지에는 굳이 사원이 아니더라도 이 주인을 찍을 수 있도록 도장과 인주를 내놓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사원의 누각 같은 데를 보면 일본 사람들 성이 인쇄된 종이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저기 문이나 기둥 등에 '田中' '佐藤' 등을 붙여놓습니다. 이 역시 다나카가 이 영장을 순례했습니다, 라고 불보살님께 고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영장을 순례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준비가 필요했을 것이고요. 또한 에도시대에는 일반민중들의 이동 역시 그렇게 자유롭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여자들은 그랬다고 하구요. 그렇지만, 성지순례를 간다고 하면 허락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억눌린 사람들로서는 순례라고 하는 것이 종교적인 의미만 있었던 것이 아님은 분명하지요.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지순례를 하기 위하여, 우리로 말하면 계(契)와 같은 조직을 만듭니다. 이를 고(講)라고 합니다. 이 고는 일종의 결사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 단위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고는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종조를 추모하기 위한 보은강(報恩講)같은 것입니다.) 아무튼 성지순례를 한다는 것은 하나의 특권일 수도 있었던 것같습니다. 나라에서도 순례에 대해서는 특별한 제약을 두지 않았던 것같구요. 실제 도망자들이나 범법자들 역시 몸을 숨기는 데에 이러한 순례를 이용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여기 살 때에도 시고쿠 88개 후다쇼를 여러 번 순례하면서 책을 내고, 사진 집을 내고 해서, 티비에까지 보도된 분이 체포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살인죄를 저지를 범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는데요.

순례는 일상에서 벗어나서 일종의 출가의 삶을 사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기가 믿고 사랑하는 님을 향하여, 님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님이 존재했던 인연터/영장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곳에 이미 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지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그 부재 속에서 꽉 찬 존재를 느끼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믿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길 위의 순례자들을 님 향한 일편단심을 바치는 믿음행자(bhakti-yogi / bhakta)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에도 시대 당시의 모습에 가깝게 옷을 차려입은 많은 순례자(오헨로상이라 합니다)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순례의 모습은 하나의 공간 안에서 집약적으로 이루어지는 변주를 겪기도 하고, 저 멀리 외국으로까지 향해가는 변주를 겪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압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전자의 예로서는 천태종에서 하는 회봉행(廻峰行)이 있습니다. 천태종 총본산이 되는 산이 교토 인근에 있는 히에이잔(比叡山)을 하루에 한 번 순례하는 것입니다. 약 20킬로 이상이 됩니다. 이를 12년까지 행합니다. 매일같이 이 산길 걷기를 반복합니다. 그것으로 수행을 삼습니다. 걷는다는 것, 분명 번뇌를 없애가는 하나의 좋은 수행이 되리라 봅니다. 만약 하루라도 이를 실천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자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단도를 차고 다닌다구요. 오늘도 이렇게 걷고 또 걷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아자리(acarya) 라고 부릅니다. 12년의 회향을 눈 앞에 둔 얼마동안은 잠도 자지 않는 수행을 한답니다. 우리가 흔히 일본불교에는 수행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이렇게 한 쪽에서는 엄혹한 수행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해외에 나가는 순례의 경우 역시 엄혹한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중국 절강성 앞바다에 보타락가산(보타도)가 있지요? 거기에는 관세음보살님이 상주하신다는 믿음을 관음신앙을 갖는 이들은 다 갖고 있었는데요. 여기 일본에서는 실제 그 곳으로 가기 위하여 누구 말마따나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일을 저지릅니다(?). 바다에 배를 띄우는 것이지요.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요. 이들 이야기에 대한 사료가 정리되어서 책으로 나왔는데, 그것이 보타락도해사(普陀洛渡海史)입니다. 저는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충격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참으로 순수한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옛날 사람이라서 그렇게 순수했을까요?

한편으로 참으로 행복하게 살았던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어쨋든 전통시대에 고라도 만들어서 영장을 찾아가면서, 스스로 믿고 있는 님의 향기를 맡아보고자 시도라도 할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로서는 시대가 다른 점이라는 이유 외에도 종파불교가 아니라는 점에서 종조에 대한 신앙의 약화, 또한 선 중심이라는 점에서 타력신앙의 약화 등이 순례문화의 미형성에 하나의 내재적 요인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기회가 된다면 저도 일본불교의 영장들을 많이 찾아가 보았으면 합니다. 특히, 치치부를 꼭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2007년 1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