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익숙해진 일본이라서 새삼스럽게 하루하루 여행일기를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만, 틈틈이 여행 그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여행이란 무엇이며, 우리 인생은 무엇인지 단상(斷想)들을 기록해 봅니다. 인도의 한 병원에서 그렇게 “여행이란 ---” 형식으로, 여행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배낭에 담아온 인도』 참조) 물론, “인도”라는 컨텍스트 속에서의 생각들과 “일본”이라는 컨텍스트 속에서의 이야기는 다르겠지요.
-여행은 출가이다. 『바쇼의 하이쿠 기행Ⅰ --- 오쿠로 가는 작은 길 ---』(김정례 역주, 바다출판사)이라는 기행문을 남긴 하이쿠 시인 바쇼(芭蕉, 1644～1694)의 여행이 그렇다고 할 만하다. 당시 하이꾸의 대가들은 모두가 새롭게 하이꾸를 배우는 학인들에게 작품 지도를 해주면서, 돈을 받고 경제적 생활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쇼는 그러한 분위기를 순수한 문학정신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러한 유혹을 물리치고 새롭게 진실한 문학의 길을 가기 위해서 오지로 여행을 떠난 것이다.
-여행은 시간여행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날기도 하고, 미래를 날기도 한다. 과거로 날아간 이야기 하나. 우리 어릴 적에 “하꼬방”이란 말이 있었다. 하꼬는 상자를 가리키는 일본어이지만, 그만큼 작고 불편한 판자집을 흔히 “하꼬방”이라 불렀다. 동경에 있는 수많은 한국인 민박집 중에는 아직도 “하꼬방”이 있다. 습기는 눅눅하고 ---. 화장실도 물만 내려가지, 거의 재래식 수준이고, 마루는 삐거덕 삐거덕 ---. 아직 이러한 곳이 존재하는 이유? 돈 없이 건너오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1000～1500엔 정도 더 투자할 수 있다면, 유스호스텔에라도 갈 수 있는데 ---. 우린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하룻밤을 이 “하꼬방”같은 민박집에서 보냈다. 이런 민박을 찾아오는 우리 젊은이들의 꿈과 현실을 생각해 보면서 ---.
-공자님 말씀에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아는 것이다”라는 명언이 있다. 길을 물었을 때에도 정확히 모른다면, “모른다”고 해야 한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길을 가르쳐 준 것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계속 모르면서도 아는 체 하기 쉽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여야, 비로소 발분(發憤)하여 공부할 터인데 말이다. 이런 병에 잘 걸리는 사람이 나같이 칠판을 등지고 서는 선생들이다. 주의할 일이다.
-“길에서 죽어도 좋다”는 마음이 있는 자 만이 떠날 수 있다.
-늙는다는 것은 편안함을 찾는다는 것이다. 몸을 움직이기 점점 힘들어지고, 싫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년에 이르러서 그 편안함을 버리고 출가하는 유행기(遊行期)의 시스템을 갖고 있는 종교인 힌두교, 그것은 정녕 위대한 여행의 종교일진저.
-여행에서의 고생은 일상생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낳는다. “참, 행복하게 살아왔구나!” 라고 하는---.
-여행은 언제나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다. 가려다가 못 가고, 행선지를 바꾸어야 하고, 머무는 일정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아쉬움을 갖고 살아가는 미완성의 삶, 그것이 여행이고, 그것이 인생이다. “다 이루려 하지 말라.”
-세상에 어떤 일이 어렵다 어렵다 해도 한 번 일으킨 마음을 거두어 들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한 번 떠나기로 했으면, 심지어 가족이 아파도 억지로 끌고 그 길을 가게 되는 것도 그 마음을 거두어 들이지 못해서이다. 그래서 옛스님이 말씀하셨다 : “있는 법도 없앨지언정 없는 법을 만들지 말라.”
-여행의 정신은 개척정신이고 모험정신이다. 미지(未知)의 세계를 기지(旣知)의 세계로 바꾸어 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있어야 하며, 그것을 새롭게 개척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물론, 오늘날에는 교통이 발달한 만큼 그러한 개척정신이나 모험정신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 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려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도 길을 나설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장(玄奘, 622～664)스님이 그랬고, 수많은 탐험가들 역시 그랬다.
-잇벤(一遍)이나 원효의 여행은 자리(自利)를 위한 여행이 아니라 중생을 위한 여행이다. 그런 여행을 할 수 있어야 참으로 부처님 제자라 할 만할 것이다.
-여행은 역사의 추체험(追體驗)이자, 새로운 역사의 선체험(先體驗)이다.
-여행은 만남이다. 새로운 자연, 새로운 환경,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만남을 통해서 경이를 느끼고, 깨침을 얻는 것이다. 도겐(道元)은 한 늙은 전좌(典座, 대중의 공양을 책임지는 소임)스님을 만남으로써 수행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고 한다. 그들 사이의 대화 :
“스님, 연세가 얼마나 되십니까?”
“예순 여덟이라오.”
“연세도 많이 드셨는데, 이제 일하는 것은 젊은 스님들께 미루시지요.”
“내 일은 내 수행이라오. 나의 수행을 어떻게 남에게 미룬단 말이오?”
-원공(圓空, 1632～1695)스님의 여행은 또 남다르다. 잇뻰이나 도겐과도 다른 여행을 그는 하고 있다. 천태밀교를 배운 난 뒤, 스님은 스스로 “12만구(軀)의 불상을 조각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전국을 편력하면서 많은 불상들을 조각하였다. 모두가 나무 하나에 한 부처님(보살상이나 신상도 있지만)을 새기는, 이른바 “일목불(一木佛)”이다. 다까야마(高山) 지역에만 500구의 불상이 전해져 오고 있다 한다.
-여행은 망각을 위한 축제일 수도 있다. 삶에 지치고 힘겨워 하던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고, 거기서 새로운 힘을 얻는 것도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그런 경우를 위해서 추천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여행지는 아마 인도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겪어왔던 고뇌나 고생들을 일거에 사치로 만들어 버리는 한계상황들이 인도에는 지천으로 널려있기 때문이다. 아, 참을 수 없는 고뇌의 사치스러움이여!
-여행은 세상이란 이름의 텍스트(=컨텍스트)를 읽는 독서이다. 종이로 이루어진 텍스트만이 텍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자는 없다. 종이 위에 문자로 쓰여진 책의 내용은 애시당초 세상 속의 일이었고,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종이 위에 쓰여지지 않은 텍스트를 읽으려는 것이 선종의 지향성이고, 종이 위에 쓰여지지 않은 텍스트를 읽고 난 뒤 그 안목으로 경전을 읽는 것을 관심석(觀心釋)이라 한다. 흔히, 선의 체험을 여행기의 독서를 내버리고 여행 그 자체에 비유하는 까닭이다. 사교입선(捨敎入禪)!
-인도 여행기 『배낭에 담아온 인도』를 읽은 많은 사람들이 말하였다 : “책을 읽고 나니 오히려 인도 여행을 못 할 것같다.”, “나 같으면 그런 여행은 안 할 것이다.” 그렇다. 맞는 이야기다. 누가 지지리 고생만 하는 그런 고행(苦行)을 좋아하겠는가. 인간은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그 본성/본능이다. 누구나 편안한 여행을 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경제적인 데에 있다. 인도와 같은 환경이라 하더라도 고급 호텔에 투숙하고, 가이드 데리고 다니며, 차를 전세 내서 타고 다닌다면 편안하고 쾌적한 여행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런 여행은 못 하겠다”고 말하는 독자들이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그러했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할 수 있었고, 바로 그러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금 그 길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 바로 그러했기 때문에 우린 그 속에서 수많은 깨침과 배움을 얻을 수 있었음을.
-“집 떠나면 고생이다.” 맞는 말이다. 여행길에서의 고생은 대개는 잠자리 불편에서 온다. 집에서와 다른 환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 생각하면 우리가 불편을 느끼는 것은 대개 우리의 몸과 관련된다. 마음이 불편하고 불쾌한 것도 일단 우리 몸이 불편하고 불쾌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제기된다.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몸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마음 자체야말로 항복 받아야 할 중생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의 불편을 감내하는 것이야말로 곧 수행이 된다. 또 하나, 우리가 그렇게 불편을 느끼는 까닭은 우리가 경제적 댓가를 지불한다는 사실과도 관련된다. 만약 우리가 경제적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잠자리를 얻게 된다면, 그 불편함에서마저 감사를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여기서 걸사(乞事)에 의해서 진실한 수행의 길을 가고자 하는 “비구의 철학”이 이해된다.
-어릴 적에 동경한 일 중에 하나가 “무전여행(無錢旅行)”이다. 옛날 스님들의 여행에서는 무전여행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스님들의 여행에서도 무전여행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돈 한푼 없이 차를 얻어타고 다니셨다는 보문(普門)스님의 경우가 마지막 전설이 아닌가 싶다.(보문스님 이야기는 『방한암선사』, 민족사, 참조)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최희준의 노래 「하숙생」은 법문이다. 그러나, 「하숙생」에는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한 물건”을 아는 것의 중요성은 설해져 있지 않다. 어쩌면 “한 물건”을 알지 못하고 하는 여행은 내내 방황일지도 모른다.
-길은 알고 나면 그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 정말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 보다 더 쉬운 것이다.” 그런데, 모를 때는 “이리 가야 하나, 저리 가야 하나” 한 발 앞으로 내디딜 수조차 없다. 동경, 신주꾸(新宿)에서 꼭 그런 체험을 했다. 이미 날은 저물었고, 비는 주루룩 주루룩 내리는데 ---.
-여행의 앞길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때로는 지진이 일어나서 행로를 변경해야 되는 일도 있고, 때로는 뜻밖의 마쯔리/축제를 만나서 즐거움을 함께 맛보기도 한다. 센다이(仙台)를 가려다 못 간 것은 전자의 경우이고, 후꾸이(福井)에서 춤 페스티벌을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은 후자의 경우이다. 그런데, 그 어느 경우이든 이내 지나간다. 괴로움도, 기쁨도, 참으로 순간적으로.
-여행 가이드 북은 하나의 텍스트이다. 낯선 나라에서 우리의 여행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경전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우리를 그 한계 안에서만 여행하도록 강제하거나 구속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진정한 여행자라고 한다면, 여행 가이드 북을 뛰어넘어 “가이드 없이” 스스로 여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여행 가이드 북을 만들어 내는 일이며, 비로소 새로운 텍스트를 창조하는 일이기도 하다. (경전을 뛰어넘는 선은 새로운 경전을 창조하는 일이다.) 후꾸이를 가서 조동종 대본산 에이헤이지(永平寺)를 참배한 일은 여행 가이드 북을 뛰어넘은 결과이다. (에이헤이지 가는 길 : 후꾸이 기차역에서 에찌젠/越前 전철을 타고 에이헤이지구찌로 가서, 다시 거기서 버스로 에이헤이지로 간다.)
-일본불교의 한 특징 중에 하나가 성지순례이다. 헨로(遍路)라고 하는 데 여러 가지 다양한 코스가 개발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구우카이(空海)와 인연이 있는 도량 88개소를 하나의 코스로 묶은 “시고쿠헨로”(四國遍路)가 있다. 그 외에 여러 순례코스가 있는데, 순례자들은 이 도량에 하나하나 들를 때마다 반드시 도장(朱印)을 받는다. 일본의 불교신자들이 우리나라 절에 와서 참배할 때 역시 도장을 찍어달라고 하는 일이 있는데, 이러한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시고쿠 헨로의 순서지정이나 도로정비 등에는 신넨(眞念, ? ～ 1693)이라는 스님의 공덕이 컸다 한다. 다까야마 고쿠분지(國分寺)는 “중국약사도량사십구찰소”(中國藥師道場四十九札所) 중의 첫 번째 사찰이고, 히로시마의 미야지마에 있는 어떤 절은 그 마흔 아홉 번째 도량이었다. 우리는 아침에 첫째 도량을 참배하고, 저녁에 마지막 도량을 참배하는 “우연”을 겪었다.
-길을 물었을 때 대충 성의없이 가르쳐 주는 사람도 있고, 아예 길을 가르쳐주길 거부하는 사람도 있고, 친절히 가르쳐 주는 사람도 있고, 본인에게 길을 묻지도 않았는데 다가와서 가르쳐 주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 중에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누구나 하는 말이 있다. “내 집이 제일 좋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상을 다시 시작하라고, 여행은 우리를 단련시킨다. 우리를 깨우쳐 준다.
해외로 가는 비행기를 처음 탄 것은 제 나이 마흔이었습니다. 늦었지만, 이후로는 비교적 많은 기회를 만들어 왔습니다. 이번에는 일본에서 1년을 살았습니다. 왜 외국으로 다니는가? 누가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놀러 다니는 것은 아니고, 돈을 쓰러 다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앞에서 그러한 이유들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 하나는, 우리가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울타리를 넘어서 이 지구상에 살아가는 모든 이웃들이 하나가 되는, 서로가 보다 잘 이해하고, 서로가 보다 사랑하며 공존해 갈 수 있는 철학이나 방법론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지 못한 과거 역사를 느끼면서, 또 그렇게 될 수 있는 역사적 가능성을 찾아보면서 말입니다.
불교는 그 속에서 미래에 인류와 함께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리라 믿습니다.
2003년 8월 9일
김호성(동국대 인도철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