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경우에는, 과장 단團 명의로 외부 성명을 발표해야 문체부 자긍심을 조금이라도 유지하고 외부의 지탄도 덜 받을 것입니다."
필자
■ 이병두 칼럼 ■ <종교평화연구원장, 종교 칼럼니스트>
이틀 전인 지난 1월 10일에 <문체부 공직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뒤 제 마음은 매우 무거웠습니다. 그곳에 몸 담았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눈에 어른거리는 얼굴들이 적지 않아서 사태를 100% 객관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보도를 보니, 이른바 ‘블랙리스트(black list)’ 문제를 항의하는 문화예술인들이 이 추운 겨울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세종시 문체부 청사 앞에서 ‘장관 등 블랙리스트 의혹 가담자들의 사퇴와 처벌을 촉구’하는 농성을 펼치고 있고, 그래서 직원들은 문체부 정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교육부 쪽을 통해서 출근을 했다고 하네요. 그곳을 떠나온 사람도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이 큰데, 여러분들의 심정이야 그보다 훨씬 클 것입니다.
이 보도를 보면서 제 머리에 검찰 조직이 떠올랐습니다. 검찰이라고 하면, 서민들뿐 아니라 공직자들도 별로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 곳이죠. ‘국민을 위하는 조직’이라기보다는 ‘특권층을 위한 조직’ ‧ ‘집권자를 위한 조직’이라고 느끼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그래서 ‘정치 검찰’이라는 부끄러운 수식어를 앞에 달게 된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최근 김기춘-진경준-우병우 등등 검찰 출신들의 행태를 보면 이런 비판에 대해 섭섭하게 여길 수도 없는 곳이 검찰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상명하복上命下服을 내세우는 이 검찰 조직이 ‘멍청하게 멈추어있는 엉터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상부의 부당한 지시와 명령을 거부했다고 해서 인사 불이익을 감수하고 한직을 떠돌면서도 묵묵히 버티고 있는 검사들이 갈수록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아마 앞으로 이런 검사들이 훨씬 더 많아질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형식상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진짜 민주주의가 이 땅에 정착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또 검찰에는 나름의 ‘존재의 법칙’이 한 가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검찰 간부의 비위 문제 등으로 조직에 위기가 생겼을 때면, 내부 통신망에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며 각 지방검찰청 단위로 ‘평검사회의’ 등 직급별 ‧ 연수원 기수별 회의가 열려 난상토론이 벌어지고 이런 절차를 거쳐 도출된 의견에 대해서는 상층부에서도 무시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상명하복’을 원칙으로 삼고 있는 검찰이라는 막강한 조직에서 위와 같은 일이 100% 민주적인 절차에 따른 의견 수렴이 되지는 못할 것이고, 또 이런 것들이 국민 전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검찰 조직의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조직 보전保全 논리’의 성격이 강한 것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자기 조직을 지키려는 이 점 한 가지만은 다른 정부 부처 공직자들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여러분 의견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최근 몇 달째 여러분들이 안정적으로 업무를 하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삼삼오오三三五五 모여서 한탄도 하고 “더 이상은 안 된다”며 울분을 토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블랙리스트’를 둘러싼 논란의 중심에 선 정부 부처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어려움을 겪을 판에, 새로 부임해 온 장관까지 이 논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력履歷 때문에 문체부로 쏟아지는 비판의 화살은 더욱 많아지고 그 화살의 강도强度도 갈수록 거칠어집니다. 전임 장관과 차관 두 명이 이미 구속되었고, 현 장관과 일부 간부들에게도 언제 그 어려운 일이 닥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문체부는 이제 그야말로 ‘거센 바람 앞에 놓인 등불(風前燈火)’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면 검찰처럼 각 직급별로 내부 통신망을 통해 의견을 모으고, 아래 직급은 그 내용을 위에 건의하여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특히 장‧차관 및 실‧국장들과 사무관‧주무관 등 실무자들 사이에서 리베로(libero) 역할을 하는 과장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할 것이라고 봅니다. 어느 조직이든 이 중간 직급‧ 직책의 역할에 성패가 달려있을 터인데, 현재와 같이 좌초坐礁 위기에 놓인 문체부를 살려내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그 역할이 더욱 절실할 것입니다.
이제 과장들이 나서야 합니다. 조직이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현실에 울분하고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안해서 동요하고 있는 사무관 ‧ 주무관들을 안정시키면서, 솔직한 의견 교환을 거친 뒤 장관의 결단을 촉구하는 건의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문체부를 살리고 이 나라 문화예술정책을 정상화 시키고자 하는 충정에서 우러나온 그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최악의 경우에는, 과장 단團 명의로 외부 성명을 발표해야 문체부 자긍심을 조금이라도 유지하고 외부의 지탄도 덜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해야 여러분들의 마음이 덜 불편할 것입니다.
* 네이버 블로그 <香山의 세상이야기 - 葉落糞本>에 실린 글로 필자의 동의를 얻어 <미디어붓다>에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