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이 유언장에 남긴 ‘신문배달 소년’이 스님의 책을 건네받았다.
법정 스님의 상좌 덕진 스님은 3월 31일 낮 12시경 길상사 헹지실에서 40년전 그 소년에게 스님의 머리맡에 남아있던 책들을 전달했다. 덕진 스님이 책의 주인에게 건넨 책은 <벽암록>, 칼리지브란의 <예언자>, 석지현 스님의 <선시>, 소로우의 <월든>, 쎙텍쥐뻬리의 <위대한 모색>, <선학의 황금시대> 등 총 6권이다.
이제 50대가 된 그때 그 소년은 이름과 얼굴을 밝히기를 꺼려한 채 “저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져 스님에게 혹시라도 누가 될까 책을 받는다는 사실이 너무 부담스럽다. 기자들이 나타나는 줄 알았으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거듭했다.
스님의 유언장에 남겨진 그 소년은 40여년전 봉은사에서 살던 공양주 보살의 아들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때 서울로 전학을 와서 봉은사에 기거하게 되었는데, 그 무렵 법정 스님이 봉은사에 오셨다고 한다. 그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될 무렵부터는 스님을 뵙지 못한 것 같다고 회고했다.
“스님이 머무시던 다래헌에는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스님을 찾아오는 여신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저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스님은 눈이 오면 눈을 치우지 못하도록 하셨고, 낙엽이 쌓여도 그대로 놔두라고 하셨어요. 있는 그대로를 즐기기 위해서였죠. 그동안 스님과의 인연을 잊고 살았는데, 이번에 신문배달 소년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봉은사에서의 어린 시절이 어제일처럼 떠올랐습니다.”
책의 주인은 스님에게 신문을 갖다 나르게 된 사연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스님은 울력할 때나 대중들 앞에 나섰고, 종무실에도 거의 들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녁마다 석간신문과 역경원에서 온 우편물들을 스님께 갖다드렸지요. 스님은 그게 고마우셨던지 한번은 저한테 24색 크레용을 선물로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때는 크레용이 거의 4색, 12색이 대부분이었던지라 그걸 받고 엄청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읽으셨던 신문은…제가 글을 잘 못읽던 때라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지만 고바우 만화가 실렸던 것 같고(동아일보), 조선일보도 있었습니다.”
책의 주인은 또 “제가 기억하기로 스님은 굉장히 계율이 철저한 분이셨다”며 “행전을 차지 않고 공양을 하면 바로 참회를 하셨고, 아무리 더워도 승복을 걷어올리는 적이 없을 정도로 스스로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한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책의 주인은 “스님이 이 책을 저한테 전하라고 유언을 남기셨고, 이 책을 처분할 권한이 저한테 생겼지만, 저는 이 책이 스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부대중의 것이라 생각한다”며 “제가 이 책들을 모두 읽고 스님의 발자취를 더듬은 다음에는 아무 조건없이 길상사에 기증해 스님의 뜻을 기리는 일에 쓰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40여년전 신문배달 소년을 어렵사리 찾아내 책을 전한 덕진 스님은 “스님께서 왜 신문배달 소년에게 책을 건네라는 유언을 남기셨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신도들로부터 받은 작은 시주의 은혜도 저버리지 말라는 뜻인 것 같다. 법정 스님은 평소에도 누구에게 빚지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시는 분이셔서, 신도들이 하나를 갖다드리면 두 개 이상을 주곤 했다”며 “신문배달을 해준 소년에게 책을 주라는 유언은 우리들에게 가벼운 시은(施恩)도 마음에 새기고 살라는 가르침을 남기기 위한 것인 듯 하다”고 설명했다.
스님의 책은 우여곡절 끝에 스님에게 신문을 저녁마다 배달해준 그 소년에게 돌아갔다. 40여년전 눈을 치우길 아까워했던, 그리고 초등학생 꼬마에게 24색 크레용을 선물했던 법정 스님은 또 한 편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남기고 간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