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부 조계종 사찰을 총괄하는 권한을 가진 큰스님이 서울 거리 한복판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참담한 표정에는 결연함이 묻어났다.

20일 조계사앞 거리에 선 스님은 제2교구본사 용주사 주지 정호 스님. 정조대왕의 효행유적지가 무참히 파괴되는 모습을 도저히 참고 볼 수 없어 직접 장삼자락을 걷어부치고 정부를 향해 보존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주택공사에서 2년전 효행유적지인 융건릉 일대 화성시 태안3지구에 아파트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에 용주사와 시민사회단체들이 즉각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정조대왕효행유적지보존범국민연합(대표 정호)은 5월 20일 조계사에서 범국민운동선언식을 갖고 정부에 유적지 보존을 촉구했다.

이 단체를 이끌고 있는 정호 스님은 “전통적 가치인 효문화를 보존하고 계승하는 것은 우리시대에 주어진 임무”라며 “저출산, 고령화, 가족해체 등 사회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대안은 효문화를 배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호 스님은 “융건릉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효정신이 담긴 곳”이라며 “정부가 나서서 보존해야할 곳에 아파트를 지어 파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정호 스님은 또 “이명박 대통령이 융건릉 일대를 효행공원으로 보존키로 약속했다”며 “대통령은 공약을 조속히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이명박 대통령께 드리는 상소문’을 발표한 융건릉 봉양회 이흥철 고문은 “융건릉 능역은 정조대왕이 죽어서도 아버지 사도세자의 발치에 묻혀 시묘 살이 하겠다고 한 지극한 효심이 배어 있는 곳”이라며 “효심이 담긴 곳이 포클레인에 무참히 파헤치고 덤프트럭에 짓밟히는 모습에 분개함을 넘어 참담할 따름”이라고 울먹였다. 이흥철 고문은 “융건릉은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지역으로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며 “세계가 인정한 문화유산을 도리어 우리들은 파괴하는 모습”이라고 분개했다.

범국민연합은 이날 선언식에서 △정조대왕 왕릉 터를 포함한 효행유적지 파괴중단 △효행유적지의 합리적 보존 및 활용대책 수립 △효행유적지 건설 관련 부서들의 조사와 불법적 조치에 대한 관련자 처벌 △효행유적지 공원화에 대한 선거공약 이행 등을 촉구했다.

선언식을 마친 100여명의 참가자들은 효행유적 보존, 효행공원 추진 등 문구를 담은 번을 들고 조계사에서 광화문까지 행진을 벌였다.

당초 청와대까지 모든 참석자가 행진할 예정이었으나 경찰 측에서 보안상 대표단만 청와대 진입을 허가했다. 정호 스님, 봉양회 이흥철 고문, 봉양회 이승억 회장 등 대표단은 경찰의 제안으로 광화문에서 청와대까지 경찰차로 이동했으며 청와대 연풍문에서 상소문을 전달했다.

상소문을 청와대에 전달한 범국민연합은 5월 21일 부터 100일간 정부종합청사, 종각, 서울광장 등지에서 대국민 서명운동, 홍보물 배포, 릴레이 1인 시위 등을 전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