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타폰의 달빛21
아바도와 메시앙과의 만남
(삽화=정윤경 작가)
토스카나에 머물던 빌리는 갑자기 비엔나를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고 설명할 수도 없었다. 빌리는 며칠 동안 그런 느낌에 사로잡혀 있다가 결국 토스카나에서 비엔나로 가는 열차를 탔다. 아무 목적 없이 갈 수는 없었으므로 전화를 걸어 문화 예술축제인 비엔나 페스트보헨(Wiener Festwochen) 운영진 중에 한 사람과 오전 11시에 카페 스페롤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카페에서 30분쯤 기다리다가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더니 그가 다른 긴급한 문제 때문에 약속을 지킬 수 없다며 양해를 구해왔다. 빌리는 별로 낙심하지는 않았다. 급하게 잡았던 약속이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로 돌아가는 열차는 오후 5시에 있었다.
빌리는 카페를 나와 비엔나 거리를 걸었다. 국립 오페라극장 앞에서 슈테판 성당이 있는 카른트너 거리 쪽으로 가려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페라극장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빌리는 그들 일행 속에서 오페라극장 음악감독인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 일행이 극장 안으로 들어가자 빌리는 자연스럽게 따라갔다. 아바도가 1988년 가을에 열릴 첫 번째 비엔나 현대 페스티벌 개최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아바도는 몇몇 사람들과 맨 앞에 앉았고, 빌리는 맞은편 기자들 무리 속에 끼었다. 빌리는 이왕 왔으니 아바도를 만나고 싶어 기자회견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아바도는 1933년에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난 세계적인 지휘자였던 것이다. 빌리는 아바도가 기자회견을 마치자마자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아바도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빌리는 포기하고 돌아가려고도 했지만, 홀의 의자에 앉아서 사람들이 모두 떠날 때까지 인내했다.
이윽고 두 사람만 남았을 때 빌리는 아바도에게 다가갔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바도가 먼저 말했다.
“오페라극장에서 일하는 사람인가요?”
“우연히 여기 온 사람입니다.”
빌리는 작곡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발표한 작품이 그다지 없었고, 작품공연이 많지 않았으므로 작곡가라고 말하기에 쑥스러웠다. 그런데 아바도가 재차 말했다.
“나를 만나려고 온 것 같은데 말해 보세요.”
빌리는 비엔나에 온 이유를 말했다.
“비엔나 페스트보헨 운영자에게 보여주려고 악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약속이 있다고 해서 전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요? 나에게 보여 줄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빌리는 가방에서 악보를 꺼내 아바도에게 주고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런 뒤 오후 5시에 열차를 타고 토스카나로 돌아왔다.
얼마 후.
빌리는 또다시 행운을 만났다. 소련과 이탈리아 팀의 축구 경기중계를 보기 위해 승용차를 몰고 피렌체로 갔다. 준결승 경기였는데 6월 22일 오후에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경기장에서 치를 예정이었다. 빌리는 준결승 경기를 보고 싶어 피렌체 구시가지 가장자리에 차를 주차해 놓고 중심가로 걸어갔다. 빌리는 곧바로 경기를 중계하는 술집에 들어갔지만, 손님들 가운데 한 사람이 트럼펫을 가져와 이탈리아 팀을 응원하는 바람에 너무 시끄러워 차분하게 관전하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빌리는 이탈리아팀이 0대2로 패하고 말았으므로 술 마실 기분이 나지 않았다. 빌리는 토스카나 저택으로 돌아오려고 술집을 나왔다.
그런데 그때 빌리는 오래된 코무날레(Comunale) 극장 앞에서 프랑스 출신 원로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 80세 생일 콘서트를 알리는 대형 포스터를 발견했다. 빌리가 아바도 못지않게 만나고 싶었던 인물이 메시앙이었던 것이다. 잠시 후 믿기지 않는 일이 생겼다. 메시앙이 극장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빌리는 메시앙에게 잰걸음으로 다가가 인사했다.
“저는 작곡을 공부하는 헤르베르트 빌리라고 합니다. 선생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빌리는 프랑스어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긴 얘기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싶다는 말을 간신히 말했다.
“제 작품을 한 번 봐 주시겠습니까?”
메시앙이 빌리의 간절한 표정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빌리는 그를 설득한 셈이었다.
다음날 빌리는 악보와 녹음된 음악을 들고 피렌체로 돌아와 코무날레 극장에서 그의 아내 이본 로리오드를 먼저 만났다. 그의 아내는 메시앙을 만나고 오더니 말했다.
“남편이 바빠서 5분 밖에 시간이 없다고 해요. 그러니 이해해 주세요.”
그러나 메시앙은 빌리의 악보를 보더니 5분이 지났는데도 일어날 줄을 몰랐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빌리는 메시앙의 진지한 태도에 놀랐다. 특히 그는 빌리가 작곡한 솔로 플루트를 위한 곡의 음표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머릿속으로 음을 감상하는 모습이었다.
“녹음본이 있습니다. 들려 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메시앙은 빌리 음악의 근원이 자신과 흡사하기 때문에 거절했다. 굳이 녹음까지 듣기에는 시간이 아까워서였다. 그는 조류학자로서 새소리, 즉 자연의 소리를 자신의 곡에 접목했으며, 빌리처럼 자연의 소리를 색채 감각과 결합하여 색채의 작곡가라고도 불렸던 것이다. 그는 즉석에서 빌리에게 오케스트라 곡을 부탁했다. 그런 뒤 따뜻하게 정담을 나누었다. 정담이 오가는 중에 음악계의 어두운 면을 지적하며 빌리에게 조언해 주기도 했다.
이를테면 이런 조언들이었다. 음악계는 파벌과 학파, 음모가 있다. 또 자기 음악이 시류에 맞지 않을 때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류에 맞추기 위해 스타일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 오로지 내면에서 들리는 것만 작곡하라. 빌리에게는 음악적인 자기 세계를 확인하고 확신시켜주는 조언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메시앙과 빌리는 음악적인 부분에서 오래된 스승과 제자처럼 의기투합했다. 메시앙은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와 프랑스 음악가들을 연결해 주었고, 이후 두 사람은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해 가을.
빌리는 아바도의 전화를 받았다. 12월 2일 오후 1시에 국립 오페라극장에서 만나자는 전화였다. 빌리는 아침 일찍 열차를 타고 비엔나로 올라갔다. 제1회 비엔나 현대 페스티벌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바도가 빌리를 부른 이유는 다음 페스티벌 때 연주할 곡의 작곡을 의뢰하기 위해서였다. 빌리가 주고 간 악보를 그동안에 틈틈이 살펴본 결과 작곡을 의뢰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크리스마스 때까지 구상해서 새해 초에는 완성해봐요.”
“고맙습니다.”
그러나 빌리로서는 엄청난 시간의 압박 속에서 작업해야 할 작품이었다. 빌리는 즉시 자료들을 차에 가득 싣고 몬타폰 북쪽에 있는 브레겐츠발트의 히티사우 마을의 한 집을 빌려 피신하듯 들어갔다. 눈이 펑펑 퍼붓는 추운 겨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스위스 에멘탈 뤼첼플뤼에 있는 어느 녹음 스튜디오로 찾아가 2주 동안 작업했다. 아무튼 이러한 노력의 결과, 빌리의 1989년은 작곡가로서 비약적인 경력과 명성을 얻은 해가 되었다. 비엔나 소년 합창단, 오스트리아 공영방송국에 소속된 ORF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엔나 콘체르트하우스, 비엔나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에서 빌리의 곡이 연주 혹은 초연되었던 것이다. 빌리로서는 행복한 1989년이었다. 처음으로 ‘작곡가를 위한 오스트리아 국가 장학금’을 받아 아무런 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었던 것도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같은 행운은 아바도와 메시앙을 만났기 때문에 다가온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빌 리가 토스카나에 머물면서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행운이었을 터였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