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가 걱정한 대로 그들은 오계를 넘지 못하고 말았다. 발이 부르터 물집이 생길 정도로 쉬지 않고 걸었지만 오계를 건너지 못하고 하룻밤을 묵어야 했다. 오계란 구화산에서 발원한 다섯 계곡물이 합쳐 흐르는 강물을 말했다.

“여기서 저기까지는 30여 리나 됩니다. 오늘은 여기서 묵고 내일 오르셔야 합니다.”

큰 마을이 오계 너머에 형성되어 있었다. 청양현의 현청이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오계의 다리를 건너 길손을 받아들이는 역관驛館으로 들었다. 역관 주위에는 저잣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거리를 따라 곡식을 파는 미점米店과 약을 파는 약점藥店, 물건을 잡히는 당포當鋪, 기름을 파는 유방油坊, 쇠를 다루는 철장포鐵匠鋪, 차를 마시는 다장茶莊, 식당과 주관酒館 등이 늘어서 있었다.

건물의 모습만 다를 뿐 서라벌의 거리 풍경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지장은 묘하게 고향에 온 듯 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놓였다. 반찬도 서라벌에서 먹던 것이 상에 올라왔다. 가지와 생강이 있어 저녁공양을 배불리 먹고 누웠다.

이른 새벽이었다. 철장포에서 들리는 쇠망치 소리에 잠을 깬 지장은 고제와 헤어져야 했다. 지장은 구화산으로 들어가야 했고, 고제는 귀지로 돌아가야 했다. 지장은 고제의 손에 바랑에서 꺼낸 사금을 쥐어 주었다. 고제는 한사코 뿌리쳤지만 지장은 거둬들이지 않았다. 지장은 고제와 헤어지기가 아쉬워 다장으로 들어가 공복에 차를 마셨다. 고제가 어젯밤 자기 전에 한 얘기를 다시 되풀이했다.

“남향을 원하시면 오계를 따라가지 마시고 곧바로 길을 계속 가시다가 산록을 찾아 들어가시면 됩니다.”

지장은 고제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구화산은 아흔아홉 개의 봉우리를 길게 형성하며 동서로 누워있으므로 기온이 온화한 곳은 남쪽을 바라보는 산록일 터였다.

“다만 남향의 산록은 절벽이 많고 가파르다는 것이 흠이오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고제가 떠난 후 지장은 바로 구화산으로 들어갔다. 한나절을 걸으니 고제의 말대로 어느 산길을 타야 할지 망설여졌다. 큰 계곡이 끝난 곳부터는 바로 천 길 낭떠러지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었다. 지장은 도관에 들어 산세를 물으려 했으나 쫓겨나고 말았다. 낭떠러지 아래의 둔덕 위에는 이미 도사들이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지장은 선청을 앞세우고 가파른 산을 올라갔다. 다행히 선청은 지장이 오를 수 있는 안전한 곳만을 골라주었다. 지장은 날이 어두워지면 선청과 함께 낙엽을 뒤집어쓰고 잤다. 짐승처럼 웅크리고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산 속에서 이틀 낮 이틀 밤을 보내고 나자, 마침내 낭떠러지 위에 조그만 분지가 나타났다. 분지는 대숲에 둘러싸여 있었고, 샘에서 물이 솟고 그 옆으로 작은 개울이 하나 흐르고 있었다.

지장은 보름 동안 쉬지 않고 칡뿌리를 캐고 도토리를 주웠다. 구화산에서 겨울을 날 양식이었다. 그런 다음 움막에서 나와 대나무와 풀로 암자를 지었다. 암자는 햇볕이 하루 종일 들어 겨울인데도 춥지 않았다. 지장은 암자 주위 대밭에 신라에서 가지고 온 차씨를 심었다. 볍씨를 뿌릴 다랑논도 일구어 물을 댔다. 지장이 심은 볍씨는 바로 황립도黃粒稻라는 것이었다. 훗날 이지세李之世는 황립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시로 남기어 지장의 흔적을 느끼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중이 이르는 말, 이국(신라)에서 옮겨왔다네

바리때에 담아 법왕한테 올리네.

山禽未敢銜遺粒 香鉢先擎供法王

겨울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지장의 손발은 짐승처럼 주름 잡히고 거칠어져버렸다. 머리는 삭발한지 오래되어 봉두난발이 되어 있었다. 겨우내 지장은 누구 한 사람 만난 적이 없었다. 청양의 나무꾼이나 도사들도 지장이 있는 곳까지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장이 맞추지는 것들은 산짐승뿐이었다.

지장은 훗날 반타석般陀石이라고 불리게 된 반반한 바위로 내려가 좌선을 다시 시작했다. 반타석 아래로는 아슬아슬한 절벽이었으므로 백척간두에서 진일보를 시험하는 생사가 넘나는 지점이요, 시야는 멀리 청양현의 넓은 뜰이 한눈에 들어 통쾌하고, 반타석은 하루 종일 나무 그늘과 햇볕이 섞여 들어와 천혜의 선방이 되어주었다.

지장의 도반이 있다면 바로 차와 선청이었다. 훗날 이곳을 찾은 승려들은 지장이 머문 띳집을 고쳐 지어 구자암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선청의 이름도 그들을 제청渧聽이라 하여 제청탑을 세워주었던 것이다.

이때 신라 왕실에서는 지장을 찾고자 사람을 청양으로 보내었으나 허사로 끝나곤 했다. 도대체 지장을 보았다는 사람이 나타자지 않았다. 구화산으로 들어간 줄은 아는데 이후 지장을 보았다는 사람이 단 한명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지장이 입산한 지 수년이 흐른 후, 어느 날 산 속에서 길을 잃은 청양의 도사가 지장을 만난 적은 있었다. 그날도 지장은 반타석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서 선정 삼매에 들어 있었다. 도사는 마음속으로 지장을 비웃으며 기다렸다. 가만히 앉아서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지 지장의 수행이 한심했다. 길을 잃은 그 도사는 섭생으로 신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구하러 다니는 것은 구화산에 자생하는 신비스런 약초였다. 도사들은 그와 같이 아직도 구화산에는 불로초가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도사는 지장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먼저 지쳐버렸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지장의 자세는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바위처럼 꿈쩍 않고 있었던 것이다. 사흘째 되는 날 도사는 지장을 불렀다.

“화상이시여, 내말이 들리십니까?”

지장은 도사의 행동 하나하나를 이미 지켜보았으므로 그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길을 잃었구려.”

“벌써 그 자리에서 며칠이 지난 줄 아십니까?”

“불법이 생사를 초월한다는 말입니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았는데 더 무엇을 의심한단 말이오. 그대는 불로초를 얻어 불로장생한다고 하나 그것은 허망한 일이오. 그러나 불법은 장생을 얻고 말 것도 없소. 그저 생사를 초월해버리니까.”

“화상이시여, 어찌 이런 산중에 숨어 사는 것입니까?”

“화상이시여, 혹시 신라에서 오신 분이 아니시옵니까? 신라 사람들이 화상을 만나려고 몇 번이나 청양을 찾아오곤 했습니다.”

“도사여, 어서 일어나시오. 그대는 나에게 길을 묻지 않았소.”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이 개울물이 그대의 스승이오. 이 물을 따라가다 보면 그대가 사는 땅이 나올 것이오.”

도사가 지장의 등 뒤에서 소리쳤다.

그러나 지장은 대답하지 않고 대숲으로 들어가 찻잎을 땄다. 일찍이 그가 심은 차나무는 어느새 가지마다 열매를 주렁주렁 맺고 있었다. 도사가 돌아가지 않고 머뭇거리자 지장이 다시 말했다.

“나에게 불로초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오. 마음을 깨치게 하는 이 찻잎이야말로 불엽佛葉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자, 내 제자가 되겠다면 이 차씨를 가져가 구화산 산 아래 심어 주시오. 차로써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니 차를 스승 삼으시오.”

“이 차씨가 구화산을 덮을 때 구화산은 비로소 연화불국이 될 것이오.”

도사는 지장의 유발有髮 제자가 되어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 뒤 그는 지장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천길 절벽 위로 오르는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산 아래 둔덕에 차씨를 심고 돋아난 싹을 부지런히 가꾸었다.

훗날 도사가 차씨를 심은 차밭 부근에 절이 하나 지어졌는데, 그 절에서는 우연하게도 지장이 마시던 불차佛茶와 맛이 흡사한 차를 만들어내었다.

차맥을 잇는다 함은 차의 가장 순수한 상태인 청정하고 오묘한 경지를 이어간다는 말과 다르지 않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선사들이 왜 그러한 차를 애써 만들어 마시겠는가. 지장이 남긴 불차인 금지차의 경지는 향기가 말고 청량하여 마치 한겨울의 언 개울물을 깨고 마시는 그 맛과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