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밤 지장은 고목이 넘어지는 것처럼 탱자나무 가시더미 위로 쓰러져버렸다. 가시들이 온몸에 박혔다. 시종은 한밤중에 선청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직감으로 움막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느꼈다. 선청이 움막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지장은 눈을 감과 있었다. 시종이 지장을 들어 올리며 몸의 무게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지장의 몸은 가죽과 뼈만 남아있었다. 탱자나무가시가 박힐 살도 없을 만큼 장작처럼 말라 가죽과 뼈만 붙어 있었다.
시종은 움막에서 가까운 보천암으로 지장을 업고 달렸다. 보천은 지장을 보자마자 작은 쇠솥에 시종더러 찻물을 끓이게 했다.
“몸에서 기운이 사라지고 있어.”
“보천 스님, 병이 아니란 말입니까?”
“병이 아니라 기운이 잠시 삭은 것이야. 조금 늦었더라면 죽고 말았을 것이야.”
“죽을 쑤어 올릴까요?”
보천은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지금 지장의 호흡을 불러올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야.”
“스님 그것이 무엇입니까?”
“죽통 속에 신령스러운 것이 있지.”
보천은 죽통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황갈색 빛깔의 작은 덩어리가 죽통에서 나왔다. 보천은 그릇에 황갈색의 덩어리 한쪽을 떼어 넣었다. 그런 다음 시종이 가지고 온 펄펄 끓는 물을 그릇에 부었다. 그러자 사발안의 뜨거운 물은 금세 황갈색으로 변해갔다.
“이것이 바로 차(茶)다. 원래는 지리산 화전민들 사이에 전해오는 만병통치약으로, 맛과 향이 뛰어나 지금은 왕실에서 마시고 있다.”
시종은 대궁에서 왕족들이 담소하면서 나뭇잎을 우려내 마시곤 했던 것이 차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시종이 지장에게 찻물을 숟가락으로 넣어주자, 지장은 잠시 후에 눈꺼풀을 움직였다.
차의 효험은 금세 나타났다. 지장의 입술이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듯 달싹였다. 차를 한두 방울씩 계속 마신 지장은 이윽고 이마에 땀을 내기 시작하더니 눈을 떴다. 지장은 누운 채 보천을 보는 순간 놀랐다. 자신이 보천암에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천이 말했다.
“자, 지장스님은 오늘밤 이곳에서 쉬시오, 조금만 늦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소. 정신이 깰 때까지 보천암에서 푹 머무시오.”
“스님, 면목 없습니다.”
“아니요, 내게 차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소. 다행이 암자에 황룡사에서 가져온 차가 있었소. 황룡사 스님들이 마시는 차라오.”
지장은 찻물이 쌓인 독을 씻고 있기에 자신의 몸이 가벼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지장은 혈색이 원래의 빛깔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기력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정신만은 맑게 깨어나고 있었다.
“보천스님, 차의 효험이 이와 같이 생사를 바꿔놓는 줄 몰랐습니다.”
“마침 황룡사에 차 씨가 있어 바랑에 가득 가져왔소, 올해도 암자 앞 산자락에 차 씨를 심어두었소.”
“오대산에서도 차나무가 자랍니까?”
“아니요, 사실은 몇 해 전부터 계속 차 씨를 심어왔지만 싹이 트지는 않았소. 오대산의 냉한 기후 때문인 것 같소.”
지장은 대궁에서 차를 좋아했던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차는 따뜻하고 그늘이 많고 비가 자주 오는 땅에서 잘 자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게 옳은 말이오, 허나 지성이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말이 있잖소. 보천암이 따뜻한 양지이니 차 씨가 살아날지도 모르겠소. 지장스님도 차 씨가 필요하다면 남은 것이 있으니 가져가시오.”
지장은 그날 밤 시종을 띳집으로 내려 보내고 선청과 함께 보천암에서 머물렀다. 죽을 한 그릇 비우고는 깊은 잠에 든 후 새벽에는 기력을 거의 회복했다. 눈을 뜬 지장은 동이 틀 때까지 보천과 차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지장이 오대산에 들어온 이후 수행자와 얘기를 길게 나누기는 처음이었다.
선창이 기운 달을 보고는 공연히 짖었다. 보천과 지장은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얘기에 취해 산창이 푸르게 밝아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지장스님, 이 짚신을 가져가시오.”
지장은 짚신을 보는 순간 그것이 낭낭의 솜씨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언젠가 낭낭의 짚신을 산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장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낭낭과의 인연이 사라졌다고 믿었는데, 보천스님으로 인해 다시 이어지는구나하는 생각이 구름처럼 일어나 흘러갈 뿐이었다.
“보천스님께서 주시니 귀하게 받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짚신을 본 적이 없소.”
보천은 짚신을 앞에 놓고 감탄을 했다 그러나 지장은 별 감흥 없이 짚신을 바라보기만 했다. 보천의 다음 말에 마음이 조금 흔들렸을 뿐이었다.
“지장스님, 이제는 오대산에도 절이 여러 군데 들어서 정진하는 스님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 여인에게 부탁을 했소. 오대산 스님들에게 짚신을 대중공양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오.”
“여인이 뭐라 했습니까?”
“오대산으로 오겠다고 했소. 하하하”
“험한 길을 혼자서 올 수 있겠습니까?”
“내년 초파일에도 국왕께서는 대소 신료들을 진여원에 보낼 것이오. 그러니 국사를 비롯해서 많은 스님들도 동행하지 않겠소? 여인은 그때 뒤따라올 것이오. 황룡사 주지께 특별히 부탁을 해두었소.”
지장은 낭낭보다는 왕경의 신하들에게 마음이 더 쓰였다. 그들을 만나면 신분이 드러날 수도 있고, 쓸데없는 구설수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보천이 다시 말했다.
“신하들 중에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이들이 많소. 그러니 혹시 지장스님도 당나라에 유학하고 싶다면 내게 말하시오. 그들이 사절로 갈 때 같이 떠나게 된다면 고생을 그만큼 덜 수 있으니까.”
성덕왕 13년(714)에 급찬 박유가 새해를 축하하는 하정사賀正使로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들어가 당 현종을 만나고 온 적이 있는데, 견당사遣唐使 박유는 보천과 죽마고우였다. 또한 박유는 불심이 깊어 오대산으로 자주 와 참배하곤 했다. 보천은 박유를 만나 견당사가 서해 당은포에서 10여 척의 배로 선단을 만들어 바다를 건넌다는 것과, 일행 중에는 승려가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승려가 견당사 일행에 꼭 들어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승려는 견당사 일행이 당의 수도 장안까지 가는 동안 바다에서 풍광을 만나거나 산중에서 길을 잃었을 때 『관음경』이나 『지장경』을 외며 무사히 도착하기를 비는 기도를 주재했던 것이다.
한편, 견당사는 그 성격에 따라 왕의 죽음을 당 황제에게 알리는 고애사告哀使, 실책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사죄사謝罪使, 황제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사은사謝恩使, 조공을 바치기 위해 떠나는 조공사朝貢使, 전쟁 중 당의 군사를 요청하는 청병사請兵使 등이 있었다.
지장은 보천의 말을 마음에 담지 않고 가볍게 받아넘겼다. 당시 승가에서는 당나라로 유학 가는 풍습이 유행하고 있었지만 지장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원효가 캄캄한 밤에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다음날 아침에 깨달음을 얻었듯 불법은 하나로 회통할 뿐이고, 수행은 어디서 하든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보천스님, 오대산에 상주하는 문수보살과 지장보살을 친견한 후에야 그 일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언제든지 말하시오.”
지장은 다시 좌선대 움막으로 올라갔다. 보천이 며칠 더 몸을 보한 후에 정진하라고 만류했지만 듣지 않았다. 오대산의 겨울은 서라벌과 달랐다. 폭설은 산길을 곧잘 끊어 버렸고, 눈보라는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몰아쳤다.
그해 움막의 덮개는 폭설과 눈보라로 몇 번이나 무너지곤 했다. 그러나 지장은 눈가루가 움막 안까지 쌓여도 동면하는 곰처럼 겨우내 움막 안에서 꼼짝 않고 정진했다. 삽살개 선청은 신장神將이 되어 움막을 지켰고, 시종은 지장의 충직한 공양주가 되었다. 그래도 움막 안은 행자 시종이 무쇠 솥에 찻물을 끓일 때마다 더워진 공기로 훈훈했다. <계속>
글 정찬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