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발원 2

​이 세상에 명과 복은 길이길이 융성하고(此世福基命位 各願昌隆) 

오는 세상 불법 지혜 무럭무럭 자라나서(來生智種靈苗 同希增秀) 

세상에 삼대 거짓말이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것, 노인네가 일찍 죽어야지 하는 것, 처녀가 시집 안 간다는 것이라는 속설이 있다. 이 속설 때문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는 요즘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노령국가에 진입 중이다. 노인 인구가 넘쳐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게다가 아이를 낳지 않겠다거나 아예 결혼하지 않겠다는 젊은이가 곳곳에 넘쳐나고 있으니, 노령인구 비율은 당분간 가파르게 치솟을 것이 분명하다. 

노령인구가 급증한 가장 큰 원인은 평균 수명(壽命)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수명이 길어진다는 것이 반드시 좋거나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제명에 죽지 못하는 것은 피하고자 하는 것인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러므로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장수(長壽)를 축원해 왔고 축원 중이다. 그런데 명(命)에는 아주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관장하는 것의 의미도 함께 내포되어 있다. 명에 사람이 다스릴 수 없는 하늘의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공자는 나이 오십을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했다. 오십 세가 천명(天命)을 아는 나이라는 뜻이다. 천명은 글자 그대로 하늘의 명령이다. 명을 두고 운명이니, 팔자니, 섭리니 하는 말들이 모두 그래서 나온 말들이다. 

아무려나, 장수와 함께 세트처럼 따라붙는 것이 복(福)이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수복강녕(壽福康寧)이라는 사자성어는 연말연시나 생신 등을 맞았을 때 건네는 최고의 인사말이자 축원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한문의 복(福)자 는 ‘잘 차린 제사상(豊)으로 제사(示)를 지내 하늘에서 내린 복을 받는다.’하여 복을 뜻하게 된 회의자이다. 오른쪽 畐(가득할 복)의 음도 ‘복’이기 때문에 형성자로 보는 견해도 있고, 부(富)와 어원을 연결 짓는 견해도 있다. 

복은 삶에서 누리는 큰 행운과 오붓한 행복이다. 인간의 힘을 초월한 천운에 의해 저절로 돌아가는 길흉화복의 운수로 이해되기도 한다. 수명장수와 충분한 부의 축적, 귀함 따위를 기원하는 복사상은 특히 한국인의 삶을 밑바닥에서 움직인 끈질기고 보편적인 동기였다. 한국인은 복을 비는 가운데 태어나서, 복을 비는 마음속에서 자라나, 복을 비는 뭇 상징 속에 둘러싸여 복을 빌며 살다가, 다시 복을 비는 마음속에서 죽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통 복사상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기여한 가장 큰 실천적 기능은 생명의 절대 긍정, 현실의 절대 긍정에 바탕을 둔 생존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복은 사람의 삶에 관련된 선악·행복·불행의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것이다. <서경(書經)에는 장수[壽], 풍요롭고 부유함(富), 건강하고 마음 편안함[康寧], 심성의 후덕함[攸好德], 임종을 성취함[考終命]을 다섯 가지 복(五福)으로 보았다. 우리나라의 속설에도 아내를 잘 만나는 것도 복이고, 이가 튼튼한 것도 복이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복의 개념은 그 외연적(外延的) 의미도 일정하지 않고 내포적(內包的) 의미도 분명하지 않지만, 한국 사람들은 스스로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복을 빌면서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

사실 복은 우리들의 일상생활과 의식에 너무나도 밀착되어 있어서 오히려 보거나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언제나 더불어 있기 때문에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복을 비는 마음이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해서 되돌아보면 우리들의 일상적인 언어생활에, 그리고 우리들의 가까운 의식주 생활에 얼마나 많이 복을 비는 말과 그를 조형화한 상징들이 산재해 있는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불교에서도 명과 복에 대한 기록은 자주 등장한다. <월저당대사집(月渚堂大師集)> 하권 소(疏)-16편 ‘약사회소(藥師會疏)’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임오생 김 씨와 갑자생 조 씨는 수명이 참죽나무 같아 오래도록 늙지 않고 복을 맡은 별이 길이 밝게 비추어 금지옥엽의 연이은 아름다움을 보전하게 하고, 요풍순일의 지극한 다스림을 누리게 하소서.”

남방불교에서는 비구들이 재가자로부터 보시를 받을 때 해주는 축원에 장수와 복덕을 기원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테라와다불교의 대표적 축원이 된 법구경 문구는 빠알리어로 ‘아유 완노 수캉 발랑(āyu vaṇṇo sukhaṃ balaṃ)인데, 그 뜻은 ‘장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기를’이다. 

​이산혜연선사의 발원문구 ‘차세복기명위 각원창융(此世福基命位 各願昌隆)’를 직역하면, ‘이 세상의 복락의 바탕과 목숨의 지위가 각기 번창하고 융성하기를 바란다.’이다. 선사께서는 이처럼 이 명(命)과 복(福)이 크게 번창하고 높이 성하기를[昌隆] 발원했다. 昌은 번창한다는 의미이고, 隆은 높이 흥성하다는 뜻으로, 번창하고 흥성하라는 중첩된 발원의 간절함이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운허스님은 이 복잡하고 난해한 원문을 ‘이 세상에 명과 복은 길이길이 융성하고’라고 압축해 정리하셨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명과 복이 길이길이 융성하기를 발원한 이산혜연선사가 간절하게 원한 내생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일까? 명과 복이 세속적 차원의 행복 추구였다면, 당연히 내생에는 속리(俗離)의 삶에 대한 희구였을 것이다. 실제로 선사는 내생에는 지혜의 씨앗[智種]이 신령스럽게 싹트기[靈苗]를 발원하고 있다. 지종영묘(智種靈苗)는 불법(佛法), 즉 부처님 가르침과 지도로 얻어질 수 있는 지혜의 씨앗이자, 신령스러운 싹이라는 의미이다. 

지종은 종지(種智)의 다른 표현으로 일체종지(一切種智)의 약칭이다. 따라서 지종은 부처님께서 모든 법(만법)의 개별적인 차별상과 보편적인 평등상을 모두 자세히 아는 지혜를 의미한다.

영묘(靈苗)는 신령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훌륭하게 잘 자란 모종이나 묘목을 뜻하는 일반적인 한자어 표현이지만, 동시에 이 용어는 선종(禪宗)의 법문 등에서 깨달음의 가능성 또는 수행을 통해 성장하는 불성(佛性)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예컨대, 송나라 시대 소동파의 시구로 ‘영묘화수부지춘(靈苗花秀不知春)’, 즉 ‘신령한 싹에서 꽃이 피어나도 봄이 온 줄 모르는구나!’에서 그 용례를 만날 수 있다. 여기서 영묘는 ‘깨달음의 경지’를 말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내재된 본질적인 깨달음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묘(靈苗)'는 특정한 불교의 교리적 용어라기보다는, 불교적 가르침을 표현하기 위한 비유적이고 문학적인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듯싶다.

이산혜연선사는 불성을 상징하는 이 지혜의 씨앗이자 신령스러운 묘목이 ‘바라건대[希] 함께[同] 더욱 빼어나게 자라나기[增秀]를’ 발원한다. ‘증수’는 각각 ‘더할 증(增)’과 ‘빼어날 수(秀)’ 자의 결합으로, 글자 그대로의 뜻은 ‘빼어남을 더하다’ 또는 ‘더 뛰어나게 하다’이다. 예컨대, 아이가 지금보다 더 훌륭하고 빼어난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의미, 또는 어떤 것이나 능력, 성과 등이 더욱 향상되거나 뛰어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증수는 여말선초의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시(詩) 한 구절의 시어로 등장한다. 바로 ‘만안강산증수기(萬眼江山增秀氣)’가 그것인데, ‘눈에 가득한 강산이 빼어난 경치를 더한다.’ 또는 ‘눈앞에 펼쳐진 강산의 경치가 더욱 아름다워진다.’라는 뜻이다. ‘더 한다’ 거나 ‘더욱’이라는 강조의 의미를 지닌 부사로 증수가 다양하게 활용되는 좋은 예다. 

이산혜연선사의 발원 ‘내생지종영묘 동희증수(來生智種靈苗 同希增秀)’는 내생에는 지혜의 종자와 영명한 싹이 함께 증장하여 빼어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이 중층적이며 깊고도 오묘한 발원을 운허스님은 ‘오는 세상 불법지혜 무럭무럭 자라나서’라고 간결하게, 그러나 매우 적확한 의미를 담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