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이 낭낭에게 사랑을 느낀 때는 초파일 밤이었다. 수많은 연등이 황룡사 뜰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산처럼 솟은 구층탑 주위도 연등 불빛으로 대낮처럼 밝았다. 연등은 구층탑 꼭대기까지 사방팔방으로 달려 불을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황룡사는 말 그대로 연화불국을 이루고 있었다.
연화불국의 밤은 조용했다. 낮 동안은 왕경 사람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절을 가득 채웠으나 밤에는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따금 밤중 기도를 준비하기 위한 승려와 신도들이 연등 밑을 오갈 뿐이었다.
지장은 낮 동안에는 움직일 수 없었다. 혜통국사를 초청하여 왕실 불당에서 치러지는 법회와 연희에 참석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던 것이다. 밤이 되어서야 지장은 왕실을 빠져 나와 황룡사로 향할 수 있었다.
지장은 평민이 입는 옷으로 변복을 했다. 그래야만 황룡사에 가서도 주지승을 만날 필요도 없고 부담스러운 접대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도 무술에 능한 종자는 항상 데리고 다녔다. 지장은 종자를 앞세우고 서둘러 황룡사로 갔다.
법당으로 바로 들어간 지장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법당 천장에는 수백 개의 연등이 불이 켜진 채 연꽃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지장은 마치 연꽃이 만발한 용궁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연들 불빛에 드러난 부처의 미소가 더없이 자비로웠다. 부처의 미소는 지장에게도 전염되었다. 지장도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종자가 법당 문 밖에서 지장을 불렀다.
“마마, 저기 신발을 파는 여자가 있사옵니다.”
“그게 어쨌다는 것이냐?”
“마마께서 곤경에 빠진 저 여인을 구해주지 않았습니까? 저 여인에게 짚신을 사서 저에게 선물하셨고요. 헤헤.”
“아, 그랬었지.”
지장은 며칠 전에 동시 거리에서 만났던 여인을 떠올리고는 법당 밖으로 나왔다 뜰은 어두웠지만 연등 불빛이 환해서 한눈에 낭낭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지장은 구층탑의 뜰을 지나 종각 쪽으로 걸어갔다. 종자가 앞서가 낭낭에게 말을 걸었다.
“마마께서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마마라니요?”
“며칠 전에 짚신을 사셨던 마마를 벌서 잊으셨습니까?”
“아, 그분을 어찌 잊을 수 있겠사옵니까? 그분이 바로 마마셨군요.”
지장이 다가와 말했다.
“고개를 드시오, 낭낭은 왜 이 한갓진 곳에 서 있는 것이오.”
“이곳에 연등을 걸고 축원하고 있었사옵니다.”
“연등을 사 달았다니 다행이오.”“네, 바로 이 연등이옵니다.”
낭낭이 가리킨 연등은 구층탑에서 종각까지 뻗어온 줄의 맨 끝에 달려 있었다. 낭낭은 시장 거리에서 보았던 강한 모습과 달리 여염집의 다소곳한 규수로 변해 있었다. 흰옷의 치마와 저고리 차림에 머리는 정갈하게 땋아 늘어뜨리고 있었다.
“저것도 제가 단 연등이옵니다.”
“두 개를 달았단 말이오?”
“마마, 처음에는 한 개만 달려고 했으나…….”
“그런데 또 한 개를 더 달았단 말이오?”
“마마을 위해 소원을 빌고 싶어 또 달았사옵니다.”
“나를 위해서라고.”
“마마께서 저를 구해주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가지고 있던 짚신을 다 빼앗겼을 터이고, 장사치들 앞에서 크게 망신당했을 것이옵니다.”
“그래 빚을 갚겠다는 것인가요?”
“은혜를 갚고 싶사옵니다.”
지장은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난 아무것도 도움을 준 것이 없는데 연등을 달아 나를 위해 기도한다니 오히려 내가 미안해지는구려.”
지장은 낭낭의 눈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인다고 느꼈다. 실제로 낭낭의 두 눈동자에는 연등의 불빛이 보석처럼 영롱하게 어리어 있었다. 종자가 지장에게 길을 재촉했다.
“마마, 이제 대궁으로 돌아갈 시간이옵니다. 조금 있으면 궁문이 닫히옵니다.”
“그래, 가자꾸나.”
지장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낭낭의 호수처럼 깊은 눈이 잊혀지지 않았다. 눈뿐만 아니라 코도 입도 뺨도 목화처럼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에다 복사꽃처럼 붉은 귓불까지 아련하게 어른거렸기 때문이었다.
낭낭을 왕궁에서 마음대로 만날 수 없는 골품제도가 원망스럽기조차 했다. 단 한번도 불편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골품제도였지만 낭낭을 만난 이후로는 그것이 사람을 차별하는 제도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와 낭낭은 다 같은 사람이 아닐 것인가. 그러고 보니 나는 골품이란 것이 있어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고, 낭낭은 바로 골품 때문에 고초를 겪어왔구나.
지장은 낭낭을 만나 위안을 주고 싶었다. 붓을 들어 목간에 낭낭을 만나고자 한다는 글을 썼다가는 지우고 다음날 낮에 종자를 불렀다. 지장은 종자에게 말을 타고 사량부에 있는 낭낭의 집을 다녀오게 했다.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낭낭은 남천 갈대밭에 먼저 나오 지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웃자란 갈대들이 봄바람에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달빛이 번들거리는 남천의 개울물은 사금밭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지장은 종자에게 개울가에서 말먹이를 시키고는 갈대밭으로 내려갔다.
낭낭은 품에 무언가를 안고 있었다. 그려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지장이 말문을 열었다.
“종자를 보내어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종자를 보냈으니 이해해주시오.”
“마마, 그러셨사옵니까?”
“고맙소, 어느새 이해해주고 있구려.”
“마마,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소녀이옵니다. 마마께서 이렇게 나오시어 은혜 갚을 기회를 다시 주셨으니까요.”
“은혜라니,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이오. 그런 말 다시는 하지 마시오.”
“아니옵니다. 마마.”
낭낭은 고개를 조금 들더니 품에 안고 있던 것을 지장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이오?”
“마마, 집에서 키우던 어린 삽살개이옵니다. 어찌나 영리한지, 언젠가는 마마게 크게 도움을 드릴 것이옵니다.”
“고맙소.”
지장은 얼떨결에 솜뭉치처럼 작고 하얀 강아지를 받았다.
“이름이 무엇이오?”
“정식으로 짓지는 않았사오나 집에서는 선청이라 부르자고 했습니다.”
지장은 소리 내어 중얼거리며 말했다.
“선청이라, 소리를 잘 듣는다는 이름이군. 귀가 밝은 모양이야.”
“그렇사옵니다. 귀가 밝아 짐승들의 먼 발소리만 듣고도 사냥을 잘하는 개이옵니다.”
“잘 키우겠소.”
지장은 낭낭과 많은 얘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날 밤은 종자가 궁문지기에게 미리 부탁을 해놓았으므로 늦게 돌아가도 무사히 궁문을 출입할 수 있었다.
이후 지장은 수시로 남천의 갈대밭에서 낭낭을 만났다. 어느 날인가는 낭낭의 몸을 갖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 손가락을 걸고 장래를 약속하기도 했다. 왕궁을 도망쳐 변방에 살 것을 각오하고 한 약속이었다.
그러나 지장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무모한 약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신분을 뛰어넘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했다. 골품제도를 벗어나 낭낭과 살려면 자신이 무품無品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자신과 낭낭은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다만, 무품이 되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있었다. 낭낭과 헤어진 뒤, 왕경의 궁을 떠나 출가를 하면 골품의 관등은 바로 사라져버렸다. 성골이든 진골이든 육두품이든 출가하는 순간 무품이 돼버리는 것이었다.
지장은 스무 살이 되자마자 출가자의 뜻을 굳혔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낭낭을 애써 외면했던 것이다.
지장이 좌선을 푼 것은 새벽이 다 되어서였다. 졸던 선청이 컹컹 짖었다. 검은 그림자가 지장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산짐승은 아니었다, 잠이 많은 종자일 리도 없었다. 지팡이를 짚고 걸어오는 것으로 보아 오대산에 사는 수행자가 분명했다.
“좌선만이 수행이 아니니 어서 들어가시오. 산중의 찬 이슬은 몸을 상하게 하는 독이니까요.”
“보천 스님, 무슨 일로 새벽같이 길을 떠나십니까?”
“서라벌 황룡사에서 법문해달라고 하여 떠나는 길이오. 그래 일찍 걸음을 서두르고 있다오.”
보천은 지장보다 10여년 연상이었다. 효소왕의 친동생인데, 외삼촌인 부군副君이 두려워 열두 살쯤에 오대산으로 도망쳐 들어온 이후 승려가 되어 주저앉고 만 왕족이었다. 성품이 어질고 선하여 눈물을 잘 흘리는 인물이었다.
당시는 신문왕이 죽고 나자, 왕의 정비인 신목왕후가 혜통국사와 논의하여 국사를 섭정하던 시기였다. 신목왕후의 맏아들인 효소왕이 어린 5세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왕족들은 철부지 어린 왕을 업신여기었고, 그 중심에 선 왕족이 바로 신문왕의 아우인 부군이었다.
왕궁 안의 시위부 군사를 장악한 부군의 횡포는 심했다.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몰랐고, 불안해진 신목왕후는 은밀하게 혜통을 왕실로 불러 상의한 끝에 두 아들, 즉 차남과 삼남을 피신시키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어린 보천과 효명은 서라벌을 벗어난 지점에서 부군의 1천 명 시위 군사를 따돌리고는 오대산으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신목왕후와 혜통의 계책은 지혜로웠다. 섬으로 유배 갔다가 돌아온 부군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효소왕을 비명횡사케 했지만, 천우신조로 부군의 반란이 신목왕후를 따르는 군사에 의해 진압되어 오대산으로 피신해 갔던 효명이 대궁으로 돌아와 왕위를 이었는데, 그가 바로 전제왕권을 비로소 확립한 성덕왕으로 이름은 효명(『삼국유사』)혹은 흥광(『삼국사기』)이었다.
따라서 성덕왕은 어느 왕보다도 불심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은신하고자 오대산에서 승려로 위장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날마다 형인 보천과 함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여러 불보살의 현신을 보았던 것이다.
성덕왕이 즉위한 지 4년 만에 오대산으로 목수를 보내어 문수도량인 진여원眞如院을 짓게 하고, 대소 신료들과 그 곳으로 친히 나아가 참배한 것은 자신의 깊은 불연佛緣과 무관치 않은 일이었다.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준 수행자 보천 형님에 대한 부담감도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을 터였다.
지장은 보천이 황룡사로 떠난 뒤 다시 가부좌를 틀었다. 좌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무슨 방법으로라도 낭낭의 잔영을 끊고 나서야 일어서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백견白犬 선청이 지장의 옷을 물어뜯으며 좌선대를 내려가자고 보챘지만 지장은 움직이지를 않았다. <계속>
글 정찬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