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이 쌓여 허옇게 변한 신문왕릉을 나섰다. 마치 왕릉 속으로 들어가 신문왕과 흠돌의 반역을 보고 나온 느낌이었다.

-욕망은 인간을 미치게 하고 마는구나. 여색에 미치고 왕권에 미쳐 마침내는 참형을 당하고 마는구나. 반역의 괴수 흠돌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신문왕릉은 권력과 여색의 욕망을 버리라고 외치는 듯했다. 그것이 바로 본래 인간으로 남아 있게 하는 길이라고, 나는 문득 천년 전 청년 지장도 나와 같은 상념에 잠기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어쩌면 지장은 나보다 더 깊은 상념에 빠져 밤을 세웠을 것이었다. 그는 가까운 선대의 근족近族과 얽힌 반역의 이야기를 어린 시절부터 듣고 자란 왕궁 안의 왕족이었던 것이었다.

-욕망을 좇아 살 것인가. 욕망을 버리고 살 것인가.

지장의 고민은 바로 그것이었을 터였다. 왕도의 길을 걸을 것인가 법도의 길을 걸을 것인가. 왕도王道란 권력을 좇는 길이고, 법도法道란 마음을 비우는 불법의 길인 것이다.

나는 서둘러 신문왕릉을 빠져 나와 남산 가는 길로 달렸다. 천년 전 지장이 올랐던 남산으로 향했다.

남산.

천년 전의 남산은 신라인들의 이상향이었다. 더 신앙적으로 말하면 신라인들이 고달플 때 찾는 자비의 불국이었던 것이다. 불국은 현재의 정토가 되었고, 그리하여 신라인들은 남산의 골짜기마다 절을 짓고 탑을 세우고 바위마다 부처를 새겼던 것이다.

남산마을을 관통하자 사과밭 사이로 비포장도로가 나오고 승용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산의 초입이 보였다 다행이 사과밭 끝에는 승용차를 서너 대 주차할 수 있는 공터가 있어 나는 안심하고 주차했다.

산길은 솔숲 사이로 나 있었다. 외길이라고는 하지만 초행이었으므로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눈 쌓인 산길에 발자국을 남기며 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뒤돌아보니 하얗게 설경으로 변해버린 경주의 분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바가지를 거꾸로 군데군데 엎어놓은 듯한 왕릉들도 눈에 띄었다. <계속>

글 정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