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와서 서양사람들은 동양문화와 동양정신에 대한 동경을 가지기 시작했다. 실용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그네들 삶의 관습이 어딘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정신적 공허감을 못 견뎌하던 차에, 어느 날 코리아에서 온 ‘아티스트 허’가 펼쳐 보인 화선지 속 ‘이모그래피’는 그들 유럽인을 놀라게 하고도 남았다.

이모그래피란 이모션(emotion)과 그래피(graphy)의 합성어로서, 동양적 감성을 서양 현대미술의 회화적 관점으로 해석하고 표현한 새로운 서예 미술 장르이다. 이 작가의 이모그래피는 말하자면 서(書)와 화(畵)를 작가의 영적 에너지로 버무려 음양오행 법칙으로 혼연시킨 것인데, 이에 대해 ‘이미지 시대의 서예’(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큐레이터 이동국) 또는 ‘사물을 본떠 관념을 나타낸 문자가 아니라 감성의 흔적’(재독 미술평론가 류병학)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모그래피의 창시자 ‘아티스트 허’의 이름은 무산 허회태이다. 일찍이 문기(文氣) 넘치는 글씨와 전각으로 우리에게 새겨졌던 그는 이모그래피라는 새로운 장르로 다가온 것이다.

2006년 독일 베를린에 펼쳐진 허회태의 화폭을 본 유럽 미술 평론가들은 미디어아트를 평면아트로 되돌려올 수 있는 수작이라며 환호한다. 그런데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미디어아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람이 코리언 백남준이며,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평면아트 주인공 또한 코리언 허회태라는 사실을.

구대륙과 신대륙의 미술 전쟁은 역사가 깊다. 애초에 그 싸움은 신대륙에서 나팔을 불었으니, 그 주자는 잭슨 폴록이다. 이후 라이센버그의 신표현주의와 앤디 워홀의 팩토리 예술 등 여러 사조를 거쳐 현대 미술의 주도권은 신대륙으로 넘어가고 말았으며, 그 정점에 미디어아트라는 장르로 신대륙 미술을 주도한 백남준이 있는 것이다.

이런 현대 미술사적 알력을 바탕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른바 와신상담하고 있던 구대륙인(유럽인)들은 허회태의 2006년 베를린 작품들을 보는 순간 숨통이 트일 수밖에 없었다. 신구 대륙간의 미술 장르 헤게모니 다툼에서 이길 수 있는 신무기를 찾은 셈이었으니까.

허회태의 베를린 전시회는 성황으로 끝나고, 이러한 이유로 유럽 큐레이터들로부터 들어온 제안은 현대미술의 중심인 뉴욕으로 곧장 동행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허회태는 고민 끝에 그 제안을 보류했다. 그에게는 그만의 예술적 욕심과 고민이 있었다. 베를린 전시회에서 처음 선보인 서예의 새 장르 이모그래피를 더 높은 예술적 경지로 다듬는 것이었다.

3년이 지난 이제, ‘2010 허회태 이모그래피 미국전’을 앞두고 이륙 직전 그는 우리에게 평가받기를 원하고 있다. 다음달 4일부터 10일까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당에서 열리는 ‘허회태 서화각 47년전’에서 글로벌 서화의 가능성을 엿보는 것은 우리의 즐거움이자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