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처음 이 인연 이야기를 들었을 땐, 그 내용이 너무 짜 맞춘 듯해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닐까 했을 정도였다. 또 인연담의 두 주인공이 늘 자주 뵙는 분이라서 자칫 가까운 분들을 소개한다는 핀잔을 듣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아름다운 인연 이야기를 그동안 기억 속에 넣어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5월 24일, 효당 최범술 선생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차선회(茶禪會)의 야외모임에서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마침 그 자리에는 두 주인공이 함께 했는데, 그 중 한 분이 스스로 여러 참석자들에게 이 인연담을 소개한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분들이 어찌나 큰 감동을 받는 지, 몇몇 분들은 미디어붓다를 통해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는 널리 알려야 한다는 주문을 해왔다.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소개하기로 한다. 이 이야기는 시점과 배경은 52년 전의 목포로 거슬러 올라간다.

책으로 만난 서점집 아들과 가난한 문학지망생

전라남도 목포. 이곳 소도시의 길가에는 서점이 하나 있었다. 살림집이 딸린 책가게였는데, 바닷가 도시에 있는 서점이라 이름이 ‘대양서점’이었다. 지방도시에 있는 서점 중에서는 그런대로 문학서적을 비롯해서 각종 책을 비치하고 있는 곳이었다.

당시는 몹시 가난한 시절이어서 이곳에 들르는 사람들은 책을 사는 사람들보다 책을 사는 척 들려서는 읽고 그냥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공부와 관련된 책을 사는 학생들을 빼면 서점을 찾는 사람들은 대개 글을 쓰거나 이런저런 소일거리로 책을 읽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서점을 자주 찾는 이 가운데 한 고등학생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문학에 소질이 있었던, 따라서 문학서적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이 학생에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길은 서점에 들러 ‘도둑 독서’를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동생도 여럿 있었던 그는 문학책은커녕 참고서도 사볼 형편이 못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도 한 두 번이나 가능한 일. 책방 점원의 눈치가 사나워 여간내기로서는 매일 서점을 찾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따금씩 비슷한 생각으로 책방에 들려 사지는 않고 읽기만 하다가 내쫓기는 이들을 볼 때면 이 고등학생은 그만 가슴이 뛰어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젠가 한번은 올 날이 드디어 오고야 말았다. 「현대문학」이라는 책을 보고 있는데, 카운터에서 ‘어이, 학생’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책을 제자리에 꽂아 놓고 쭈뼛쭈뼛 하고 있노라니, 다시 소리가 들려온다. ‘보던 책 가지고 와!’. 이크, 제대로 걸렸구나. 이 학생은 따귀를 맞을 각오를 하고는 책을 들고 카운터로 다가갔다. 카운터에는 2년쯤 선배로 보이는 고등학생이 앉아 있었는데, 책을 건네 받더니 두 말도 하지 않고 벽에 걸린 달력 한 장을 뜯어 책 표지를 싸는(포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책을 건네주면서 “야, 이 책 집에 가지고 가서 실컷 보고 도로 가져와. 깨끗하게 봐야 돼.” 그리고는 점원을 불러, 앞으로 이 학생이 보고 싶은 책은 무조건 빌려주라고 지시를 하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이 문학 지망생은 마음 놓고 책을 볼 수 있었다. 주인집 학생이었던 선배는 어느 날 이 후배 학생이 배가 고파 보이면, 형수에게 친구가 왔는데 밥 한 그릇을 더 달라고 해서 허기를 달래 주는 등 마음으로부터 배려를 해 주는 것이었다.

이런 배려로 이 문학 지망생은 『슬픔이여 안녕』『무기여 잘 있거라』『삼국지』『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등의 외국 명작과 국내 유명작가들의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자주 만났던 두 사람은 그 당시 형제의 연을 맺었다. 두 사람은 형제의 연을 맺으며 서로 손을 맞잡고 다짐을 했다.

“아우야, 너는 문학을 좋아하니 나중에 우리나라 최고의 작가가 되어라. 나는 책을 파는 집에 태어났으니 우리나라 최고의 출판사 사장이 될 테니…”

“형님, 잘 알겠습니다. 꼭 최고의 작가가 될께요.”

반세기 지난 오늘, 문화계 두 거장으로 결실 이루다

그 후 반세기가 훌쩍 지나간 지금, 의형제를 맺은 두 사람은 고등학생 시절 다짐했던 약속을 이뤄냈다.

책을 빌려준 서점 집 아들인 형은 우리나라 최초의 상장 출판사이자 최고의 출판사로 명성이 높은 삼성출판사의 사장을 거쳐 지금은 회장으로 있는 김종규 회장이다. 김종규 회장은 출판계는 물론 박물관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문화계에서도 우리나라 최고의 마당발로 통한다.

도둑 독서를 하다가 김종규 회장의 배려로 마음껏 문학공부를 할 수 있었던 아우는 문화방송에 입사해 ‘오발탄’, ‘신문고’, ‘세계 속의 한국인’이라는 최고 인기프로그램의 방송작가로 명성을 떨친 윤청광 작가이다. 윤청광 작가는 문화방송을 나온 뒤로는 출판계에 투신해 출판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출판계 지도자로도 화려한 이력을 남겼고, 특히 불교방송이 개국하면서 낙양의 지가를 기록한 ‘고승열전’을 집필했으며, 교계언론에 날카로운 칼럼을 기고하는 칼럼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이날 모처럼 차선회 모임에서 만난 두 사람은 옛날 시절인연을 생각하면서 두 손을 맞잡았다.

“형님 덕분에 한 세상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살 수 있었다”며 감사를 표하는 아우 윤청광 작가의 말에 형님 김종규 회장의 답변이 기가 막히게 멋있다.

“내 좌우명이 ‘베푼 일은 기억하지 말고, 은혜를 받은 일은 잊지 말라’는 것이네. 사실 그때 내가 해 준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어. 돈이 들어가는 일도 아니고, 대단한 게 아니야. 그 당시 내가 지켜보니까 윤군이 읽는 책이 고등학생이 읽는 수준이 아니야. 그래서 저 친구가 좀 다르구나 라고 생각했었던 거지. 내가 해준 게 뭐 있나. 책 빌려준 것 밖에. 하하. 난 오히려 자네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어서 내가 큰 의리 있는 사람이 되었지. 외려 고마우이.”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두 사람이 펼쳐놓는 아름다운 인연 이야기에 참석했던 차선회 회원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감동의 박수를 오랫동안 멈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