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가 자신의 주색 관련 행적에 대해 반성의 태도를 취했는지 의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박재현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는 11월 21일 열린 ‘경허 선사 열반 100주년 학술세미나’에서 “주색과 관련된 경허의 소회는 반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아수용’(self-acceptance)의 태도에 가까워보인다”며 최근 <불교평론>에 ‘경허가 자신의 주색을 후회했다’는 주장을 펼쳐 뜨거운 논란을 일으켰던 재야불교학자 윤창화 민족사 대표와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박 교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 풀이되는 자아수용은 정서적으로 성숙되고 안정된 사람의 의식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라며 “자신의 한계와 역할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태도는, 그의 북행이 도피성 은둔이 아니라 의도적 자리비워주기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경허의 의도적 자리비워주기’라는 해석의 근거로 “아는 것 없이 이름만 높은데 세상은 위태로우니/ 어디에 몸을 감추어야할지 알 수 없네/ 어느 한적한 어촌 주막엔들 숨을 곳이 없을까마는/ 다만 이름을 감출수록 더욱 새로워질까 두려울 따름이다”라는 경허 58세(1903)에 지은 ‘自梵魚寺向海印寺途中口號’라는 제목의 한시를 제시했다.

박 교수가 이날 제시한, 경허의 삼수갑산행은 '주색에 대한 후회에서 비롯된 도피성 은둔'이 아니라 '의도적인 자리비워주기'라는 새로운 해석은 이날 세미나에서 눈길을 끌었다.

경허 선사 열반 10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에 참석한 사부대중이 국제회의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박 교수는 또 경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사람들이 친일행위를 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을 들며, 부정적 평가에는 식민통치 이념이 농후하게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권상로, 김태흡 등 일제강점기의 심전개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인물들에게 경허는 더 없이 좋은 먹잇감이었을 것”이라며 “주색에 관련된 경허의 일화들은 이들에 의해 부정적으로 확대 재해석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주장했다.

또 주색과 관련된 행적 때문에 경허를 한국불교의 사표(師表)로 삼기 어렵다는 평가에 대해 “사표됨에 대한 독재적 혹은 식민지적 허구성이 작동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독재권력의 특징은 개인의 사적인 영역을 체제의 영향권 안에 두는 것이며, 개인의 옷차림이나 생활태도를 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개인의 몸에 대한 권한도 박탈한다”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검열을 통해 체제에 스스로 주눅 들어 체제에 순응하도록 하는 것이 사표의 허구성”이라고 지적했다. 즉 바른생활인은 체제가 설정한 허구적 사표는 될 수 있을지언정 올바른 사표의 모습, 특히 선(禪)의 사표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또 “결제 때마다 선원에서 정진한 대중의 법명과 소임을 기록하는 방함록 작성에서도 경허스님의 역사의식이 드러난다”며 “한국불교의 방함록 작성을 처음 시도한 인물이 바로 경허였을 것이며, 뒷사람들에게 보여주어 감계(鑑戒)로 삼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했다.

박 교수는 “일제강점기라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 선사 경허의 선택지는 별로 없었을 것”이라며 “그와 관련된 파격과 기행의 이야기들이 적잖게 전해지고 있지만, 정작 현재 남아 있는 경허의 유뮨을 통해 보면 그는 그 어떤 수행자보다 엄격하고 방정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강조했다.

한편 세미나에 앞서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설정 스님은 인사말을 통해 “경허선사는 불교가 쇠퇴했던 시기 혜성처럼 출현해 꺼져있던 선풍을 진작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근현대 많은 스님들이 선사의 영향을 받아 공부했다”며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내려놓고 일체 중생을 위하겠다는 자비행은 오직 선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선사를 회고했다.

설정 스님은 이어 최근 경허 관련 논란과 관련해 “처절하게 정진하고 한국불교 중흥을 위해 노력했던 선사의 위대한 발자취는 온데간데없이 이상한 스님으로 묘사되는 것은 선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며, 오늘 세미나가 동서남북을 가로지르며 선원을 개원하고 전법하려 했던 진지한 모습을 비롯해 경허선사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이상하 한국고전번역원 교수가 ‘경허의 문학’에 대해, 전 전국비구니회 기획실장 효탄스님이 ‘경허의 법맥과 그 계승’에 대해 발표했다. 또 김방룡 충남대 교수가 ‘경허의 간화선과 수행관’에 대해, 신규탁 연세대 교수는 ‘<경허집> ’법어‘에 나타난 경허의 선사상 소고’를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