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불교가 중세 역사에서 475년간 한 나라를 끌어갔던 이데올로기로 역할 했던 것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모든 나라가 칸의 지배를 받을 때 고려만이 대원제국의 사위 나라로 ‘대접’을 받았는데 오직 그 후손들만이 선조들을 존경하지 않는 것은 답답한 일입니다.”

유홍준 교수(명지대 미술사학과, 사진)가 11월 21일 오전 7시 그랜드 앰버서더 서울에서 열린 불교포럼 조찬 강연에서 고려시대와 불교문화 위상의 재조명 필요성을 제기했다.

유 교수는 ‘불교미술을 통해 본 교려왕조의 새로운 이해’를 주제로 펼친 이날 강연에서 “우리는 고려왕조에 대해 통일신라나 조선왕조와 같은 뚜렷한 문화적 정체성을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고 꼬집고 “고려왕조가 겪은 전란과 사회적 혼란은 어느 시대 어느 왕조에서나 일어난 사회적 갈등의 기록일 뿐, 고려는 오히려 그 많은 시련을 극복한 저력 있는 건강한 나라였다”고 강조했다.

고려시대 귀족사회에서 주도적인 ‘문화담당층(문화 주도세력)’이 몇 차례 이동했다는데 주목한 유 교수는 “문화담당층이 이동함에 따라 그들이 창출해낸 문화의 내용이 달랐고, 그것은 고려 문화가 다양성을 지니게 된 계기”라고 주장했다.

고려시대의 권력은 건국 당시 지방 호족에서부터 중앙문신귀족으로, 이후 중앙무신귀족으로, 중앙권문세족 옮겨갔으며, 권력층은 문화를 창출해내는 문화담당층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유 교수는 “고려시대 지방호족문화는 당시 만들어진 석탑과 불상 등에 지방적 성격을 뚜렷이 나타낸다”며 “지방 호족문화의 특수한 예의 하나인 은진미륵을 석굴암에 비교하면서 통일신라에 비해 고려시대의 조각솜씨가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그 유물의 성격을 잘 못 이해한 것으로, 이는 오히려 낙후된 지방에도 불교문화가 뿌리내리면서 생긴 지방문화의 한 특성”이라고 말했다.

이어 “중앙문신귀족은 문기(文氣)를 지닌 순청자를, 중앙무신귀족은 화려한 상감청자를 선호하고 이는 시대의 문화가 됐다”고 말한 유 교수는 “원나라와의 강화 이후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한 권문세족은 독자적인 고려문화를 만들어 갈 수 없는 태생적 한계에서 섬세하기 그지없는 고려탱화를 창출했다”고 소개했다.

이와 함께 유 교수는 “문화 창출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든 불교가 고려사회를 움직이는 주도적인 이데올로기였다”며 “고려가 몽고의 침입을 받았을 때 국가적 역량을 쏟아 팔만대장경판을 제작한 것은 고려사회에서 불교가 지닌 의미를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 교수는 “이처럼 자랑스러운 역사와 문화를 지닌 고려시대를 그 후손들이 깎아내리는 것에 분개할 수밖에 없다”며 “고려시대를 통해 외국문화를 포용할 줄 알았던 고려의 포용력과 거란과 송 사이에서 실리를 취할 줄 알았던 외교력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불교포럼의 조찬 강연에는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 봉은사 주지 진화 스님,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를 비롯해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김희옥 동국대 총장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