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 없는 작업(作業)이었다. 끊임없이 희망을 도려내어 버리곤 하든 아픔의 연속이 내 삶이었는지 모른다. 배수(背水)의 진(陳)을 치듯이 절망을 짊어짐으로써만이 나는 차근히 발을 내밀 수가 있었다.’(<토지> 서문, 1979)
박경리(1926~2008) 선생이 육필로 원고지에 꾹꾹 써 내려간 대하소설 <토지>의 서문에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작가가 감당했던 고통과 고뇌의 시간이 묻어난다.
작가의 삶은 고되다. 거기에 여성이라는 현실이 덧대지면 그 삶은 더 무거워진다. 특히 근대 여명기에 여성작가로 살아야 했던 이들의 삶은 가시밭길이었다.
그런 삶의 무게 속에도 그들은 한국 여류문학의 시대를 열었다. 그 지난한 세월을 헤치고 마침내 한국문학사에 우뚝 선 여성 작가 13명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뜻 깊은 전시회가 마련된다.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관장 강인숙)이 9월 14일부터 오는 11월 3일까지 여는 ‘글을 담는 반짇고리-나혜석에서 박경리까지’가 그것이다.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여성작가를 망라하는 대규모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왼쪽 사진은 노천명의 젊은 시절>
전시에선 어머니와 아내로서 살았던 여성작가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이며 불교적 영향을 깊이 받았던 신여성 나혜석이 남편 김우영과 유럽여행을 떠날 때 찍은 사진과, 모윤숙이 글을 쓰던 책상을 비롯하여, 최정희가 아들 익조의 성적을 걱정하며 쓴 편지와, 아직도 실이 끼어 있는 한무숙의 재봉틀 등에서 작가의 체취가 진하게 느껴진다.
영인문학관 강인숙 관장은 “모윤숙 선생의 경우 딸이 캐나다에서 한복을 보내준 데다 송영순 교수의 애장품이 보태져 자료가 풍성해졌다”고 말했다.
문학에 관심이 있는 여성불자들이 꼭 한번 찾아가볼만한 특별전이다. 특히 나혜석 등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었던 작가들의 체취를 느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개막일(14일) 오후 4시에는 김남조 시인의 기념강연 ‘나의 삶, 나의 시’가 진행된다. 개별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알려주는 강연이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열린다.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의 ‘한국 여성 문학의 방향’(15일) ▲국문학자 송영순의 ‘모윤숙의 문학과 삶’(22일) ▲소설가 서영은의 ‘여성의 삶, 글쓰기’(10월 6일)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의 ‘나의 어머니, 박경리’(10월 13일) ▲서정자의 ‘나혜석이라는 창(窓)’(10월 13일) ▲김호기의 ‘한무숙의 생애와 문학’(10월 27일) ▲김현자의 ‘자의식의 심연과 감각의 변주’(11월 3일) 등이다. 개관시간은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월요일 휴관. 02-379-3182.
